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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Mar 20. 2025

울긴 왜 울어


“비키세요 비키세요..”

국민학교 5학년이던 막내오빠가 1학년이던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앞에서 걸어가는 어른에게 자꾸 비키라고 소리쳤다.

그가 자전거를 막 배우던 시기였다.

먼 거리에 있는 성당에서 집에 올 때까지 그는 서툰 자전거 실력으로 넘어질까 두려워하며 기우뚱거리나를 집에까지 무사히 데리고 왔다.




그는 자신의 삶의 자전거에도 평생 나를 태우고 다녔다. 자신의 일이 복잡해져 머리 아파도 내가 위험하지 않도록 살펴주면서.

아니다, 우리가족 모두를 태우고 다녔다는 표현이 맞겠다.





다섯 오빠 중 나이차가 제일 나지 않는 그와의 추억은 친근함이다.

넷째 오빠처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기억보다는 함께 행동했던 기억들이다.

한 겨울 할아버지 제삿날, 옹기공장 옆 눈 비탈길을 엉덩이 미끄럼을 타고 내려가 집집이 들러 저녁에 연도 하러 오시라는 어머니의 말을 함께 전하던 오빠도 그였고, 섣달그믐날 밤에 일찍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말해 자꾸 내려앉는 눈을 위로 치켜뜨게 한 오빠도 그였다.


학교에서 남자 짝꿍이 내 국어 교과서에 낙서를 해서 그에게 일렀더니 그가 우리 교실로 들어와 짝꿍을 혼내주고가기도 했다.



그는 공부를 잘했다.

3학년 때 호롱불 아래서 산수 분수와 약분을 그에게 배웠고, 중학교 입시를 앞둔 6학년 2학기 가을엔 그에게 도형을 급히 배다. 산수를 어려워하는 나에게 그는 친근한 접근법을 동원해 가르쳐주었다. 산수가 쉽게 다가온 건 그때뿐시험지를 받아 보면 여전히 어려웠지만.



중학교에 들어간 그는 이웃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바빴고, 아직 국민학생이던 나는 누가 귀찮게 해도 일러바치기엔 그가 다니고 있던 중학교는너무 멀리있었다.



친구 미순이가 사랑채에서 오빠가 친구들과 담배를 피운다해서 방을 빼꼼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너무 놀랐다.



그가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겨서인지, 거기다 공부까지 잘해서인지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 일 때 나는 그가 다니는 고등학교와 같은 교문 안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내가 입학하자 멀리서 나를 보며 "쟤가 용민이 동생이야 쟤 쟤가!" 하는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참새들의 짹짹짹 소리처럼 들렸다.



어느 날 늦은 밤엔 넌방에서 책가방을 든 채 같은 반 선이 언니가 와서 오빠랑 함께 자고 가겠다고 막무가내였고 오빠는 그럼 나는 마당에 가서 자겠다며 빨리 너의 집으로 가라고 둘이 승강이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오빠가 울며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취업을 했다.


출근하며 그는 나와 동생에게 천자문 하루에 다섯개씩 쓰고 외우라고 숙제를 내주었다. 그걸 못 쓰고 못 외우면 그는 밤에 들어와 를 내기도 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식을 끝내고 교실에서 나오는데 오는 줄도 몰랐던 가 나에게 덥석 새 통기타를 안겨주었다. 내가 송창식 윤형주, 비틀스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그가 군입대를 했다.

그가 입고 간 옷이 소포로 왔을 때 나는 그의 옷을 잡고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때 쓰고 있던 일기장에 오늘은 오빠의 옷을 잡고 울었다고 기록하던 기억이 난다. 그 일기장들은 다 언제 어디로 갔을까.


그는 px에서 일을 했다.




그가 제대를 했다.


고향의 고등학교 여자 동창들이 집에 드나들었다. 어느 날은 선이 언니, 어느 날은 현숙언니, 어느 날은 영란언니와 선이 언니 같이.


겨울날 방문했던 선이 언니의 옷차림이 지금도 생각난다. 독감이 전국을 휩쓸던 한 겨울이었는데 독감을 심하게 앓고 났다는 그녀의 옷차림은 상아색 미니스커트 양장이었다.

고등학교 때 오빠 방에 와서 자고 가겠다며 떼를 썼던 그녀, 출판사를 다니고 있다는 그녀는 키가 아주 작았는데 그 차림이 그대로 매력 있었다.


오빠는 어느 여자 동창들에게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누군가는 오빠가 없을 때 찾아왔다가 도로 가기도 있다.




제대 후에 그가 취업자리를 알아봤는지는 모르겠다.


김장철이 되자 부모님 옹기전이 바삐 돌아갔다. 그가 넷째 오빠처럼 부모님 옹기를 받아서 리어카에 싣고 동네마다 다니며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그는 옹기장사로 바빴고 나는 대학에 가지 못해 헤매느라 바빴다.


재수하던 가을날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체력장을 마치고 막 나오는데 오빠가 뒤에서 다가와 내 한 손을 잡았다. '너의 막연함을 내가 알고 있지' 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우린 손을 잡은 채 말없이 사근동비탈길을 올라 버스를 타고 망우동 집으로 갔다.





그가 언니의 소개로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를 맘에 들어했던 그는 매일 밤 거실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는 늘 길었다.


어느 날 하루는 그녀를 데리고 집에 온 그가 그녀에게 마당에 있는 두 개의 옹기 리어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는 형 거, 하나는 내 거"라고.

그리고 그녀를 보냈다.


그날 그는 혼자 술을 많이 마셨다.





다음 해 크리스마스날 그녀와 그가 결혼을 했다. 몇 년 후 그가 아들을 낳았고 몇 년 후 나도 결혼을 했다.

나의 결혼 때 그가 남편의 시계를 해주었고 나의 아이가 백일 땐 보행기를 사주었다.



그는 위의 오빠들이 이사할 때마다 그의 아내와 함께 가서 전기 수도꼭지 등 고칠 데를 봐주었다.

그는 그의 아내와 함께 옹기장사를 몇 년 더 했고 그동안 살던 서울을 떠나 경기도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옹기 장사를 접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가구 회사,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교습생 가르치는 일 등.. 몇 군데 더 다녔지만 어디든 오래 있지를 못했다.자기 사업을 꿈꾸고 있었으므로.

그의 아내는 그가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인기도 일등만 해서 사회에서도 일등만 해야 한다는 일등 병을 못 버린다고 말했다. 생활고를 겪었다.




그가 자기 일을 시작했다.


일이 조금씩 풀리자 그는 우리 대가족의 큰 일 작은 일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부모님 생신을 주관했고 부모님과 형제들을 데리고 동해안을 다녀오기도 했다.


음주가무로 체화돼 있는 우리 가족은 식사 후 늘 노래를 불렀다. 부모님 생신을 치르는 식당에서는 노래방 기계가 있는 그 자리에서, 동해안에선 노래방으로 가서.

형제들 중 유일한 음치인 그가 부르는 노래는 정해져 있었다. 나훈아의 '울긴 왜 울어'


노래를 시작할 때 노래방 화면으로 전주 끝에서 손가락을 박자를 꼽아주며시작 지점을 알려주는데도 그는 한 두 박자 빨리 시작하거나 한 박자 반 늦게 시작했다.

나는 음정도 박자 못 맞추는 걸 이해 못 하겠다며 대체 오빠는 우리 핏줄 맞느냐고도 말했다. 그래도 그는 늘 춤까지 추었다.





IMF의 직격탄을 그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가 하던 일이 주저앉았다.

그의 집에 빚쟁이가 들이닥치며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그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는 어린 딸 넷을 두고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 30 대에 혼자된 형수의 옹기 가게로 옹기 차가 들어오는 날엔 그의 아내와 함께 가서 옹기를 내려주고 왔다.


극심한 생활고로 명절 때 교통비가 없어 부모님 댁에 오지 못하기도 했다.



지인의 소개로 그는 양초를 만드는 회사에 그의 아내와 함께 들어가게 됐다. 회사 차로 거래처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전국 거래처를 다니며 배달을 했다.


몇 년 후엔 직급이 올라 경기도에 새로 지은 공장 하나를 맡게 됐다. 구인광고로 주위에 사는 이들을 직원으로 뽑아 공장 운영을 시작했다.


공장에서 직원들과 의논하며 여러 가지 색깔을 맞춰 양초를 만들고 배달하며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안정적으로 몇 년 잘 이끌어나갔다. 그러다가 해외에서 살다 온 사장의 형이 오게 됐고 오빠 부부는 쫓겨났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와 그의 아내는 혼자된 형수의 애들 졸업식에 참석해서 형의 빈자리를 워주었다.





현재를 미래로 단언하는 건 위험하다. 나쁜 일이 좋은 일이 되기도 하니까.

실직 상태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그들에게 해외에 사는 동생 내외가 우선 겨울이나 나시라고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그는 그 돈으로 중고 트럭을 샀다. 그리고 지인에게 돈을 빌려 경기도 근교 창고를 입대해 그동안 배워 안팎으로 다져온 양초 공장을 시작했다.




흥부가 박을 타니 금은보화가 쏟아지더라는 말이 동화책에만 들어있는 서사가 아니었다. 그런 일이 그들에게 실제로 일어났다. 노력 없이 박만 열었던 흥부와는 달리 그들은 그들의 노력 끝에 얻어낸 결과이긴 했지만.


어느 날 그가 그의 공장을 방문한 큰언니를 모시고 공장을 같이 돌며 말했다. 빚 다 갚았다고, 남아있는 이 많은 물건들은 다 남는 돈이라고, "누나 오래 사슈, 팔도 유람 시켜드릴게."


그 일을 시작한 지 7년 만에 넓은 땅을 사서 공장을 지어 이사를 했다. 그의 병이 치유되고 있었다.




그는 약속대로 형제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다. 우린 그가 가자고 하면 따라만 가면 되었다. 제주도로 여수로 동생이살고 있는 싱가포르로,진주 거제 위도로.


한 조카의 남편이 실직해 있을 땐 생활비를 보내줬다.


그의 넓은 집에서 우린 자주 모였다.명분은 그때그때 달랐다. 선동은 주로 30대에 혼자 된 올케언니가 했다. 구정은 각자 소가족끼리 쇠더라도 신정엔 모여야지,랍스타 먹으러 오너라,그냥 보고 싶으니까, 만두 해먹자, 번개팅으로..


아파서 외출이 어려운 하나 남은 형에겐 용돈을 자주 보내드렸다.



또 다른 곳에 공장 하나를 더 마련했다.

박자도 못 맞추는 그의 노랫소리는 커졌고 막춤은 더 요란해졌다. 형제들의 깔깔 웃음소리도 커졌다.


해외에 있는 동생이 그녀의 가족과 함께 온다고 하자 동생 오면 다 같이 놀라가자고 큰 차를 샀다.

그는 한 겨울 추위로 몸과 맘이 떨리고 있을 때 그의 사업이 불처럼 일도록 씨앗을 제공한 동생에게 가장 고마워했다.


그는 그의 처가 식구들도 잘 챙겼다. 그의 장인이 세상을 떠나고 골고루 나누어 받은 그의 몫의 유산을 형편이 가장 어려운 처형에게 다 넘겨주었다. 꽤 큰돈이었다.




"형이 돈 때문에 죽는 일은 없을 거다!" 넷째 오빠가 병원에 입원하자 그가 한 선언이었다. 넷째 오빠의 병이 쉽게 나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선언대로 그는 넷째 오빠의 치료비를 다 대고 세상 떠날 때까지 살펴주었다.




오십 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가4년을 마치고내가졸업하는날이었다. 침에 졸업식장에 가려고 화장을 하다가 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고생카지노 게임 추천!"


체력장을 끝내고 나오는 나의 손을 잡고 사근동 그 고개를 같이 오르며"너의 이 막연함을 내가 잘 알고 있지.."마음으로 건넨 후 그가 38년 만에찍어준 마침표였다.

화장대에 엎드려 조금 울었다.


날 졸업 축하선물로 멋진저녁 식사를 그에게 대접받았다.



그가 유일하게 부를 줄 아는 노래, 진짜 못 부르는 노래 '울긴 왜 울어'

그는 영원히 부르고 나는 영원히 듣기 괴로워할 줄 알고 있었다.


내가 졸업하고 년 후에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


공장과 병원을 오가며 간병하던 그의 아내가 과로로 쓰러질 지경이었다. 나도 간병에 합류했다.

낮엔 내가 밤엔 그의 아내가 맡았다.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그가 아파 누워서야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다니..



옛날에 그가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간 이야기, 분수 나눗셈 가르쳐준 이야기, 외갓집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나에게 산수 가르쳐줄 때 왜 그렇게 나에게 혼을 냈는지 모르겠다며 그가 미안해했다. 3 더하기 5는? 물으면 내가 8이라고 대답해 놓고 거꾸로 5 더하기 3은? 물으면 내가 대답을 못하더란다. 우리는 킥킥킥 같이 웃었다.

산수 못한 나보다 노래 음정 박자 한 번을 평생 못 맞추는 오빠가 더 웃기지 않어? 받아치고 우린 또 흐흐흐 웃었다.


같은 동네였던 외갓집 이야기는 그가 나보다 많이 알고 있었고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그가 모른다고 했을 땐 신기하기도 했다.


그의 아내는 밤에나 오니까 그녀가 자리에 없을 때 선이, 현숙, 영란언니의 소식을 좀 아는지 물어볼 걸 그걸 잊었다.


이직률이 0%일 정도로 직원들이 만족해하며 잘 돌아가고 있는 공장을 그의 아내와 아들이 잘 운영하고 있어 다행이라고,그런데마지막 꿈이 하나있다고 그가 말했다.

옹기장사라고. 옹기를 많이 쌓아두고 옆에서 옥수수도 쪄서 팔고 싶단다.


옥수수 알바 자리는 다른 사람 쓰지 말고 나를 써달라고 말했다. "내가 그 자리 찜했다!" 못을 박았다.



그가 떠나고 나서 후회하지 않도록 잘해야지 다짐하고 합류한 간병.

간병이 다짐만 가지고는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도 나도 몇 차례 몸살을 앓았다. 나의 목소리가 감기 소리로 변할 때마다 그가 미안해했다.





나는 그의 아내에게 울며 말했다.

지난 아버지 기일에 산소에 와준 조카사위들과 조카며느리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와줘서 고맙다고 오빠가 말할 때 나에겐 오빠가 우리 집안의 더 멋진 어른으로 보였다고, 최근에 남편을 보낸 조카며느리의 어깨를 더 오래 두드려줄 땐 울컥했다고, 오빠의 그런 모습을 더 오래 보고 싶은데 내년엔 못 볼 것 같아 불안하다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올케언니도 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그가 떠났다. 지난가을이었다.


간경화 말기로 악악 소리를 지르며 극심한 고통을 겪던 그의 모습 끝에서고통 없이 눈 감고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차라리 편해 보이기도 했다.


'고통 없는 그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묘원에서 많이 보는 묘비명이 처음, 실감있게 다가왔다. 울고 있는 올케언니와 조카 옆에서.




막춤과 함께 막 부르는 그의 노래를 이젠 볼 수도 들을 수없다.예약해 둔 옥수수 알바 자리도 날아갔다.



나는 쓸쓸히 고아가 되어가고 있다. 다른 오빠들과 그가 떠난 길을 나도 가게 될 테지만.


https://youtu.be/fgjqdzH2D2w?si=T_SqA94NUoNneC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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