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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숙 Feb 13. 2025

강호를 떠돌던 문협(文夾) 김카지노 가입 쿠폰(2편)

이문열 장편소설 시인

김카지노 가입 쿠폰 문학관


김카지노 가입 쿠폰 문학관을 향해 들어가는 계곡으로 들어섰다. 길 양쪽으로 경치가 좋은 곳에는 꽤 근사한 펜션과 민박촌이 있었다.


계곡을 따라 많은 집이 보였는데 다 운영이 될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있다면 며칠 묵고 싶은 정도로 주변 경치가 마음에 들었다.


카지노 가입 쿠폰김카지노 가입 쿠폰 다리


구불구불한 계곡을 한참 올라 가자 김카지노 가입 쿠폰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다리를 장식하고 있는 김카지노 가입 쿠폰도 있었다. 이름이 김카지노 가입 쿠폰 계곡이어서인지 모든 것이 김카지노 가입 쿠폰을 연상케 했다.


김카지노 가입 쿠폰문학관 이정표가 보여 왼쪽 다리를 건너자 꽤 넓은 주차장이 나왔다. 시간은 이미 530분을 지나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카지노 가입 쿠폰김카지노 가입 쿠폰 문학관 전경


문학관은 6시에 문을 닫기에 서둘러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 손님은 역시 우리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귀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람이 없으니 사진 찍기도 좋았고 맘대로 떠들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었다.


1전시실 방랑시인 김카지노 가입 쿠폰

김카지노 가입 쿠폰 정체성과 일생, 방랑의 시작이자 종착지인 영월 김카지노 가입 쿠폰 유적지를 발견한 고 박영국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동기문<김립시집 등의 서책과 기증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김카지노 가입 쿠폰 방랑 여정이 담긴 시를 활용한 영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카지노 가입 쿠폰전시장 전경


2전시실 민중 시인 김카지노 가입 쿠폰

설화 속 주인공으로 더 친숙한 김카지노 가입 쿠폰 일화와 민중의 편에서 시를 썼던 김카지노 가입 쿠폰의 문학적 가치를 볼 수 있다.


서책 전시와 더불어 애니메이션 영상 보기, 김카지노 가입 쿠폰 시 창작 국악 듣기, 시 문구 직접 써보기 등 다양한 체험을 통해 김카지노 가입 쿠폰의 가치를 감각적으로 느껴 볼 수 있다.

전시관 전경


3전시실 김카지노 가입 쿠폰 프로젝트

김카지노 가입 쿠폰은 현재까지 재해석, 재창조되어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인물이다.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성은 김카지노 가입 쿠폰이라는 콘텐츠로 생명력을 불어넣은 작가 정연택 작품과 김카지노 가입 쿠폰이 보았을 영월의 시공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영상, ‘영월 전경을 통해 김카지노 가입 쿠폰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다.


김카지노 가입 쿠폰에 관한 책들


문학관 로비에는 포토존이 만들어져 있고 계단에는 <이철수 판화가의 김카지노 가입 쿠폰 재해석 작품이 연출되어 있다.


포토존에서


이처럼 문학관만 천천히 둘러보아도 김카지노 가입 쿠폰의 일생을 알 수 있도록 잘 꾸며져 있다.


매점이 있어서 들렀는데 모든 물건에 김카지노 가입 쿠폰이 있었다. 내가 김카지노 가입 쿠폰 키링을 사겠다고 하자 딸이 말렸다.


엄마, 집에 가면꺼내지도 않을 거잖아.”


그러면서 자기는 에코백을 들고 왔다.


너야말로 에코백이 도대체 몇 갠데?”

난 이거 헬스 갈 때 들고 다니려고.”

김카지노 가입 쿠폰 키링


결국 웃으며 25,000원을 결제했다. 키링이 만 원이니 딸이 더 비싼 것을 들고 온 셈이다. 힘들게 온 곳이어서인지기념품이라도 하나 사지 않으면 너무 허탈할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냉장고에 붙일 마그넷이 없어서 아쉬웠다.


밖으로 나오자 김카지노 가입 쿠폰의 행적을 곳곳에 동상으로 재현한 재미있는 광경이 연출되어 있었다. 사진을 찍고 김카지노 가입 쿠폰 유적지로 향했다.


김카지노 가입 쿠폰 유적지 이정표


김카지노 가입 쿠폰에 대한 평가


황오(黃五)<김사립 전(金莎笠傳)에는김카지노 가입 쿠폰이 술을 좋아하고, 광인(狂人)처럼 해학을 즐기고, 시를 잘 짓고, 술에 취하면 가끔 통곡하며, 과거를 보지 않은 기인이라고 적고 있다.


신석우(申錫愚)<기김대립사(記金籉笠事)도 비슷한 평을 하고 있다.


김카지노 가입 쿠폰은 자신이 거지꼴임에도 불구하고 옷을 벗어 더 어려운 사람에게 입힌다고 했다.그리고 더럽고 남루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고 찾아오면 음식을 대접하고 머물러 묵게 했으며, 서당 학생들은 그의 시를 베끼면서 공부했다.


<김카지노 가입 쿠폰 설화는 그의 시와 함께 이응수의 <김립시집(金笠詩集, 1939)에 실린 이후 십여 종이 더 나왔으며, 논문과 저서 또한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설화에는 시를 중심에 두고, 시를 짓게 된 사연을 담았다. 운문과 산문의 결합이라는 것이 <김카지노 가입 쿠폰설화의 또 다른 특징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 이면에는 풍자와 해학이 넘쳐 읽는 이를 웃게 만든다.


김카지노 가입 쿠폰 동상


김카지노 가입 쿠폰은 한시를 잘 지어서 위기를 모면하고, 어려운 민중을 도와주고, 못된 사람을 혼내주기도 한다.


한시로 예언도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재주도 있었다. 때문에 그는 그냥 시인이 아니라 문협(文夾)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김카지노 가입 쿠폰의 생애와 설화는 소설은 물론 대중가요로도 만들어졌고 각종 만화와 웹툰으로 발간되어 사랑받고 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인물 속에도 김카지노 가입 쿠폰의 이름이 들어있다.


김카지노 가입 쿠폰 묘


김카지노 가입 쿠폰의 무덤이 있는 강원도 영월군은 하동면을 김카지노 가입 쿠폰면으로 고치고 김카지노 가입 쿠폰 축제, 김카지노 가입 쿠폰 주막, 김카지노 가입 쿠폰 주() 등을 만들어 판매한다.


영월에서는 매년 모든 참가자가 카지노 가입 쿠폰쓰고 죽장들고 두루마기를 입은 채 김카지노 가입 쿠폰처럼 방랑길을 걷는 걷기 행사도 치르고 있.


김카지노 가입 쿠폰 밥집


약간 옆길로 새어 경기도 남양주시에 김카지노 가입 쿠폰 밥집도 있는데 워낙 인기가 많은 곳이라 소개해 본다. 네이버에 김카지노 가입 쿠폰을 입력하면 가장 먼저 뜨는 것이 김카지노 가입 쿠폰밥집이다.


이 집은 메뉴가 하나밖에 없는데 그 이름이 카지노 가입 쿠폰정식이다. ‘카지노 가입 쿠폰정식은 보리밥에 30가지 반찬과 수육, 호박죽이 나온다. 내가 갔을 때는 1인분에 19,000원이었는데그새 올라 지금은 22,000원이.


카지노 가입 쿠폰 정식


특히 나물 반찬이 많아 어른들이 좋아하는 곳이라 부모님을 모시고 가면 만족할 밥집이다.


참고로 작년에 지인들과 함께 갔는데 출발할 때 티맵에 김카지노 가입 쿠폰밥집을 입력하니 같은 장소를 향해 가는 차가 42대가 있었다.


몇 번 가본 결과 팁이 있다면 도착한 뒤 운전하는 사람이 주차를 하기 전에 먼저 내려 줄을 서면 좋다. 예약도 되지 않고 사람이 많은 탓에 보통 대기가 1시간 이상이다. 한 팀에 한 사람만 줄을 서면 된다.


이문열 소설<시인과 정비석<소설 김카지노 가입 쿠폰


김카지노 가입 쿠폰에 관한 책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그중 가장 손꼽을 수 있는 책은 정비석 작가가 쓴 <소설 김카지노 가입 쿠폰이다. 6권으로 쓴 정비석의 <소설 김카지노 가입 쿠폰은 이미 단종된 지 오래여서 책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문열 소설<시인을 소개한다.


정비석 소설


<시인 줄거리

조선 후기의 시인 김병연의 생애를 소재로 쓴 이문열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그의 소설 중 가장 팔리지 않은 소설이었으나 20만 부를 기록했다.


<시인은 국내 평단은 물론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이문열의실력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 작품이다.


<시인 책


<시인은 가벼운 일화 중심으로 언급되던 김병연의 면모를 재해석하여 특유의 필력으로 풀어냈다. 또 작가 자신의 문학세계와도 관련 깊은 화두를 잘 녹여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병연은 할아버지의 잘못된 행동으로 집안은 급격히 몰락했고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었다. 아버지마저 화병으로 사망하자 어머니는 삼 형제를 데리고 살 곳을 찾아야 했다.


형은 일찌감치 시정잡배가 되었다. 김병연은 영월에서 시행된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하지만 조부를 규탄한 시임을 알고 방랑길에 나선다.


김병인은 금강산과 구월산을 자주 찾았다.

그동안 출간된 <시인 책


김병연은 끊임없이 걸어 사람들을 만났다. 추악한 부정부패를 만나면 붓을 휘둘러 그들을 조롱했다. 그렇게 방황하는 길을 가면서 그는 진정한 시인이 되었다.


김병연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고통은 이문열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차별받고 소외되고 밀려나는 일이 비단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별이 없는 세상, 그 사는 땅에 따라 차별받지 아니하고, 그 어버이의 높고 낮음에 따라 차별받지 아니하고, 그 하는 바 생업에 따라 차별받지 아니하고, 그 가진 바 많고 적음에 따라 차별받지 아니하는 세상을 우리는 꿈꾸었던 것이네.(본문 중에서)


김병연은 민중의 저항을 노래로 표현했고 세도가들의 가렴주구를 풍자해 보는 이를 시원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자연을 보고 아름다운 시를 짓는 심미안을 가진 진정한 시인이었다.


아들이 그를 찾아 집으로 모셔가려고 했으나 끝내 돌아가지 않고 객사했다.


이문열 작가 소개


이문열(李文烈) 작가는 1948년 6월 24일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이문열 작가


1960년대에 김승옥 작가, 1970년대에 황석영 작가가 있었다면 1980년대의 대표 작가는 이문열이었다.


그러나 그는 높은 인기만큼이나 많은 논란을 일으켰으며우파 논객으로 주목받고 있다.


내가 한창 문학에 열정을 두고 공부할 즈음 이문열의 소설은 가히 태양과 같이 높고 빛났다.


<사람의 아들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종종 토론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명성이 스러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사람의 아들 책


우리는 장난 삼아 작가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쓴 이후 날개가 없음을 증명하듯 추락했다고 말하고는 했다.


이문열 작가의 추락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왜였는지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물론 지금도 이문열 작가의 내공은 대단하고그의 작품이 80년대를 호령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문열 작가는 가족을 두고 홀로 월북한 아버지(이원철, 李元喆)로 인해 평생을 힘들게 살았다.


소설 <시인에서짐작되듯이 얼핏 그의 삶은 김카지노 가입 쿠폰을 연상케 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 때문에 많은 마음의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2년에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제2회 브나로드 운동에 계몽대원으로 참여한 의식 있는 인텔리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8.15 광복 직후에는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책임자를 맡았던 그는 인천 상륙 작전 이후 퇴각하던 조선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어머니 조남현은 이문열을 임신하고 있을 때부터 삐라를 돌리는 등 남편을 지원했는데, 어느 날 잡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아버지는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뱃속에서도 싸워온 열렬한 투사다’라고 하면서 그에게 ‘열(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머니도 좌익 활동으로 해방 공간에서 징역(懲役)을 사셨어요. 제 본명이 이열(李烈)입니다. 어머니가 저를 가지셨을 때 아버지의 지령에 따라 부른 배에다 삐라를 감추고 효창공원 행사장에 가서 뿌리다가 검거되셨어요. 5개월 살고 나오셨는데, 아버지가 너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옥살이하며 싸웠으니까, 나중에 커서 열렬한 투사로 자라라라며 지어준 이름입니다.”


1950년 아버지가 월북하자, 이문열은 어머니를 따라 어머니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면(현 영천시 금호읍) 석섬리에 잠시 머물렀다.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곳은 2013년 3월 18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영양 석간고택(英陽 石澗古宅)이다.


이문열은 연좌제가 있던 시절이라 이사를 자주 다니는 바람에 정규교육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했다. 중, 고, 대학교를 모두 중퇴했으며, 정규교육을 이수한 기간은 8년뿐이다.


아버지가 월북한 뒤, 나는 끊임없이 우와 좌를 비교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장 보러 간 어머니가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돌아올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경찰이 미행 붙었다는 걸 알아차린 거죠. 숱하게 이사도 다녔습니다. 우리 사정을 모르는 낯선 동네에서 한 2년 자유롭게 지내다 보면 경찰이 찾아왔죠. 1968년 주민등록법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잠깐의 자유를 누리려 2~3년씩 동네를 옮겨가며 지냈습니다. 어머니는 생이별한 남편을 마음 놓고 그리워하지도 못했습니다. ‘영감 다시 내려오면 우야노라며 맨날 걱정하셨죠. 식구들 전체가 간첩으로 몰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문열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검정고시로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다시 검정고시를 치러 196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졸업해도 그는 연좌제 때문에 교사가 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대학마저 중퇴했다.


그는 밀양 석골사에 틀어박혀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나 세 번을 연이어 실패하고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그즈음<사람의 아들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지만 예선도 통과하지 못했다.


그는 실망하여 군대로 도피했다. 제대 후 대구 고시학원 강사를 거쳐 77년 대구매일신문에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당선작 없는 가작에 뽑히면서 문단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그는 대구매일신문 편집기자로 근무했다.


1979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하곡(塞下曲)이 당선되고 같은 해 중편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그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문열의 소설은 탄탄한 구성과 문장의 탁월함으로 인기를 끌었다.


<변경, <젊은 날의 초상


작품으로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80) <젊은 날의 초상(1981) <황제를 위하여(1982) <레테의 연가(83) <영웅시대(1987)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8) <시인(1991) <삼국지(1988) <수호지(1991) <변경(邊境)(1998) <초한지(2008) 등이 있다.


이중 삼국지는 현재까지 약 1,800만 부가 판매되었다.


<삼국지 세트 책


82년 <금시조로 동인문학상을, 83년 <황제를 위하여로 대한민국문학상을, 84년 <영웅시대로 중앙문화대상을 수상하였으며 87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이상문학상, 92년 <시인과 도둑으로 현대문학상, 98년 <전야,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으로 21세기 문학상, 99년 <변경으로 호암예술상, 2012년 <리투아니아 여인으로 동리문학상, 2015년 은관 문화 훈장을 수상했다.


아마 문학상으로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은 다 받은 것 아닌가 싶다. 그는 1988년 경기도 이천에 ‘부악문원’을 열어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인기만큼이나 많았던 논란


마광수와의 논쟁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문열은 신문 기고와 강연, 작품활동 등을 통해 보수주의 입장을 대변하고 진보주의 진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한편 마광수는 이문열의 성공을 비판했다. 그는 1990년 1월 언론에서 “이문열의 상업적 성공의 근본적 원인은 대한민국 독자들의 교양주의 선호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이에 이문열은 “마광수의 작품은 구역질을 동반하고 보잘것없다”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페미니스트와의 논쟁

1996년 잡지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첫 연재 <선택을 시작하면서 조선시대의 캐릭터를 빌려와 현대의 페미니즘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여성운동가의 반발을 샀다. 이문열이 작품의 주인공을 통해 페미니스트 계열 작가들을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진실로 걱정스러운 일은 요즘 들어 부쩍 높아진 목소리로 너희를 충동하고 유혹하는 수상스러운 외침들이다. 그들은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이혼은 절반의 성공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


이에 공지영, 이경자 등 여성 작가들은 그를 비난하였다. 페미니즘 단체들의 반발도 거세게 일어나 1997년 3월부터 1년간 여성단체연합이 선정한 ‘여성 권익의 걸림돌’로 뽑혔다.


보수주의자 낙인

84년 발표한 <영웅시대로 그는 보수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후 1993년 신문연재소설 <오디세이아 서울과 1999년 <전야,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 2001년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에서는 김대중과 추미애 등 정치적 성향에 맞지 않는 정치인들을 소설 속에서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결국 2001년 진보세력을 겨냥한 홍위병 발언으로 일부 독자들은 이문열의 책을 단체로 버리는 ‘책 장례식’ 퍼포먼스를 거행했다.


문제가 된 칼럼

2000년 2월 8일 중앙일보 기사에 이문열은 시민단체의 낙선운동 및 음모론을 겨냥하여 ‘홍위병을 돌아보며’라는 칼럼을 썼다. 이들의 행동이 마오쩌둥의 홍위병을 연상시킨다며 일부 시민단체들의 과격한 행동을 나무랐다.


이때의 논쟁은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두고 벌어졌다. 이문열은 총선시민연대가 여당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관제단체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며 총선시민연대를 홍위병에 비유한 것이다.


곧바로 진중권은 이문열 칼럼을 인용하여 총선시민연대와 홍위병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이문열이라고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둘을 동일선상에 놓는 음모론을 던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논리라면 ‘에로영화 스타 젖소부인과 소설가 이문열의 관계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관계다.’라는 진술이 기사에 실려도 된다며 이문열의 발언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또 진중권은 ‘음모론(陰毛論)은 포르노다. 언젠가 이문열은 마광수를 질타했지만 정말로 부도덕한 것은 바로 이 정치 포르노다.’라며 풍자하였다.


그러나 이문열은 이후에도 보수 성향의 발언들을 계속해 나갔다. 2003년에는 한나라당의 공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초한지 책


이문열 책 장례식 치러

2001년 11월 3일 오후 2시쯤 경기도 이천시 부악문원 앞에서 열린 이문열 작가 책 장례식에서 한 어린이가 관(棺)처럼 묶은 소설책 앞에서 ‘영정’을 들고 그 뒤로 어른들이 뒤따랐다.


당시 이문열 작가는 강연차 지방에 내려가 있었다.


장례 준비를 한 사람들은 ‘이문열 돕기 운동’ 소속 30여 명의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전국 150여 명의 회원으로부터 거둔 이문열 작가의 소설책 수백 권을 관의 형태로 묶어서 운구했다. 광목과 상복, 흰 장갑, 그리고 백색 조화도 갖춰져 있었고 피켓도 여러 개였다.


‘홍위병 발언 사과하라’, ‘아직도 시민단체가 홍위병으로 보이세요?’, ‘젖소 부인과의 관계를 밝혀라’,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내가 너를 개라 하면 기분 좋나?’


문화적 대참사였다.


이문열은 그동안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 등의 신문 시론에 대한 시비, 그리고 민주당 추미애 의원의 ‘곡학아세’ 발언 등으로 시달려 왔다.


그의 논조와 정치적 입장에 비판적인 일부 독자는 소설을 반환하겠다는 소동이 빚어졌고, ‘책 반환’을 본격화하겠다는 집단 운동이 시작되어 실행에 나선 것이다.


마을 입구에서 이장이 이들을 막았다.


“상복 입고 마을 길을 통과하지 못한다. 당신네 사정은 모른다. 우리 동네에도 몇백 년을 지켜온 동네 법이 있다.”


결국 ‘장례식’은 동네 어귀에서 진행됐다.


이문열은 이 일을 회고하면서 말했다.


“그 사건 이후 담배를 끊은 이유가 ‘살아남아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작가의 정치적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작가의 작품세계 전체를 부인하고, 또 그런 내용의 퍼포먼스를 그것도 작가가 생활하는 공간 바로 앞에서 벌인다는 건 문화인의 올바른 행동이라고 보기 어려운 일이고, 당시 여러 다른 작가들이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촛불집회 발언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반대 시위로 벌어진 촛불집회에 대해 불장난을 오래 하다 보면 결국 불에 데게 된다. 너무 촛불 장난을 오래 하는 것 같다’, ‘예전부터 의병은 국가가 외적의 침입에 직면했을 때뿐만 아니라 내란에 처해 있을 때도 일어나는 것’, ‘이제 촛불집회에 대한 사회적 반작용인 의병 운동이 일어나야 할 때라고 발언해 논란을 키웠다.


우파적 정치 성향

다음은 그가 발언한 글이다.


“우파는 자유, 평등, 박애 등 인간의 여러 가치 중에 자유를 우선순위에 둡니다. 좌파는 평등을 우선시하고요. 제가 동의하기 어렵고 거추장스러운 건 좌파가 주창하는 평등이 전체주의, 집단주의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이 길을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요. 전력 질주 달리기도 있고, 산책도 있고, 모두가 똑같이 이인삼각처럼 발맞추어 가는 것도 제각기 장단점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각자 자신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는 게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한때는 민중당에서 활약해

1990년 무렵 한때 장기표, 이우재 등의 재야 세력이 주축이 된 민중당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1992년 총선에서 이문열은 민중당의 지원 연설은 물론 포스터 등장까지 하며 민중당을 도왔다. 이는 고향 선배이자 먼 친척뻘인 이재오 때문이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때 이재오가 민주화 운동을 하며 투옥과 수배를 반복하던 시절, 이재오는 아무 출판사나 찾아가 “문열이가 글을 써줄 것”이라고 말하고 돈을 빌려가 민주와 운동 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문열은 군말 없이 밤새워 소설을 써서 출판사에 넘겨주었다.


좌파 진영에 대한 거부감

이문열은 한국 좌파 진영에 대한 거부감을 오래전부터 밝혔다. 이점은 그의 초기작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다만 한국 문단은 진보적 색채가 강하다 보니 이문열은 비판도 많이 받았다.


이문열이 처음부터 우파적 성향을 띠었던 것은 아니다. 이문열의 초기 작품은 황석영보다 더 진보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해 겨울에서 중립에 가까워졌다가 <필론과 돼지에서 조금씩 우파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사람의 아들과 <삼국지의 문학적 성공과 월북한 부친을 부정하는 자기 검열을 거치며 그는 우파로 이동해 갔다.


<필론과 돼지는 전두환 신군부 정권을 전역병들을 삥 뜯는 양아치 베레모로 은유한 것이 문제가 되어 5공 내내 금서로 지정되었다.


황석영 작가와의 우정

진보 진영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소설가 황석영, 보수 진영을 상징하는 이문열은 서로 대립되지만, 두 사람은 잘 지내고 있다.


황석영 작가


황석영의 자서전 <수인 1: 경계를 넘다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92년, 내가 방북하고 베를린을 거쳐서 뉴욕에 체류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이문열이 뉴욕에 왔다면서 전화했다. 망명자 시절을 보내던 나는 외로웠고 문인이 해외에서 나를 찾은 것도 오랜만이라 반가워 맨해튼으로 나갔다.


이문열은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북한 체제의 불합리성에 대해 격렬하게 얘기를 꺼냈다.


나는 무덤덤하게 듣고 있다가 나도 이형과 같은 생각이라고 대꾸했다. 북한은 사회주의의 본질에서 멀어졌고 실상 군사파시즘의 모습을 띄는 독재체제라고.


이문열이 물었다. 그럼 왜 방북했냐고.


나는 언제나처럼 “민주화와 통일은 한 몸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성숙되는 것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며 그것이 평화적 통일의 길이다”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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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하자 이문열이 문득 월북한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나에게 북한을 통해서 좀 알아봐 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나는 뉴욕 UN으로 파견된 북한대표부에 전화를 걸어 이문열 부친의 월북 시기와 인적 사항을 적어서 팩스를 넣었고 사흘 뒤 답변을 받았다.


팩스에는 이문열 부친의 간단한 이력과 가족관계가 적혀있었고 생존해 있는 현주소도 나와 있었다. 일주일 후 이문열이 뉴욕에 왔을 때 그 팩스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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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부친 이원철은 남로당에 대한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정도로 대단히 유능한 지식인이었다. 원산의 어느 공업대학에 직을 얻었고 재혼하여 오 남매를 두었다.


종이에는 이문열의 배다른 아우들 이름과 직업과 나이가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문열은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무너지듯이 허리를 굽히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그 처절한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여 고개를 돌리고 눈시울을 닦았다.


한참 뒤에 격정의 파도가 가라앉고 이문열은 술 한 잔을 넘기고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영감쟁이, 우리 어머니는 진작 당신이 재혼할 줄 알고 있습디다.”


그 이후부터 이문열의 모든 상처와 그늘은 내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누가 의도적으로 이문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게 물으면 나는 대답했다.


그는 전쟁 때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거리에서 손을 놓친 아우 같다.”


내가 한국에 와서 구속되었을 때 이문열은 나의 석방 촉구 성명서에 서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집회에 나와 연설하는 일에도 흔쾌히 나서 주었다.


이문열이 그러한 종류의 일에 동참한 것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영월군에는 내가 둘러보았던 청령포, 관풍헌, 한반도지형, 섶다리, 김카지노 가입 쿠폰 유적지 외에도 별마로천문대, 고씨동굴, 선돌, 동강 어라연, 법흥사, 요선암이 있다.


영월은 역사와 문화가 함께하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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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최근 핫하게 뜨고 있는 영월 와이파크 등 관광지도 추천한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둘러보면 좋을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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