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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숙 Feb 20. 2025

카지노 쿠폰군의 사모곡(思母曲) 1편

바람과 풀의 시인/ 김수영


카지노 쿠폰군의 사모곡(思母曲)


카지노 쿠폰군을 만나다

카지노 쿠폰군의 묘소를찾아 길을 나섰다. 입춘이 지난 지 보름이 지났으나 봄의 문턱은커녕 아직도 영하의 날씨를 유지하며 겨울이 시퍼렇게 낫을 갈고 있다.


“내가 쉽게 물러날쏘냐? 어림없다.”


바람이 한차례 불어 패딩에 달려 있는 모자를 벗긴다. 아직도 겨울은 기세등등하다. 그러나 아무리 버티어도 밀려드는 봄의 새 기운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카지노 쿠폰카지노 쿠폰군 묘 입구


카지노 쿠폰군의 무덤은 쓸쓸하다. 화요일 오후,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다. 그저 바람만 사납게 불어 옷깃을 자꾸 여미게 한다.


카지노 쿠폰군은 조선 제10대 국왕, 성종의 적장자이자 중종의 이복형이다. 카지노 쿠폰군은 광해군과 함께 반정으로 폐위된 후 복위되지 못하여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를 받지 못했다.


폐위되었기에 묘호와 시호도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카지노 쿠폰군’보다는 ‘폐주(廢主)’, ‘폐왕(廢王)’, ‘폐조(廢朝)’라고 불린다.


조강지처 신 씨를 사랑했던 카지노 쿠폰군

폭군답지 않게 카지노 쿠폰은 부인 신 씨를 매우 사랑했다.


신 씨는 신수근의 동생으로 성격이 후덕하였다. 카지노 쿠폰군은 신 씨의 후덕함을 황금에 새겨 치하하기도 했다.


중종반정 후 카지노 쿠폰군과 신 씨는 유배될 때 각각 다른 곳으로보내졌는데 신 씨는 카지노 쿠폰군과 함께 가게 해달라고 울며 매달렸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카지노 쿠폰군이 죽을 때 다른 특별한 말은 없었고 그냥 중전이 보고 싶다는 말만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카지노 쿠폰군이 죽고 난 뒤 그의 신주는 신 씨가 직접 모셨다. 당시 카지노 쿠폰군의 무덤은 강화도에 있었지만 신 씨가 노력하여몇 년 뒤 오늘의 위치로 이장했다.


이곳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다. 그런데 카지노 쿠폰군의 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개의 묘가 있다.


카지노 쿠폰모두 5개의 묘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카지노 쿠폰5개 묘를 소개해 놓은 판


임영대군은 세종의 명으로 자식이 없던 태종의 후궁 의정공주를 모시다가 의정공주가 죽자 이 땅에 묘를 조성하고 제사를 지냈다.


임영대군의 외손녀였던 신 씨는 강화도에 묻힌 남편 카지노 쿠폰군의 묘를 외할아버지 땅으로 옮겨달라고 중종에게 청하였다.


이 청이 받아들여져 원래 묻혀 있던 의정공주 묘 위 왼쪽에 카지노 쿠폰군이 묻혔다.


세월이 흘러 1524년(중중 19), 카지노 쿠폰군의 딸 휘순공주와 사위 구문경의 묘가 의정공주 묘 아래 조성되었다.


그리고 신 씨가 1537년(중종 32) 사망하자 카지노 쿠폰군 옆에 나란히 묻혔다. 이렇게 해서 5개의 묘가 조성된 것이다.

왼쪽이 카지노 쿠폰군, 오른쪽이 신 씨 묘

쓸쓸한 그의 인생에 아내라도 함께 하여 그나마 위로가 되었으니 아내가 보고 싶다던 마지막 유언은 이루어진 셈이다.


카지노 쿠폰군은 신 씨와 금슬이 좋았는데 연년생으로 8명의 자식을 었다. 카지노 쿠폰군은 후궁이 20여 명이나 되었지만 그들에게서 얻은 자식은 5남 7녀다.


또한 카지노 쿠폰군이 가장 아꼈던 자식 역시 장녀 휘신공주와 창녕대군 이성이었다.


어머니의 태교가 끼친 영향

조선조에는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19) 등 네 번의 사화가 발생했다. 그중 무오년과 갑자년에 일어난 두 사화의 중심에는 카지노 쿠폰군이 있었다.


예로부터 난폭한 임금이 비록 많았으나, 카지노 쿠폰과 같이 심한 자는 아직 있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을 정도로 카지노 쿠폰은 역사적으로 혹평을 받았다. 자신의 어머니 윤 씨를 죽이는 데 관여했던 관리들을 모두 처벌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까지 묘에서 시체를 꺼내어 부관참시했다.

카지노 쿠폰군일기


그렇다면 폭군의 대명사로 통하는 카지노 쿠폰군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카지노 쿠폰군(燕山君)의 이름은 융(隆)으로 조선조 제9대 성종의 맏아들이었다. 어머니 폐비 윤 씨가 1476년(성종 7) 음력 11월 6일 자정에 낳았다.


폐비 윤 씨는 성종 7년 봄에 카지노 쿠폰을 임신했다. 윤 씨는 전 판봉상시사였던 윤기견(尹起畎)의 딸로 후궁 중에서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다. 당시 왕비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력가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였으나 애석하게도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왕비가 없는 상황에서 숙의 윤 씨가임신하자 성종은 윤 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카지노 쿠폰이 태어나기 석 달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윤 씨만을 총애하지 않았다. 윤 씨의 배가 점점 불러오자 유산을 막는다는 핑계로 엄숙의와 정소용 등 후궁 전을 자주 찾았고, 그 결과 같은 해 겨울에는 정소용도 임신하였다.


윤 씨는 산달이 다가오자 끓어오르는 질투심으로 성격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성종과 다투는 일도 종종 생겼다.


카지노 쿠폰이 태어난 뒤 성종은 두 후궁을 더욱 총애하여 윤 씨를 찾지 않았다. 미움과 화를 참지 못한 윤 씨는 성종과 싸울 때마다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카지노 쿠폰군 영화 포스터


결국 손톱으로 성종의 얼굴을 할퀴어 상처를입히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말았고, 윤 씨는 이 일로 사가로 쫓겨났다. 그때가 카지노 쿠폰의 나이 네 살. 그리고 윤 씨가 사약을 받는 참혹한 일은 일곱 살 때 일어났다.


강희맹 집에서 많은 시간 보내

카지노 쿠폰은 태어난 지 한 해 뒤인 1477년 11월 10일, 병에 걸려 숭례문 밖에 있는 강희맹의 집으로 요양을 떠났다. 당시 왕실에서는 법도 있는 집에 옮겨 치료하면 병이 낫는다는 관례에 따라 후덕한 안 씨 부인이 있는집에 원자를 보낸 것이다.


강희맹은 예조, 형조, 병조 판서를 두루 거친 조선 초기 문신으로 경서와 사기에 통달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가 형조판서로 있었을 때의 일화다. 강희맹의 판결이 공명정대하여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자 나라에서 포상을 내리고자 했다.


“옥사가 없게끔 밝고 좋은 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옥이 비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주상 전하의 크나큰 선정(善政) 때문이옵니다.”

강희맹


강희맹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공을 임금에게 돌렸다. 그리고 강희맹의 인품과 학식도 출중했지만, 그의 아내인 안 씨 부인 또한 명성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


어느 날 어린 카지노 쿠폰이 실꾸러미를 삼켰는데 이것이 목에 걸렸다. 카지노 쿠폰이 질식 직전에 이르자 모두 당황하여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안 씨가 달려와 유모를 시켜 양 귀를 꼭 잡게 하고 손가락을 넣어 실꾸러미를 꺼내었다. 다행히 죽음 직전에 이르렀던 카지노 쿠폰은 곧 숨을 쉬고 살아났다.


봉보부인(奉保夫人-내명부의 품계 중 하나로 왕이나 세자의 유모에게 내려지는 칭호) 안 씨는 원자를 극진히 보살펴 카지노 쿠폰은 곧 건강해졌고 활발하게 놀았다. 그 당시 카지노 쿠폰은 강희맹 집(강희맹의 집터는 현재 서울시 중구 순화동 193-212 일대로 추정) 정원 소나무 밑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이 소나무는 일찍이 정 3품인 당상관 품작을 하사 받은 소나무로 대부송(大夫松)이라 불렸다. 카지노 쿠폰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소나무 밑에서 놀았던 그 기억을 잊지 못해 소나무에 금띠를 두르고 그 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리게 했다.


카지노 쿠폰은 병이 다 나은 뒤에도 봉보부인 안 씨와 큰어머니인 월산대군 박 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또한 폐비 윤 씨가 죽은 후에는 할머니 인수대비에 의해 월산대군 부인에게 맡겨졌다.


인수대비는 카지노 쿠폰이 어머니를 찾을 것이 두려워 카지노 쿠폰을 밖으로 돌려 길렀고 카지노 쿠폰은 친어머니가 죽은 뒤에 대궐로 돌아와 계모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이유야 어떻든 당시 월산대군 박 씨 부인은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카지노 쿠폰을 친아들처럼 정성껏 돌보았다. 카지노 쿠폰군에게 박 씨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성종은 형이 이어받았어야 할 왕위에 자신이 올랐다는 마음의 빚이 있었는지 월산대군에게 집을 지어주고(덕수궁) 평소에도 하사품을 많이 내렸다. 그리고 잔병치레가 잦았던 카지노 쿠폰을 덕수궁에서 지내도록 배려하였다.

덕수궁


후일 카지노 쿠폰이 장성하여 세자를 낳자 카지노 쿠폰 역시 세자를 박 씨에게 맡겼다. 이는 왕실에서 박 씨를 무척 신임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카지노 쿠폰은 왕위에 오른 후 박 씨에게 종종 쌀과 노비를 하사했다. 또 박 씨가 큰 병에 들자 승평부부인의 이름 앞에 대(大) 자를 더 붙여 승평부대부인이라는 시호를 내릴 것을 명했다. 자신과 세자를 정성껏 길러준 큰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성종과 인수대비의 배려로 궐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던 카지노 쿠폰은 어머니가 폐위된 사실도, 사약을 받고 참혹하게 죽은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다.


어머니 정을 그리워했던 어린 왕자

카지노 쿠폰이 궁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의 흔적은 이미 찾을 길이 없었고, 궁궐에 속한 사람들도 혹 이 사실을 카지노 쿠폰이 알게 될까 철저히 함구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카지노 쿠폰은 정현왕후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 정현왕후는사심 없이 어린 카지노 쿠폰을 사랑했으나, 막상 진성대군이 태어나자 카지노 쿠폰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친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살았던 카지노 쿠폰은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어느 날 카지노 쿠폰과 진성대군이 함께 놀다가 둘이 바닥에 넘어진 적이 있었다. 정현왕후는 깜짝 놀라 진성대군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어머니가 나이 많은 카지노 쿠폰보다 나이 어린 동생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나 카지노 쿠폰은 알 수 없는 섭섭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평소 정현왕후에게서는 따뜻한 손길이나 눈길을 별로 받아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눈빛부터가 분명히 달랐다. 진성대군을 바라보는 정현왕후의 눈길은 한없이 온화하고 봄볕처럼 따스함이 감돌았다.


그러나 카지노 쿠폰을 바라보는 정현왕후의 눈길에서는 그다지 따스함을 느낄 수 없었다. 한창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던 나이였지만 정현왕후에게서는 어머니다운 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본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할머니 인수대비 역시 진성대군에게는 다정다감했으나 카지노 쿠폰을 대하는 눈은 섬뜩하리만치 싸늘했다. 아무리 주위에서 쉬쉬하며 함구하더라도 그런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카지노 쿠폰이 아니었다.


어느 날 궐 밖 훈련원에서 돌아온 아들 융을 보고 성종이 물었다.


“오늘 훈련원에 가서 무엇을 구경하고 왔느냐? 혹 기이한 일이 있었더냐?”

“구경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무엇이냐? 개의치 말고 말해보거라.”

“남문 밖에서 어린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어미 소가 소리를 하면 송아지도 문득 소리를 내어 응하여 어미와 새끼가 함께 정답게 걸어가는 것이 부러워 보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성종은 혹시 카지노 쿠폰이 제 어미가 죽은 사실을 아는 것 같아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카지노 쿠폰은 알 수 없는 소외감으로 늘 고독했으며 어머니의 사랑이 그립고 또 그리웠다. 그러한 감정이 카지노 쿠폰에게 미친 영향은 의외로 크게 작용했다.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카지노 쿠폰은 왕위에 오르자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남김없이 드러내어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하는 한편 장녹수와 같은 요부에게는 오히려 휘둘리는 이중성을 보였다.


한편 눈에 불을 켜고 중전 윤 씨를 쫓아내는 데 앞장섰던 시어머니 인수대비는 자신이 살아생전 대궐 안에서 그 누구든지 카지노 쿠폰에게 폐비의 일을 말하는 자가 있다면 목을 베겠다고 엄명을 내렸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을 오직 카지노 쿠폰만 알지 못하고 자라났다.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훗날 화를 부를 것이 자명한 일이라며 카지노 쿠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는 진성대군이 태어나기 전이었기에 왕비 소생의 왕자는 오직 카지노 쿠폰뿐이었다. 성종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카지노 쿠폰을 세자로 책봉했다.


성종이 아끼던 사슴의 배를 발로 걷어차다

그런데 온화했던 카지노 쿠폰은 자라나면서 성격이 점점 변했다.


어머니 윤 씨가 카지노 쿠폰을 임신했을 때 두 후궁을 증오하고 또 증오했으니 태교에 좋은 영향을 끼쳤을 리 없었다.


어머니의 질투심과 후궁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던 마음은 자연스럽게 카지노 쿠폰에게 이어져 후일, 카지노 쿠폰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어린 카지노 쿠폰이 세자로 책봉될 때까지만 해도 카지노 쿠폰은 온화한 성격이었다.


1483년(성종 14) 2월 6일, 카지노 쿠폰의 나이 8살이 되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성종이 카지노 쿠폰을 세자로 책봉한 뒤 내린 하교를 보면 ‘성품이 온화하고 품위가 있어 만백성의 칭송을 받고 있다’라는 글귀가 보인다.


승조承祧· 주창主鬯하여 나라의 근본을 무강無彊하게 튼튼히 하고, 세자를 세워 명분을 바로 하여 국운을 흔들리지 않게 이어나가야 한다.


원자元子 융은 그 지위地位가 총애받는 적자嫡子이고 성품이 온화하며 품위가 있어 만백성의 칭송을 받고 있으니, 이미 신인神人이 소망에 부응하여, 종사宗社가 이어지고 중외中外의 마음이 믿게 될 것이다.


기량이 이미 이루어져 능히 두어 자의 글을 깨치었으며, 나이가 비록 어리나 삼조三朝의 예禮를 폐하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1483(계묘癸卯, 성종 14)년 2월 6일


세자로 책봉된 이후 카지노 쿠폰은 성격이 점점 음험하고 속을 내비치지 않게 되었으며, 또한 괴팍하고 변덕스럽게 변했다. 학문도 싫어했고 학자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종이 어느 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세자 융을 불렀다.


마침 그때 대궐에서 기르던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융의 옷과 손등을 핥았다. 그 사슴은 매우 영리하여 사람을 잘 따르고 말도 잘 들어서 성종이 몹시 아끼던 동물이었다.


아기 사슴


세자 융은 사슴이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하여 사슴의 배를 발길로 걷어찼다. 사슴은 대궐 뜰 위로 굴러 떨어졌다.


이 광경을 본 성종과 신하들이 몹시 놀랐다. 성종은 융의 포악한 행동에 노하여 세자를 꾸짖었다.


“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라 하나 세자를 보고 기뻐 반기거늘 어찌하여 발길로 그리 심하게 대한단 말이냐? 힘없는 미물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는데 만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제왕으로 자라날 수 있겠느냐? 앞으로는 좀 더 자애로운 마음가짐을 갖도록 하라.”


얼결에 달려드는 사슴을 발길로 차기는 했으나 그것이 과격한 행동이었음을 카지노 쿠폰도 잘 알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자신을 나무라는 부왕의 책망이 곱게 들리지않았다.


후일 성종이 승하하고 왕으로 등극하자 카지노 쿠폰은 즉시 그때의 사슴을 찾아 활로 쏘아 죽이고 고기를 먹으며 즐겼다.


부왕이 아끼던 사슴을 가차 없이 죽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안양군(정 귀인이 나은 성종의 셋째 아들)이 카지노 쿠폰에게 말했다.


“부모가 사랑하는 것이면 그 자손들도 사랑하여야 될 것이거늘 선왕께서 가장 사랑하던 동물을 무슨 까닭에 쏘아 죽였으며, 아직도 선왕께서 빈소에 계시거늘 어찌 살생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카지노 쿠폰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여전히 사냥을 일삼았다. 이후로도 종묘사직을 염려하던 안양군은 몇 번이나 카지노 쿠폰에게 부디 성군이 되시라고 간청하였다.


야사에서 전하는 카지노 쿠폰군의 성격

야사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한다.


세자 시절 융에게는 허침(許琛)과 조지서(趙之瑞)라는 두 명의 스승이 있었다.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었으나 조지서는 엄하였다.


학문을 싫어했던 융은 툭하면 수업을 빼먹었다. 그럴 때마다 허침은 웃으면서 타일렀고 조지서는 융을 책망하였다.


“장차 이 나라의 임금이 되실 분이 글 읽기를 싫어하신다면 나라의 장래가 어찌 되겠습니까? 부디 글 읽기에 전념하소서.”


만나기만 하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조지서가 융은 몹시 싫었다.


어느 날 융은 보란 듯이 ‘대성인(大聖人)에 허침이요, 대소인(大小人)에 조지서’라는 낙서를 써놓은 적도 있었다.


조지서가 못마땅했던 융은 후일 갑자사화를 빌미로 조지서를 극형에 처한 후에 그의 시체를 강물에 띄워버리는 한편 가산까지 몰수했다.


의금부 낭청 박기朴基가 조지서를 잡아 왔다. 명하여 당직청에서 국문하게 하였는데, 지서가 비중肥重한 몸으로 결박을 당하니 숨이 막혀 형장 30대를 맞고 그만 죽어버렸다. 그러자 전교하기를,


“당직청에서 곧 머리를 베어, 철물전 앞에 효수梟首하고, 시체는 군기시軍器寺(병기ㆍ기치ㆍ융장ㆍ집물 따위의 제조를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아) 앞에 두라.”


하였으니, 죄명은 ‘제 스스로 높은 체하고 군상君上을 능멸한다.’는 것으로 찌를 써서 달아매고, 백관들로 하여금 차례로 서서 보게 하였는데, 그때 밤이 4경이었다.

<카지노 쿠폰군일기, 1504(갑자甲子, 카지노 쿠폰군 10)년 윤 4월 16일


이처럼 카지노 쿠폰은 한번 마음에 담으면 끝까지 복수를 하는 성격이었다.


성격이 온순하고 부드러워 별로 책망하지 않았던 허침은 카지노 쿠폰이 등극한 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승진하는 순탄한 인생을 보냈다. (2편에서 계속)


김수영 문학관

카지노 쿠폰군 묘 근처에는 김수영 문학관이 있다.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김수영 문학관 입구


나는 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몇 시에는 본능적으로 눈길이 간다. 그중 김수영 작가의 시 ‘풀’은 좋아해서 몇 번 읽으니 저절로 외워졌다.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2연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시는 풀과 바람이 대립 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풀’은 가난하고 억눌려 사는 민중의 상징으로, ‘바람’은 민중을 억누르는 지배 세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국 문학의 대표적 자유 시인, 김수영이 시작(詩作) 생활을 하였던 도봉구에는 그의 본가와 묘, 시비가 있다. 그리고 김수영 문학관 근처에는 카지노 쿠폰군과 정의공주 묘, 북한산 둘레길이 있다.


김수영 문학관은 2013년 11월 27일 개관했다. 시인 김수영을 기리기 위해 도봉구에서 설립한 문학관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김수영 시인의 캐리커처가 보인다. 전시관은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제1전시실이다.


김수영 작가 캐리커처


이곳은 김수영의 삶의 궤적을 연대순으로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다. 김수영 연보 및 6·25 전쟁과 4·19 혁명, 5·16 쿠데타 등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며 그가 온몸으로 표현한 시와 산문의 육필 원고가 전시되어 있다.


1층 전경


영상실에서는 김수영의 생애를 그 당시 사회상과 더불어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으며, 시작(詩作) 코너에는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 자주 쓰이던 단어들을 집자(集字)하여 시어(詩語) 막대를 만들어 관람객들이 이 단어들로 시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시인의 친필 원고


감상 메모 코너는 김수영을 만나고 난 후의 감상을 적어 벽에 걸어놓을 수 있다.

1층 한쪽에는 김수영 작가에 관한 논문이 4단 책장에 가득했다.


김수영 작가를 연구한 논문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김수영 시인을 연구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다른 작가를 공부하라는 ‘수영 금지’라는 말이 나돈다고 한다. 우리가 문학을 공부할 때도 시를 전공하는 학우들은 대부분 김수영 시인과 백석시인을 좋아했다.


수장고에는 전시실에 전시된 것 외의 시와 산문 원고, 저서, 번역서 등과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2층에는 제2 전시실이 있는데 김수영의 일상 유물이 있다.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 작업하던 탁자 등 인간 김수영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2층 전경


검색대에서는 김수영의 시, 산문 원고뿐 아니라 신문 스크랩 자료 등을 검색할 수 있다. 독서대에서는 김수영의 시집, 산문집과 함께 김수영 관련 서적들과 논문을 열람할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의 책들


김수영 시인이 평소 앉아서 글을 썼던 식탁


3층에는 김수영 문학도서관이 있으며, 4층에는 대강당이 있어 문학관에서 주최하는 강연이 열린다. 5층은 옥외 쉼터 및 휴게 공간이다.


김수영 작가 시비를 찾아

김수영 작가의 본가가 도봉동에 있었으며, 집필실 역시 도봉동에 있어 김수영의 많은 시 작품이 도봉구에서 탄생하였다.


시비(詩碑)를 찍으러 도봉산으로 갔다. 평일인데도 도봉산에는 등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차장이 없어서 차를 아래쪽에 두고 걸어서 올라갔다. 입구에서 약 1km, 산행임을 감안해 왕복 40분으로 잡고 천천히 걸었다.


공원 입구


계곡에서 물이 내리는 소리가 졸졸 들려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물은 얼어 있고 그 위에 눈까지 덮여 있었다. 물은 얼음 아래에서 흐르고 있었다.


“나 여기에서 흐르고 있어요, 나를 잊지 마세요.”


물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살얼음이 얼은 계곡


오르막길이 나왔으나 길이 잘 닦여져 힘들지 않았다. 군데군데 볼 것이 있어 사진을 찍으며 올라갔다. 거의 도착할 즈음 시비가 보여서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보았더니 이병주 시인의 시비였다.


이병주 작가 시비


이병주 작가와 술을 마시고 말다툼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김수영 시인, 시비도 근처에 있는 것을 보면 꽤 친숙했었나 보다. 그러나 하필 말다툼 뒷날 지인의 죽음을 알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황망하고 미안했을지, 아마도 이병주 작가의 마음고생은 오래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다시 조금 걸어가니 김수영 시인의 시비가 보였다.


등산로에서 50m 정도 떨어져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일부러 들어가서 보지 않으면 시비의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김수영 시인을 기리는 사람이 찾기에는 오히려 한적해서 좋았다.


김수영 시인 시비


시비에는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시 ‘풀’ 2연이 적혀 있었다. 글씨는 시인의 친필을 확대하여 제작했다고 하는데 글씨는 세월의 흔적으로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시비 전경과 뒷면


이 시비는 김수영 시인 사후, 김동리, 박목월 등 한국의 대표적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먼저 간 시인을 추모하고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망 1주기를 맞아 세웠다. 문인들과 독자들로 구성된 290여 명의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 만든 성금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삶과 현실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김수영 작가의 생애

김수영(金洙暎)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에서 아버지 김태욱과 어머니 안형순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병약했던 그는 선린 상고, 일본 도쿄 조후쿠[城北] 고등예비학교(중퇴), 연희대 영문과(중퇴) 등에서 수학하였다. 선린 상업학교 시절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원문 시작품들을 외워 읽을 만큼 영어 성적이 우수했다.


전시관에서 찍은 시인의 사진, 상태가 좋지 않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지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이내 학업을 포기하고 연극을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해방을 맞기까지 그는 연극에 몰입했는데 그것은 현실 도피에 가까운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말에 학병 징집을 피해 만주의 길림성으로 이주했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


1947년 예술부락 제2집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김수영 시인의 시에서는 한국 현대시 사상 처음으로 시적인 말과 일상적인 말의 차별이 사라졌는데 이는 시와 삶을 일치하려는 그의 노력이 낳은 결실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영어 강사였던 김수영은 의용군에 징집되었다. 그는 두 달 만에 훈련소에서 탈출하여 서울로 돌아왔으나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환경이었다.


나는 브라우닝 대위를 통해 임 간호사를 알게 되었고, 임 간호원이라는 30이 훨씬 넘은 인텔리 여성을 통하여 사회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임 간호원은 아침마다 흰 수건에 계란을 싸가지고 오든지, 김밥 같은 것을 싸 가지고 와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넌지시 나의 호주머니에 넣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연애를 하여 보려고 해도 연애를 죽어도 하지 못하던 내가 이 포로수용소 지옥 같은 곳에서 진정하고 영원한 사랑을 얻게 될 줄이야.


포로 생활에 있어서 거제리 제14야전병원은 나의 고향 같은 것이었다. 거제도에 와서 보니 도무지 살 것 같지 않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서러워서 뼈를 어이는 설움이란 이러한 것일까? 아무것도 의지할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수록 나는 진심을 다하여 성서를 읽었다. 성서의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동시에, 임 간호원의 말이었고, 브라우닝 대위의 말이었고, 거제리를 탈출할 때에 구제하지 못하고 남겨두고 온 젊은 동지의 말이었다. (내가 겪은 포로생활 중에서)


그는 1952년 겨울, 석방되었다.


이후 교육 및 언론 활동에 종사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 계열의 시를 썼으나 4·19 혁명 이후에는 현실 비판과 저항적인 참여 시를 주로 썼다.


김수영 시인의 작품집


1957년 제1회 시인협회상을 받았다.


1959년 <달나라의 장난을 출판하였다.


1960년 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 일어났다. 통제와 억압의 시대, 자유를 갈구하는 민중의 목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던 그때. 시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다.


4·19 혁명 이후 김수영의 시는 현실에 대한 자기주장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자유와 사랑이었다.


4·19 혁명을 통해 자유의 참뜻을 현실적으로 체득했던 그는 4·19 혁명이 군사정권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보고 깊은 회의에 빠져 자기 풍자와 현실 비판의 시들을 절규처럼 썼다.


김수영의 산문은 그의 시에 못지않은 명문으로 꼽힌다.


특히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는 독자에게 시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일깨우는 시론이자 인식의 틀을 깨는 혁신적인 시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칠고 힘찬 어조 속에 가득 찬 자기반성과 폭로, 사회현실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통해 현실 참여와 사회 정의를 부르짖었던 김수영, 그러나 그의 시는 삶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있다.


김수영 시인은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통역 일과 잡지사, 신문사를 전전하며 시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1968년 6월 15일 밤, 술자리가 끝나고 귀가하던 길에 서울 마포구 구수동에서 인도로 뛰어든 좌석버스에 치여 병원으로 옮겨진 뒤 다음 날 새벽에 4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민음사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여 1981년 이후 매년 수여하고 있다.


평론가 김현은 그를 “1930년대 이후 서정주·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 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라고 평가했다.


1만 5천 평 한옥 카페, 선운각

김수영 작가를 찾아 시비와 문학관, 그리고 카지노 쿠폰군 묘를 방문한 다음 그곳에서 가까운 카페 선운각을 찾으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해 본다.


차로 이동하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고 카지노 쿠폰군 묘에서 130번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지나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도보로 북한산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선운각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계속 올라가면 육영수 여사가 다녔던 도선사가 나온다.


버스 종점에서부터 올라오는 길 역시 북한산을 오르는 등산로라 오른쪽으로 계곡이 흐르고 사시사철 꽃과 나무로 아름답다.


선운각 입구


선운각은 궁궐을 제외하고는 서울에서 가장 큰 민간 한옥으로 고 현대 정주영 회장이 지었다.


이곳의 부지는 약 1만 5,000평이라고 한다. 원래 이곳은 정주영 회장 별장으로 쓰이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요정으로 사용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후처가 1967년에 고급 요정으로 운영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주 연회를 가졌고, 외국 원수와의 만찬 장소로도 사용됐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시해 이후 우여곡절 끝에 전통 한정식집으로 바뀌었다가 2000년 들어 경영악화로 문을 닫았다.


이후 한옥 웨딩과 방송 촬영지로 잠깐씩 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돌담길이 끝나면 카페 입구다


선운각으로 들어가려면 돌담길을 올라가야 하는데 겨울에 눈이 내리면 매우 미끄러워 조심해야 한다.


돌담길은 분위기가 그윽하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주인공 고애신이 미국 공사관 담을 넘다 들켜 유진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돌담길이 끝나면 선운각 출입구가 있다. 들어가면 카페를 둘러보기 전에 먼저 주문부터 해야 한다. 처음에 모르고 한옥 쪽으로 가다가 잡힌(?) 기억이 있다.


커피 주문하는 곳


“저기요, 차 먼저 주문하고 가실게요.”


가을철 단풍이 한창일 때 가면 주문하는 데만 시간이 꽤 걸려서 슬쩍 이탈해도 잡히지(?) 않는다. 내부를 둘러보고 차를 마시고 싶으면 먼저 주문한 뒤 나중에 먹겠다고 말하면 된다.


내부에서 먼저 가야 할 곳은 오른쪽이다. 오른쪽은 한옥으로 방이 많고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다. 차를 마당에서 마실 수 있도록 곳곳에 탁자가 배치되어 있다.

가운데 사진의 길로 내려가면 한옥이 나온다.


넓은 마당은 야외 웨딩 장소로 사용한다. 그래서 결혼식이 있는 날은 피하는 것이 좋다.

마당으로 내려가 다리를 건너면 또 다른 한옥이 나온다. 그 한옥은 들어갈 수 없지만 다리 위는 포토존으로 줄을 서기도 한다.


한옥 앞마당


한옥을 둘러본 후 다시 주문 데스크를 지나 왼쪽 옥상으로 올라간다. 봄가을에는 벚꽃과 단풍이 황홀해서 옥상에도 사람들이 몰려있다.


멀리 북한산 백운대가 보이는데 단풍과 함께 사진을 찍으면 인생 사진을 건질 수 있다.


뒷마당으로 나가는 길


옥상에서 내려오면 뒷마당으로 간다. 뒷마당 역시 한옥의 운치를 여기저기서 누릴 수 있다. 장독대와 멋진 정자도 보이는데 그곳은 일찍 가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가을에 옥상에서 찍은 사진(가운데)


음료는 평균 8,000원으로 싸지 않다. 그러나 분위기값을 치른 셈 치면 그리 비싼 금액은 아니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 후 천천히 내려오면서 손병희가 민족 지도자를 길러낸 봉황각도 들러보면 좋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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