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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서린의 뜰 Mar 28. 2025

고인 물

두 번째


사흘뒤 아침 카지노 게임과 연경은 사무실에 들러 부장님과 각 팀장님에게 출근 인사를 하고 회사 앞에 놓인 버스에 올라탔다. 이번 경력직 공채로 들어온 둘은 직원 연수에 함께 참여하는 바람에 이틀간 사무실을 비우게 되었다. 둘이 나란히 버스 옆 자리에 앉자 어색한 침묵을 깨고 연경이 카지노 게임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시간에 사무실에 안 있으니까 조금 어색하네요.

네, 저도.

카지노 게임 씨 집이 성남이라고 했던가요? 아침 출근길은 얼마나 걸려요?

저 한 4~50분쯤요.

아, 정말요? 다닐만하네요. 좋겠다.

대리님은요?

저요, 전 1시간 4~50분?

헐.

그런데 이전 직장도 강남이어서 한 시간 반 이상은 기본으로 걸렸어요. 이젠 그러려니 하고 다니고 있어요.


잠시 침묵이 흐르다 연경이 생각났다는 듯 카지노 게임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아, 그런데 카지노 게임 씨 이전엔 어떤 일 했어요?

이전에도 식품 쪽에서 일했어요. 규모가 작아서 여 사무직원이 저 한 명인데.

아, 그랬구나. 저도 식품 쪽이요. 그런데 종합식품은 저도 아니었어요. 수출을 꽤 크게 하는 곳이었는데 지금 여긴 내수 쪽 시장이 커서 해외사업부 일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회사는 커졌지만 수출업무 자체는 어떨지. 카지노 게임 씨는 그럼 전에 회사에서 수출 지원 업무 한 거예요?

아니요, 거긴 국내 영업만 거의 하는 곳이었어서.

아, 그렇구나. 지금 하는 영업지원 업무는 주연 씨가 사수인 거죠?

네.

1팀 시장이 커서 주연 씨 일이 많아 보이는데 졸업 후 계속 여기서 일했다 하니 수출 업무는 속속들이 잘 아는 것 같더라고요. 많이 배워두면 좋겠다, 그죠?

네, 주연 씨한테 많이 배워야죠.

주연 씨가 카지노 게임 씨보다 한 살이 더 많던가요?

네, 맞아요.

주연 씨보다 최유라 대리님이 저희 부서에서 제일 오래되신 분이라서 저도 배울 게 많은데 시장이 달라서…

최유라 대리님도 예전에 영업지원 하다가 해외영업 했다고...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일도 잘하시고 부서 돌아가는 사정을 제일 잘 아시니… 나중에 카지노 게임 씨도 해외영업까지 하면 좋겠어요. 4팀 팀장자리 공석인데 박 대리님이 내년에 과장되면 팀원이 충원될지도 모르니 틈틈이 영어 공부 하세요, 카지노 게임 씨. 언젠가 써먹을 수 있을 거예요.

네, 안 그래도 영어학원 다니려고 알아보고 있었어요.

연경은 고졸 여직원이 영업지원 업무를 도맡아 하는 이 회사의 내규와 달리 카지노 게임이 4년제 대학 졸업자라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 카지노 게임을 독려했다.


입사 후 며칠 사이 연경은 어디에 명시된 적 없는 부서 내 인사에 대해 박 대리를 통해 알아갔다. 연경의 입사 첫날 거래처와 중국어로 싸우듯 통화한 미령 씨가 실은 귀화환 조선족이었다는 것, 학력 무관인 중국어 통역 임시 알바로 들어와 임원진 눈에 띄어 정규직 직원이 되었다는 사실과 경력으로 적어도 과장, 차장급에 있어야 할 최 대리가 고졸 여직원이라는 이유로 만년 대리로 남아야 하는 회사 규정을 박대리는 연경에게 모른 척 알고만 있으라고 조용히 일러주었다.


연경은 첫날부터 자신을 경계하는 최 대리의 싸늘한 눈빛을 모르지 않았다. 이직이 처음이 아니었던 연경에게 사무실 사람 모두가 연경을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란 것을, 때론 덮어놓고 처음부터 미워하는 사람도 있으리란 것을, 그렇다고 함께 미움의 골을 파기보다는 혹은 눈치 없이 애써 다가가기보다는 적당한 상냥함을 유지한 채 자신의 앞가림을 해 나가자는 게 그간 터득한 그녀만의 깨달음이었다. 연경은 최 대리가 힘겨루기 하듯 한쪽 끝에서 팽팽히 잡아당기는 그 끈을 맞은편에서 똑같은 힘으로 잡아당길 마음이 없었다. 그저 최 대리가 과장이란 직책을 달고 그녀를 보란 듯 앞서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령의 특별 채용처럼 최 대리의 특별 승진을 고대했다. 대리 3년 차로 입사한 연경이 2년 후에 있을 과장 승진 시험에서도 대단치 않은 자신의 학위나 영어 실력 따위로 최 대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되게. 최대리가 이 부서에 일궈놓은 자신만의 실적을 인정받는다면 연경은 기꺼이 뒤에서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여중, 여고, 여대, 여초 회사를 거치면서 연경은 무리에서 튀거나 앞서 나가는 것을 배우는 대신 알아도 모른 척하는 법을 배워왔다. 자기주장을 피력하는 대신 침묵이나 경청이 득이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청출어람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만 해당되는 말이지 직장에서 사수와 부사수 사이에는 가능하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일이란 것도. 또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지 않고, 나도 혼나면서 끙끙대며 이만큼 알아 왔으니 너도 알아서 해라라는 마음이 지배적이라는 것도, 그래서 첫날 신 과장의 업무 인수인계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연경이었다.


연경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창밖을 바라보는 카지노 게임의 옆모습을 보다 고개를 돌려 버스 통로 끝의 차창을 바라보았다. 전세버스는 어느샌가 양재 톨게이트를 벗어나 경기도 이천의 그룹 연수원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주말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분주한 월요일 오전 사무실에서 카지노 게임 씨가 사내 재고 전산망을 보다가 종이 파일과 펜 하나를 들고 주연의 책상 끝으로 다가갔다.

주연 씨, 저 이거 재고 잡는 법 좀 알려 주세요.

연경은 고개를 살짝 들어 모니터 대각선 위로 주연을 살짝 바라보았다.

하던 일을 멈춘 주연은 조금 냉랭한 말투로 마우스를 클릭하며 카지노 게임에게 재고 수량 확인하고 출고 일에 맞춰 재고를 잡는 법을 설명했다.

고마워요, 주연 씨.

카지노 게임은 좀 전보다 한결 편안한 어투로 주연에게 말하고 자리로 되돌아갔다.

주연은 잠시 후 옆자리에 앉은, 사무실 내에서 언니 동생하는 사이인 최 대리에게 조용히 귀엣말을 하기 시작했다.

연경이 방금 흠칫 했던 그것, 그러나 카지노 게임은 미처 생각지 못한 그것일 테지, 연경은 그저 짐작했다. 카지노 게임이 가까운 사이의 사무실 동생이었다면 누군가가 지적하기 전에 카지노 게임에게 사내 메신저로 알려주었을 텐데 연경은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연경은 구내식당으로 가기 위해 눈으로 카지노 게임 씨를 찾고 있는데 샘플실 한쪽에서 최대리가 카지노 게임과 이야기 중이었다. 이야기는 짧게 끝났는지 연경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이 카지노 게임이 소리 없이 뒤에 와 서 있있었다. 카지노 게임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후 시간에도 한두 차례 카지노 게임은 주연의 자리에 와서 일하다가 모르는 걸 물어보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조용한 목소리로 어색하게 선배님 하고 주연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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