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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Feb 27. 2025

섬마을 선생님

셋째 오빠가 도망을 갔다.

소의 어진 눈을 닮은 착한 무료 카지노 게임 서울로 도망간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열여덟이었나 열아홉이었나 확실히는 모르겠다.



그는 가톨릭 재단이던 국민학교 육 학년 말에 신부가 되기 위한 첫 과정인 서울 소신학교에 지원했으나 불합격해서 우리 고장에 있는 일반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아침마다 열네 살 그와 그보다 아홉 살 아래여서 다섯 살인 나와의 실랑이가 시작됐다.

무료 카지노 게임 등교할 때마다 집에 혼자 있는 게 두려운 나는 울며 그를 쫓아갔고 그는 나를 떼어놓느라 애를 먹었다.



부모님은 다른 고장으로 나가 장사를 하고 계셔 가끔씩만 집에 오셨고, 구 남매 중 큰언니는 시집을 갔고 큰오빠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겠고, 동생은 너무 어려 부모님과 함께 장터에 있었고 나머지 사 남매는 그의 학교보다 더 먼 국민학교에 다녀서 그보다 먼저 등교를 했기에 제일 마지막에 등교하는 그를, 가장이기도 한 그를 나는 꼭 붙잡아야 했다. 종일 혼자 집에 있는 게 무서웠으므로.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내일 무료 카지노 게임 학교에 가기 전에 일어나 그를 놓치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다.



지난밤의 다짐처럼 일찍 일어나는 날은 학교 가는 그를 따라가겠다고 울며 떼를 썼다.


어떤 날엔 눈을 뜨니 문창호지를 뚫고 방 깊숙이 들어와 있는 햇빛이 지금은 아침을 지나 오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난밤의 다짐이 실패해 무료 카지노 게임 등교한 후여서 나는 이미 혼자였다

이 꼬맹이가 오빠에 대한 연민도 가지고 있던 걸까. 그를 또 놓쳐서 놀라기도 했지만 무료 카지노 게임 나의 소란을 겪지 않고 편히 등교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밤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그를 깨웠다.

그의 손을 잡고 마당을 지나 마당 밖 화장실로 걸어가는데 하늘에서 달이 나를 내려다보며 자꾸 따라왔다. 나는 그에게 왜 달이 나를 따라오냐고 물었다. 그는 달이 내가 좋아서 따라오는 거라고 대답했다.

달이 나를 좋아한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져 히히 웃었다.




방문 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오빠가 찐 고구마를 들고 들어왔다. 햇빛이 머리 쪽 문창호지를 건너 방 깊숙이 들어와 있는데 오빠가 집에 있다. 사르르 마음이 안정되었다. 오빠 방학했어?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방학이 끝나도 그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방학이 아니라 무료 카지노 게임 졸업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다. 야뇨증도 사라졌다.





마루 기둥에 높이 걸려있던 사각의 스피커 안에선 이미자 문주란이 종일 노래를 불러 제켰다.

오빠는 오가면서 그들의 노래들을 따라 불렀다.



추석이 되었다.

백여 호가되는 제법 큰 우리 동네에서 콩쿨대회가 열렸다.

오빠가 나를 안아 무대에 세워주며 속삭였다. ‘동숙의 노래’ 부르라고.

나는 무료 카지노 게임 일러준 대로 마이크 앞에서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를 불렀는데 옆에 앉아 기타 치는 아저씨 반주가 엉터리여서 노래와 반주가 따로 놀아 불편해하면서 불렀다. 그 아저씨 때문에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꽤 언짢아졌다.


노래를 끝내자 나를 안고 내려온 무료 카지노 게임 둘째 오빠 넷째 오빠와 함께 다시 다시 무대로 올라갔다. 무슨 노래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조금 느린 노래였고 그렇게 같이 노래 부르는 세 오빠들이 멋져 보였다.

이어서 무료 카지노 게임 혼자서 또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섬마을선생님’이었다는 건 지금 기억한다. 무료 카지노 게임 자주 부르던 노래니까.




여덟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일곱 살 때 무료 카지노 게임 한글을 가르쳐주어서 입학 전에 한글을 다 뗄 수 있었다.

예비 소집 일에, 입학식에, 그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처음 타는 그네를 무료 카지노 게임 밀어줄 때 가슴이 내려앉는 것도 같고 울렁거리는 것도 같았다.

쓰기 숙제도 무료 카지노 게임 봐주었다.






그를 찾을 일이 적어졌다. 나대로 바빠졌으니까.

등교를 위해 일찍 일어나야 했고 언니와 함께 안개로 꽉 찬 개울 위 다리를 더듬거리며 건너 학교에 가느라, 운동회를 앞두고 학교 운동장에서 단체 무용 준비하느라, 하교해서 숙제하느라, 그를 찾을 일이 적어졌다.





무료 카지노 게임 서울로 도망을 간 것이다.

오랜만에 집에 오신 부모님이 놀랐고 시집간 큰언니가 집에 와서 말무료 카지노 게임. 며칠 전에 걔가 나한테 와서는 서울 가 택시운전 해 돈 벌어 집 사면 누나 문간방 하나 줄 거라고 하더니 걔가 진짜 서울로 갔나 보다고.

다음날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 외삼촌 집에 있는 그를 만났고 농사가 싫다고, 운전 배워 택시 운전 할 거라는 그를 설득무료 카지노 게임.



아버지의 설득으로 그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무료 카지노 게임.

어느 가을엔 밭에서 달콤한 배추 밑동을 뽑아다 우물가에서 씻어 동생과 나에게 까주었다.

처마 밑 제비 집에서 제비 새끼들이 짹짹거리는 어느 봄날엔 새끼 낳은 소의 태를 자르기도 무료 카지노 게임.


동생과 내가 소풍 가는 날엔 어디서 얻어왔나 계란을, 쑤고 있는 쇠 죽 위에 얹어 쪄서 싸주었다. 동생과 나는 학교에 가다가 길에 앉아서 계란 네 개를 다 먹어버렸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고 그는 군 입대를 무료 카지노 게임.

무료 카지노 게임 군 생활 하는 중에 부모님이 장사 터를 서울로 옮기면서 우리 식구는 서울로 이사를 했다.

서울로 와서도 부모님은 뚝섬 가게에서,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이 사놓으신 중곡동 집에서 따로 살았다.



그는 군 제대를 하고 나서 부모님 가게에서 같이 지내며 고향 사람이 서울에 와서 하고 있는 일터로 일을 배우러 다녔다. 쇠 구리 등 금속을 골라 녹이는 일이었다.


그는 가끔 빨갛고 뚱뚱한 돼지저금통에 지폐와 동전을 넣으며 말무료 카지노 게임. 여기에 돈이 가득 차면 엄마 아버지 보약 해드릴 거라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다.

어머니께 영어 참고서 값을 타러 밤에 부모님 가게로 갔다가 어머니께 혼이 나며 쫓겨나 중곡동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고 있을 때 무료 카지노 게임 자전거로 달려와 나를 태우고 정류장으로 달렸다.

뒤에 앉아 그의 허리를 잡고 서럽게 우는 나에게 무료 카지노 게임 말했다. “오빠가 참고서도 사주고 대학도 보내줄게.”



그는 중매로 선을 봐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그와 쌍둥이 형제인 둘째 오빠와 합동결혼식을 준비했고 두 오빠의 전세방 마련을 위해 고향의 넓은 밭을 팔았다.

늦은 밤에 중곡동 집으로 온 무료 카지노 게임 안방으로 들어와 앉자마자 흐느끼며 울었다. 밭을 팔고 우는 어머니를 차마 볼 수가 없더라며.

6,25 한국 전쟁 이후 부모님이 옹기장사로 돈을 벌어 어렵게 장만한 밭이었다.



무료 카지노 게임 큰딸을 낳았다. 연년생으로 둘째 딸을 낳았다. 고향사람에게서 배워 차린 그의 공장이 잘 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 환갑에 꽤 큰돈을 내놓아 잔치를 크게 치르고 부모님이 제주도 여행도 다녀올 수 있었다.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등 가족 모임이 있으면 우리 가족은 식사 후 한 사람씩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 중간쯤에서는 모두 같이 불러 합창으로 변했다.

신명 많은 그는 늘 ‘섬마을 선생님’을 불렀는데 양팔을 굽혀 세우고 박자에 맞춰 옆구리에 착착 붙였다 떼며 불렀다.



어느 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무료 카지노 게임 웃으며 말했다.

무료 카지노 게임 등교할 때마다 내가 울며 쫓아왔는데 어느 날은 학교에까지 쫓아와서 나를 데리고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받은 날도 있었다고.

수업을 같이 받은 건 내 기억에 없는데 그랬다니, 놀랐다.



그 후로도 무료 카지노 게임 웃으며 그 얘기를 가끔 했는데 그럴 때마다 가족들도 웃었지만 오래 지난 이야기라고 해서 나에겐 웃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럴 때마다 오빠에 대한 안쓰러움과 나의 공포가 뒤엉켜 가슴과 눈이 늘 뻐근했다



몇 년 후 원인은 잘 모르겠으나 오빠의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불안해진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술을 계속 마시면서 사업은 더 어려워졌다.

날이 갈수록 술은 그를 술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더욱 옭아매었다.

그는 그렇게 술 속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그의 큰 딸이 초등학교 사 학년이었고 넷째인 막내딸이 돌이 막 지나서였다.





무료 카지노 게임 소신학교 시험에 떨어져 가지 못한 길을 지금 그의 큰 딸이 걷고 있다.

유아교육을 전공한 그의 큰 딸이 수녀가 되어 미국의 한인 성당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아래 세 딸들은 결혼해 단단한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다.




분분히 벚꽃이 날리는 봄날 그의 기일에, 늘 그래왔듯 대가족이 그의 산소에 모였다.


연도를 끝내고 나자 무료 카지노 게임 떠난 지 이십 년도 훨씬 넘었으니 우리 이제 형에게 노래 불러주자고 막내오빠가 말했다. 노래를 좋아했던 형이니 우리가 부르면 아마 형도 같이 부를 거라고 했다.

하긴 그는 돌아오지도 못하는데 언제까지 슬퍼만 할 것인가.


“해애애당화 피고 지 이이는 서어엄마으으으을에에..”

작은 언니가 일어나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산소를 돌기 시작했다. 무료 카지노 게임 자주 불렀던 '섬마을 선생님'이다.



내가 일어나 양팔을 굽혀 세워 옆구리에 착착 박자를 맞춰 치며 뒤따랐다.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노래가 빨라지며 흥이 나기 시작무료 카지노 게임.


동생이 일어나 양팔을 위로 올리고 박자를 맞춰 걸으며 2절에 합류무료 카지노 게임

“구름도 쫓겨 가는 섬 마을에..”




장인이 너무도 일찍 떠났기에 장인의 얼굴도 모르는 그의 착한 세 명의 사위가 이 광경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고들 서있다.

서른여덟 살에 남편을 보내고 혼자서 옹기장사, 식당, 전 가게 등을 운영하며 네 딸을 잘 키워낸 그의 아내가 웃으며 일회용 접시에 노래 끝나면 가족이 같이 먹을 전과 떡을 담고 있다.

그의 세 딸들이 까르르까르르 웃는다.

그의 손자손녀들은 넓은 묘원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있다.



부모님을 오래 모시고 살아서인지 형제들 중 가장 점잖은 넷째 오빠는 떡과 전을 담고 있는 올케언니 옆에 앉아 전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난처한 표정으로 웃는다.



어머니는 돗자리에 앉아, 세운 양 무릎 아래를 양손으로 깍지 끼고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내가 저년들 챙피해서 못 살겠다”며 돌아앉았다.

막내오빠가 세 자매 사이에 끼어들어 막춤을 추며 같이 돌았다.

소주를 종이컵에 따라 몸을 숙여 무덤 주위에 부어주며 큰언니가 말무료 카지노 게임. “너 서울 가 택시 운전해서 집 사면 느이 누나 문간방 하나 준대매, 문간방이고 뭐고 니 좋아하는 술이나 실컷 마셔라 이새꺄!”




나는 노래를 끝내고 쭈그려 앉아 그를 쓰다듬듯 가녀린 무덤을 쓸어주며 물었다. “오빠, 나 영어참고서 언제 사줄 건데? 대학은?”




세월은 속절없이 흐른다.


무료 카지노 게임 떠난 지 37년이 됐다.



우리 형제들 중 유일한 음치여서 잠바를 벗어 흔들며 “자아 자아, 노래 노래! 시이작!” 선동만 하던, 동생들 사이에 끼어들어 막춤만 추던 막내오빠는 작년 가을에 세상을 떠났다.

저년들 창피하다며 돌아앉던 어머니도 이 묘원에 누워계신다.


자기 형수 곁에 앉아 우물우물 전을 먹던 넷째 오빠도 이 묘원에 누워있다.

느이 누나 문간방 하나 준다 하지 않았느냐며 술을 부어주던 큰언니는 지금 병환 중에 계시다.



먼 먼 곳으로 떠나고, 아프고...



남아있는 형제들은 모여도 신명이 나질 않아 이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내가 죽어서 가루 되어 잠든 곳에선 누가 노래를 불러주려나. 나도 유행가 좋아하는데..

https://youtu.be/X2LUZrXvxM4?si=ibGnkuw6jguUPDw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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