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게임가 7살이 되던 해, 유치원 선생님의 전화. “어머니, 봄이가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아요” 덜컹. 마음이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카지노 게임가 태어나 1년간 육아휴직을 했고, 카지노 게임가 14개월이 되던 때 걸음마를 떼지 못한 카지노 게임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복직을 했다. 남편은 나의 복직과 함께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14개월부터 시작된 어린이집 생활은 7살 유치원으로 이어졌고, 제일 늦게까지 홀로 남아 엄마를 기다리는 카지노 게임로 자랐다.
유치원 선생님의 전화 이후, 카지노 게임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 놀이터 생활을 자처했다. 카지노 게임를 데리고 놀이터에 가려고 퇴근 후 총알택시 마냥 풀액셀을 밟고 아슬아슬한 곡예운전을 했다. 겨우 카지노 게임를 찾아 놀이터로 나가보면 다들 놀이터에서 실컷 놀고 저녁 먹으러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실망한 카지노 게임의 손을 잡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올라왔다.
당시 나는 학대피해아동을 발견, 보호, 치료하는 아동복지시설에서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였다. 내 눈엔 온 세상 모든 카지노 게임들이 다 귀하고 소중했다. 그만큼 마음을 다해 일을 했다. 내 카지노 게임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매일 12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이어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학생의 담당 상담원이라 안산고대병원에서 학생의 보호자 역할을 했다. 환자 침대 밑, 보호자 간이침대에 자려고 누워, ‘이 카지노 게임를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는 말을 계속 되뇌었다. 교회를 다니지도 않으면서.
카지노 게임들을 학대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일이라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도 많았다. 그로 인해 비난을 듣기도 하고 무거운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 일을 10년 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카지노 게임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런 내가 카지노 게임를 낳았다. 모든 엄마들이 마찬가지겠으나 내 카지노 게임만큼은 충분히 행복하게 잘 키워내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러하질 못하다고 생각했다. 내 카지노 게임가 사회성에 문제가 있나?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은 다른 카지노 게임들을 돌보느라 내 카지노 게임를 돌보지 못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닿았다. 그것이 휴직과 퇴사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카지노 게임는 여전히 친구들과의 관계가 어려운 카지노 게임였다.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나누지 않았고, 혼자 등교하고 혼자 하교했다. 어쩌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 때면 멀찍이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친구들을 지켜보았다. 착하고 고마운 친구가 ’같이 놀자 ‘는 말을 건네면 겨우 친구들 틈으로 들어갔다. 도통 친구들 틈에 들어가려 하지 않아 카지노 게임를 벤치에 두고 내가 친구들 사이에 들어가 놀았다. 경찰도 하고 도둑도 하고. 초등 1학년 놀이터 친구들은 ’ 아줌마‘, ’ 아줌마‘를 부르며 나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렇게 놀고 있으면 카지노 게임도 은근슬쩍 놀이패로 들어왔다. 그렇게 매일을 카지노 게임가 놀던 안 놀던 놀이터로 향했다. 그러다 초등 1학년 생활에 적응을 했는지, 주변 친구들이 착했는지, 엄마가 뒤에서 있어서 그랬는지 카지노 게임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중엔 “친구야~ 우리 경찰도둑 놀이하자”는 말도 카지노 게임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 시절, 혼자인 카지노 게임를 옆에서 지켜보는 게 참 속상하고 슬펐지만 또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 감사하다 여겼다.
카지노 게임는 낯가림이 심하고 경계심이 많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일은 없다. 새로운 공간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는 꽤나 오랜 시간을 공을 들여 카지노 게임에게 설명해주어야 한다. 이런 성향의 카지노 게임를 데리고 한 달 살기를 가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일단 한 달 살기를 떠나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는 것도 힘든 과정이지만 한 달 살기 도시에 도착해서 현지 학교 또는 어학원을 다니며 적응해야 하는 과정은 더욱 힘에 겹다.
다행히 물놀이를 좋아하는 카지노 게임라 물놀이를 실컷 할 수 있다는 말에 따라나선 세부 한 달 살기에서는 초등 2학년이던 사촌언니와 함께라 어학원 적응도 쉽게 했고 아주 즐겁게 생활했다. 형제, 자매가 있는 가정이라면 특히 형제, 자매가 같은 학교 또는 어학원에 다니는 것이라면 적응하는 데 있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외동인 카지노 게임는 시드니와 오클랜드 한 달 살기에서 초기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현지 학교를 가기 위해 에어비앤비를 나서는 카지노 게임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 학교 가기 싫다”는 말을 이어했다. 적응력 약한 카지노 게임를 괜히 데려와서 고생만 시키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책도 하고, 카지노 게임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카지노 게임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유심히 관찰하며 타인의 특징을 알아채 맞춰주려는 배려심이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어려워하지만 도전해야겠다고 마음이 서면 잘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는 성실함이 있다.
카지노 게임는 현지 학교 단기스쿨링을 하며 ’ 학교 가기 싫다는 말‘은 했지만 ’ 학교에 가지 않겠다 ‘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친구들과 어울려보려고 나름의 노력을 했다. 김밥을 유독 좋아하는 카지노 게임에게 스쿨링 첫날 런치박스로 김밥을 싸서 보냈더니 반 이상을 남겨왔다. 이유를 물으니, 현지 친구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느라고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했단다. 친구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카지노 게임의 노력이었다. 어느 날은 H마트에 가자고 하길래 함께 갔더니, 조미김과 마이구미를 사달라고 했다. K푸드의 유행으로 유명해진 한국 스낵을 모닝티로 가져가서 친구들과 함께 먹겠다고 한 것이다. 어떤 날은 ’ 로제의 아파트‘ 게임을 엄마에게 배워 가기도 했다. 물론 친구들에게 ’ 아파트 게임하자 ‘는 말을 건네진 못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으로 게임룰을 배워가는 카지노 게임에게 고마웠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이면서 어느 날은 “엄마, 모닝티 빨리 먹고 플레이그라운드에 나가서 놀아야 하니까, 모닝티 조금만 싸줘”라는 이야기를 했다. 또 어느 날은 친구들과 하는 Tag 놀이가 재미있다며, 빨리 내일이 와서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아주 조금씩 카지노 게임는 친구들과 함께 놀며 적응을 해나갔다.
한 달 살기는 하루 즐기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적응이 필연적이다. 적응의 과정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듯이 쉽지 않은 적응과정이 카지노 게임에게 큰 경험이 되리라 믿는다.새로운 맛을 느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낯선 감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뇌가 긴장하고 반응하기 때문이란다. 낯선 환경에 놓인 카지노 게임는 처음엔 긴장하지만 또 한 걸음 한 걸음 자신만의 방식으로 적응해 나간다. 낯선 환경에 카지노 게임를 놓아두는 것을 미안해하기보다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는 ’ 자신만의 방식‘을 알아가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삶은 언제나 변화하고, 누구든 새로운 환경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또 그 과정에서 배우는 무언가가 있음을 믿기에.
오클랜드 한 달 살기 후 카지노 게임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처음으로 ’ 학교 가기 싫다 ‘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3월이었다. 부반장선거에도 출마하겠다는 놀라운 이야기도 들었다. ’ 제가 신은 이 양말이 빵꾸가 날 때까지 우리 반을 위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라는 공약을 카지노 게임 스스로 만들어 냈다.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카지노 게임가 어떤 마음에서 선거에 나갈 생각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카지노 게임를 소극적이고 긴장감 높은 카지노 게임라고 단정하지 않기로 했다. 한 해 한 해 성장하는 카지노 게임를 보면서 힘든 세상에서 자기만의 모습으로 삶을 꾸려 갈 것 같다는 막연하지만 단단한 믿음이라는 것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