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쿠폰가 눈을 뜬다. 허벅지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진다. 누군가가 허벅지를 마구 걷어차고 있는 것이다. 그럴 만한 놈은 딱 한 놈밖에 없다.
“김카지노 쿠폰. 이 게을러 터진 놈아. 일어나! 뭔 놈의 낮잠을 이렇게 오래 자냐?”
아니나 다를까 박연철이 잠을 깨워준답시고 마구 발길질이다. 망할 놈. 고등학교 동창이다 보니 허물이 없어도 너무 없다.
카지노 쿠폰가 투덜대며 몸을 일으킨다.
“아따, 박연철, 그냥 말로 하면 되지 이게 뭔 지랄이냐?”
“말로는 수십 번도 더 깨웠다. 네가 어디 말로 해서 일어날 놈이냐?”
“그럼, 첨 부터 깨우지 말던가.”
“여섯시에 너희 과 신입생 환영회라며? 그래서 네 시 반에 깨워 달라며?”
“워메! 지금 몇 시냐?”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든 카지노 쿠폰가 끌어안고 있던 이불을 내던진다.
맙소사 이걸 잊고 있었다니? 날마다 술 퍼 마시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다섯시. 암만 해도 제 시간에 도착하긴 틀렸다.
“아따, 큰일 나 부렀네! 선배님들한테 한 소리 듣겠구만.”
카지노 쿠폰가 부랴부랴 세수하고 머리 감고 면도를 하며 부산을 떨어 본다. 안 그래도 좁은 자취방이 점점 혼돈으로 빠져든다.
연철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그 혼돈 속에서 자기 누울 정도의 공간만 치우더니 덜썩 눕더니 입으로만 카지노 쿠폰를 재촉한다.
“그냥 옷만 덜렁 걸치고 가지 뭘 그렇게 때 빼고 광내고 지랄이냐? 늦었다며? 얼른 가.”
박연철 녀석. 누가 윤리교육과 아니랄까봐 시간 늦었다며 어지간히 보챈다. 친구가 염치없는 후배로 찍히는걸 막겠다는 결의가 다 느껴질 정도다. 카지노 쿠폰는 그런 연철이 어쨌든 고맙다.
카지노 쿠폰는 연철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카지노 쿠폰가 전라도 장수 산골짜기에서 혈혈단신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유학 와서 외로움 탈 때 역시 진안에서 온 연철과 이른바 ‘무진장(무주,진안,장수)’산골 짜기 출신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며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같은 무진장 출신이라도 연철은 카지노 쿠폰와 격이 달랐다. 카지노 쿠폰는 영락없는 촌놈이었지만 연철은 진안에서 제법 큰 홍삼농장을 운영하는 나름 있는 집 자식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둘은 고등학교 내내 같은 방을 썼고,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공부했고, 나란히 사범대학에 원서를 냈다. 이유는 서로 달랐다. 카지노 쿠폰는 자식 공부시키느라 허리가 휘는 부모님 부담 덜어주기 위해 등록금이 사립대의 1/4밖에 안되는 사범대학을 선택했고, 연철은 철학을 좋아하는데 기왕이면 철학 공부도 하면서 교사 자격증도 받아두면 어디 쓸데가 있겠지 싶어 철학과 대신 윤리교육과를 선택한 것이었다. 철학과는 어차피 대학원을 가면 된다며.
운 좋게 둘 다 합격했고, 돈을 아끼기 위해 하숙 대신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연철이 돈 내고 살고 있는 자취방에 카지노 쿠폰가 빌붙어 사는 쪽에 가깝다. 월세를 1:1이 아니라 1:2로 연철이 더 많이 내고 있고, 보증금도 연철이 냈다. 그래도 연철에게 조금은 보탬이 된 셈이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카지노 쿠폰는 이렇게 때 빼고 광내는 건 또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아무리 늦었다고 잔소리를 들어도 포기할 수 없다. 신입생 중 마음에 쏙 드는 여자애가 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가꾸고 나가야 한다. 낮잠 자다 추레한 모습으로 그 아이 앞에 나타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카지노 쿠폰는 간신히 면도와 몸단장을 마치고 벽에 걸려 축 쳐진 옷들을 노려본다. 그래 봐야 입고 나갈 옷은 몇 되지 않는다. 그 몇 안 되는 옷 중 그 나마 제일 비싼 옷으로 챙겨 입어 본다. 그런 카지노 쿠폰를 연철이 냉소적인 눈빛으로 훑어 보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지노 쿠폰가 연철에게 한 마디 던진다.
“나 없는 동안 집이나 잘 지켜라. 나 어쩌면 올나이트 할지도 모른께.”
“뭐 네 자유지만 생각 좀하고 살아라. 너 입학하고 일 주일도 안 지났는데 그 중 사흘이나 술 펐다.”
“음. 그런가?”
연철이 틀린 말 한 게 아니다. 카지노 쿠폰는 입학하자마자 연일 술판에 가담했다. 첫날은 86학번 선배들이 제공하는 대면식, 둘째날은 서울대 다니는 고등학교 선배들이 제공하는 동문회 환영식, 세째날은 과 입학 동기들끼리 모임, 그리고 오늘은 과 전체가 주최하는 공식적인 신입생 환영회다.
이름이야 제각각이지만 그 방식은 다 같았다. 어차피 술에 잔뜩 취하는 것이다. 카지노 쿠폰는 이런 것이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때 하지 말라던 것, 하면 학생부에 끌려가던 것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 주는 쾌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철이 말린다고 안 할 카지노 쿠폰가 아니다.
“쓸데없는 걱정 마라. 나 간다.”
카지노 쿠폰는 한 마디 남기고 밖으로 나선다. 나서자 마자 명목상 봄이지만 겨울이나 다름 없는 쌀쌀한 바람이 와락 덥쳐온다. 하지만 고마운 바람이다. 어제 밤새 퍼마신 알콜 기운, 낮잠을 세 시간이나 잤는데도 남아있던 그 독한 취기를 날려 주기 때문이다.
전라도 출신들은 대부분 서울날씨 춥다고 난리치지만 전라도라고 다 같은 전라도가 아니다. 카지노 쿠폰 같은 무진장 출신에게는 어림없는 소리다. 고랭지 농업이 이루어지는 곳 아닌가? 카지노 쿠폰는 서울의 겨울이 추운 것 보다 오히려 서울의 여름이 너무 더울까봐 미리 걱정이다.
자취방에서 한참 내려가 다리를 건너니 289번이 정류장을 향해 꾸물꾸물 다가가는 모습이 보인다. 얼른 뛰어가서 잡아타는데 성공했다. 카지노 쿠폰는 100미터를 13초 이내에 달리고 1000미터를 3분 20초 이내에 달리는 믿음직한 두다리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달리고, 서두르고, 운 마저 좋아도 애초에 자취방에서 나간 시간이 절대적으로 늦은 탓에 신림 사거리에 내렸을 때는 이미 여섯 시가 십분 넘어 지나 있었다. 거기서 다시 ‘국일회관’이라는 음식점을 찾는데 15분이 더 소요되었다. 결국 30분이나 지각을 확정짓고 말았다.
국일회관 현관을 들어서자 현관에 수십 켤레는 될듯한 신발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안에서는 뭔가 진행되는지 박수소리가 우르르 와르르 들린다. 조심스럽게 방 안에 들어서자 대면식 때 낯을 익힌 86학번 선배들이 질책하는 눈빛으로 건방진 지각생을 쏘아 본다.
카지노 쿠폰는 고개를 숙이고 꽁지 빠진 생쥐 모양 살금살금 기다시피 걸어 눈앞에 보이는 비어있는 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일단 앉은 다음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데, 이럴수가, 완전 할렐루야다.
그냥 아무 빈자리나 찾아서 앉는다고 앉았는데, 그게 하필 손미현과 바로 마주보는 자리다. 손미현은 카지노 쿠폰가 눈여겨 봤던 바로 그 아이다.
면접 시험 칠 때부터 눈에 확 들어왔다. 그래서 카지노 쿠폰는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그 초조한 시간 동안 자신은 물론 그 아이의 합격까지 빌었다. 그리고 합격자 명단에서 손미현이란 이름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합격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라니. 하늘은 역시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카지노 쿠폰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마구 터져 나오는 웃음을 잡아 누른다. 그러자 기침소리 혹은 구역질 소리 같은 불길한 소리가 터져 나온다.
“파, 푸팟!”
대면식 때 이미 말을 튼 미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분명 전주 무슨 여고 출신이라고 했는데, 어느새 익혔는지 거의 완벽한 서울 말씨를 쓰고 있다.
“카지노 쿠폰야.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카지노 쿠폰는 미현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리자 너무 당황하여 그냥 속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버린다.
“아니 괜찮다. 다만 미현이 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께 기분이 겁나 좋아서 그런다.”
“어머나.”
미현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는다. 카지노 쿠폰는 쥐구멍 아니 밥상 아래라도 들어가 숨고 싶은 기분이다.
“자! 여러분!”
날카로운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한다. 그 시선이 모인 지점에 다소 왜소한 체격의 그러나 아주 강한 인상과 예리한 눈매를 가진 남학생이 우뚝 서 있다.
카지노 쿠폰는 그 남학생이 낯이 익다. 86학번 대면식 때 봤던 선배인데, 이름이 뭐였더라? 카지노 쿠폰가 기억을 더듬어 본다.
하지만 그 선배는 카지노 쿠폰가 기억을 소환할 틈을 주지 않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방 안을 둘러보며 말을 쏟아낸다.
“지금부터 1987 학년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신입생 환영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자. 박수들 치십시오. 어, 86학번들. 박수 소리가 작다.”
“와! 쳐주자. 쳐 줘!”
억지로 만들어 낸 우렁찬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 선배가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배에 힘을 잔뜩 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럼 먼저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86 학번 이상은 너무 많이 봐서 지겹겠지만 87 학번 신입생 여러분들은 대면식 때 잠깐 봐서 잘 모를 겁니다. 저는 역사교육과 86 학번 과대표이자, 장차, 그러니까 내년이 되겠죠. 역사교육과 과회장으로 당선이 확실시되는 서인우라고 합니다. 어, 다들 박수 안쳐? 형! 박수 안쳐요?”
“야, 임마! 누가 내년에 너 뽑아준데?”
“우우!”
재학생들이 일제히 장난 섞인 야유를 던지고, 신입생들은 저마다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그제야 카지노 쿠폰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86 학번 서인우 선배다. 눈빛이 날카롭고 조금 무서운 느낌을 주어 대면식때 신입생들이 가까이 가기 꺼려했던 선배다. 그런데 지금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오히려 개구쟁이 같고 미안한 말이지만 살짝 귀엽기까지 하다.
카지노 쿠폰가 뭐라고 생각하건 관계없이 인우의 장광설이 계속된다. 아예 빈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아 마이크 모양까지 만들어 그럴듯한 포즈를 잡았다.
“아! 좋습니다. 좋아요. 그러나! 사회자의 권위를 좀 생각해 주십시오.”
“사회주의 만세다.”
누군가가 킥킥대며 소리쳤지만 인우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옳습니다. 사회주의 만세입니다. 사회자가 존중받는 세상. 자, 그러니까 이리 집중해 주시고. 좋습니다. 오늘 신입생 환영회의 식순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의 영도자이신 과 회장님의 축사가 계시겠고, 오늘의 주인공인 싱그러운 87 학번 신입생들의 자기소개와 노래, 그리고 징그러운 선배들의 자기소개, 음 선배들의 노래는 생략하죠? 그 이후는 약간의 문화행사가 있겠습니다. 아, 간단히 말해서 술 마시자고요. 자, 그럼 이제 우리의 지도자, 우리 과의 중심, 우리 과의 독재자, 역사교육과 과회장 85 학번 이진철 학형을 소개합니다. 박수!”
“와아!”
“으음.”
박수와 함성이 좀 잔잔해지자, 방금 소개받은 과회장이 천천히 일어선다.
약간 마른 몸매에 길죽한 다리, 그리고 그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어갈 것 같은 깊은 눈동자를 검은 뿔테 안경으로 가린 모습이다.
카지노 쿠폰는 저런 이미지를 대학 들어오기 전부터 여러번 봤다. 대학 합격이 확정된 학생들 따로 불러모아 학교에서 틀어준 반공 드라마, 반공 만화 같은데 나오는 운동권 학생의 전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회자로부터 마이크(?)를 물려 받은 전형적인 운동권 스타일의 과회장 이진철이 묵직한 목소리로 방 안에 진동을 일으킨다.
“87학번 여러분의 입학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축하와 동시에 여러분을 애도합니다.”
카지노 쿠폰가 깜짝 놀라며 귀를 비빈다. 뭐 애도라고? 이게 무슨 축하하는 자리에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카지노 쿠폰는 고개를 몇번 갸웃거리며 도무지 저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제스처를 드러내었다. 그러자 진철이 카지노 쿠폰에게 시선을 돌리며 노려본다. 카지노 쿠폰는 그 시선을 마주하기 거북하여 고개를 숙였다.
진철이 말을 계속한다. 그럴수록 말투가 점점 격해지고, 목소리는 점점 높아진다.
“박종철 선배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죽임을 당했습니다. 광주의 피로 권력을 잡은 이 살인 정권은 백주 대낮에 무고한 학생을 영장도 없이 끌고가 야만적이고 잔혹한 물고문 끝에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그러면서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따위의 거짓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진실이 밝혀진 지금까지도 오히려 그 진실을 밝힌 사람들을 억압하고 체포하고 있습니다. 이 살인정권, 고문정권의 우두머리는 광주의 살인마들이며, 그 배후에는 독점자본가들의 기름진 배가 있습니다. 87학번 여러분. 입학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죽음 타령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이러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여러분들이 대학에 들어왔다는 것은 결코 축하받을 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애도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1년쯤 재수해서 내년에 들어왔다면 혹시 축하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1987년 3월, 바로 이 순간 대학에 들어온 여러분들은 결코 편안함도, 캠퍼스의 낭만도 즐길 수 없습니다. 역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4천만 민중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다 같이 열심히 싸웁시다. 그래서 내년에 들어오게 될 88학번 후배들에게는 우리 다 같이 진정 기쁜 마음으로 입학을 축하해 줍시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진철이 버얼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87 학번 신입생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진철과 눈을 마주친 신입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굴과 입이 굳어버리는 모습이다. 말로만 듣던, 마치 전설처럼 딴 세상의 이야기처럼만 들어왔던 운동권 분위기.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고등학교의 언더 써클이나 폭력단처럼 은밀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학과 전체의 공식적인 모임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신입생들의 얼굴에 드러난 생각은 거의 비슷하다. 바로 이 질문인 것이다.
“설마 선배들이 몽땅 운동권이라고?”
이때 카지노 쿠폰가 벌떡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친다.
“선배님들! 걱정들 마십시오. 제가 전두환이 그놈을 붙잡아다가 아주 조사 버릴텡게 말입니다.”
일단 호기있게 말은 했는데 수습이 안된다. 카지노 쿠폰는 자신이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마주 앉아 있는 미현에게 멋있어 보이려고 그랬을지 모르겠다. 그저 민망하기만 하다.
“와하하하!”
그런데 뜻밖에도 선배들이 폭소를 터뜨린다. 미현도 웃는다. 뭐가 우스운 것일까? 카지노 쿠폰의 말이? 아니면 말하는 태도가? 뭐 상관없다. 미현이 웃었으니까. 카지노 쿠폰는 으쓱한 마음이 들어 방안에 있는 동기들과 선배들을 둘러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 순간 진철과 눈이 마주쳤다. 진철이 카지노 쿠폰를 노려보고 있다. 뜻밖에 그 눈빛에는 약간의 분노까지 섞여 있다.
겁이 더럭 난 카지노 쿠폰는 고개를 숙이고 슬그머니 주저 앉았다. 그러자 진철도 고개를 돌린다.
“자. 자.”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인우가 벌떡 일어나며 손뼉을 친다.
“그만 긴장들 풉시다. 원래 진철이 형이 유머니 위트니 이런거라곤 하나도 없는 재미없는 사람이란거 다 알죠?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이제부터는 즐거운 시간을 가집시다. 이거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는데, 귀염둥이 87학번 여러분들이 이 분위기를 좀 살리게 재롱을 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그러니까 성명 가나다 순으로 벌떡벌떡 일어나 한바탕 재롱 잔치를 벌려 보자고요.”
“와아!”
또다시 환성과 박수가 나오고, 신입생들이 차례로 일어나 자기소개와 노래를 한 자락씩 던지는 순서가 이어진다.
카지노 쿠폰는 김씨라 세 번째인가 네번째 순서다. 앞의 두 녀석이 소개하고 노래하는 동안 뭔 말하고 무엇을 부를지 빨리 정해야 했다. 웬지 분위기는 맞춰줘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선배들 앞에서 말 조심혀라. 데모 좀 할 것 같다 이런 느낌 들면 달라붙어서 결국 데모 한하곤 못배기게 만든다더라. 그럼 신세 망친다.”
카지노 쿠폰는 하필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앞에서 어머니가 신신당부했던 이 말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말을 따를 수 없다. 광주에서 장사하는 삼촌이 1980년 5.18 때 계엄군 총에 맞은 것을 뻔히 알고 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삼촌은 다리를 절고 있다. 삼촌은 한사코 왜 다쳤는지 말하지 않았다. 카지노 쿠폰는 그때마다 삼촌 얼굴에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를 읽었다.
그러니 명색이 전라도 남자가 전두환에게 주먹질 한 번 못해서야 말이 되겠냔 말이다. 물론 카지노 쿠폰는 운동권 학생이 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데모 몇 번 안 할 수도 없다. 공부 열심히 하고 때때로 전두환이한테 주먹질도 좀 하고 그럼 안될까? 김대중 선생도 하다못해 담벼락에 욕이라도 하라고 했는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다 보니 어느새 카지노 쿠폰 순서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어라는 마음으로 벌떡 일어나 생각 나는대로 지껄인다.
“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87학번 신입생 김카지노 쿠폰라고 합니다. 저는 전라북도 장수군 산골에서 덕유산 정기를 이어받고 태어나, 전주 OO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윤리교육과 박연철군과 함께 졸업했고(웃음), 이렇게 역사교육과에 들어 왔습니다. 저는 솔직하니 말해 공부만 하느라 이 나라가 어떤 나란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압니다. 전두환이는 나쁜 놈이고, 우리 대학생들이 옛날 4.19 때 그랬던 것처럼 그 놈을 쫓아 버려야 된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사나이답게 용감히 싸워서, 그래서 또 역사과 답게 장차 민족의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김카지노 쿠폰가 될 생각입니다. 노래하겠습니다.”
알맹이도 없고 앞뒤도 없는 장광설이다. 카지노 쿠폰는 스스로에 대해 민망함을 느끼며 전라도 출신 학생이면 웬만하면 다 알고 있을 ‘님을 위한 행진곡’을 목청껏 불러 젖히고 자리에 앉았다.
눈총이 느껴진다. 설마 또 진철이? 정말이다. 진철이 또 노려보고 있다. 그 표정은 누가 봐도 “저런 한심한 녀석을 봤나?” 종류다.
더구나 진철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왜? 왜 이러는 거지?
불안에 떨고 있는 카지노 쿠폰의 귀에 마침내 그 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김카지노 쿠폰?”
“예.”
“너, 뭘 좀 알고 하는 얘기냐?”
“예? 무슨 말씀인지.”
카지노 쿠폰가 어리둥절해하자 진철이 고개를 흔든다.
“뭘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너희들한테 같이 데모하러 나가자고 얘기하지 않았어. 난 너희들이 뭔가를 알기를 바랄 뿐이야. 아는 게 먼저고 싸우는 게 나중이지. 알아 듣겠냐?”
하지만 명호는 선배건 선생이건 누구건 간에 쉽사리 “예.” 하고 물러서는 타입이 아니다. 즉각 항변했다.
“뭘 그리 복잡스레 생각 한답니까? 하나도 복잡할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두환이는 나쁜 놈잉게 우리 청년 학도들이 똘똘 뭉쳐 때려잡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진철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진다.
“나도 그게 네 말처럼 그렇게 간단했으면 세상에 소원이 없겠다. 아니라 문제지. 하여간 조만 간에 학회 편성할 테니까 열심히 학습하고 그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도록.”
그러더니 슬금슬금 아까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등에서 차가운 바람 소리가 휘익하고 나는 것 같다.
이해 안 되는 말들의 연속이다.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니? 나쁜 놈이 대통령이다. 그러니까 쫓아내야 한다. 그 외에 뭔 말이 더 필요하지?
카지노 쿠폰가 고민에 빠져있는 동안에도 87학번들의 자기소개는 계속 진행되고, 마침내 마주 앉아 있던 미현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와 함께 카지노 쿠폰의 고민도 판단정지 상태가 된다.
눈 앞에 미현이 서 있다. 다른 생각할 여지가 뭐 있겠는가?
“안녕하세요. 전주 AA 여고를 졸업한 87학번 손미현이라고 합니다. 아직 모든 게 낯설어요. 전 원래 문학을 하고 싶었고, 특히 ‘토지’ 같은 역사소설이 쓰고 싶었어요. 다만 그래서 역사과 들어온 거고요. 사실은 한국사나 동양사 보다는 서양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여러 선배님들 잘 부탁드리고요, 되도록 모든 분야에서 열심히 살고 싶어요. 저어, 노래는 미국 민요 한 곡 부르겠습니다.”
미현이 노래를 부른다. 카지노 쿠폰는 첫 소리를 듣는 순간 깜짝 놀란다. 아니, 저렇게 높게 시작해서 어떻게 노래를 다 부를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높은 음정이다.
길고 커다란 마루 위 시계는
우리 할아버지 시계
90년 전에 할아버지 태어나던 날
아침에 받은 시계란다
언제나 정답게 흔들어 주던 시계
할아버지의 옛날 시계
이젠 더 가질 않네 가지를 않네
90년 동안 쉬지 않고 (똑딱똑딱)
할아버지와 함께 (똑딱똑딱)
이젠 더 가질 않네 가지를 않네
할아버지의 시계
그런데 웬지 가락이 엄청나게 귀에 익다. 가사는 별로 들어본 적 없는데 가락만 익숙하다. 무슨 노래지?
어라! 생각났다. 카지노 쿠폰가 다니던 고등학교 수업 시작 종으로 나오던 멜로디다. 그러니 귀에 익을 수 밖에.
참 신기한 일이다. 수업 시작 종으로 들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했을 그 가락이 여기서 들으니 너무도 맑고 아름답다. 더구나 티 없이 맑고 고운 미현의 소프라노 목소리를 들으니 넋을 잃을 정도다. 비유가 아니라 카지노 쿠폰는 정말로 한 절반쯤 넋을 잃고 노래하는 미현만 바라보았다.
“너, 노래 한번 겁나게 이쁘게 한다.”
노래를 마친 미현이 자리에 앉자 얼떨결에 한 마디 던진다.
“고마워.”
미현이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며 고개를 까딱한다. 저 눈웃음이라니. 몸이 하늘로 붕 뜨는 것 같다. 만약 붕 뜬 것이라면 이대로 떠서 영영 내려가지 말아라. 카지노 쿠폰가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친다.
하지만 카지노 쿠폰의 공중 부양은 오래 가지 못했다. 사회를 보고 있던 인우가 소주병을 들고 슬금슬금 다가왔기 때문이다.
“자, 김카지노 쿠폰. 나하고 한잔하자.”
“예. 좋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 마음은 아, 오늘도 이러면 곤란한데 이러고 있었다. 하지만 사나이가 주는 잔을 마다하랴? 일단 군말 없이 받았다.
“원 샷 할까?”
“그 정도야 일도 아니지라.”
카지노 쿠폰는 웃는 낯으로 단숨에 소주잔을 넘겼다.
“어쭈? 잘 하네? 그런데 미현이는 안 마실래?”
“저, 술 못하는데요?”
“물론 못할 수도 있어. 조금 마시는 척이라도 해 보면 어때? 분위기라는 게 있으니까.”
“그럼, 저어, 아주 조금만요.”
미현이 쑥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소주잔을 든다. 인우가 그야말로 새장에 물주듯 조금 따르고 미현은 마치 고양이 물 마시듯이 한 모금 마신다.
“그래, 대학교 한 일주일 다녀 보니까 어때?”
인우가 카지노 쿠폰의 빈 잔에 소주를 가득 따른다. 바깥쪽이 약간 치켜 올라간 눈동자가 살살 흔들리는 것이 어떻게 보면 귀엽고, 어떻게 보면 무섭다.
카지노 쿠폰가 두번째 잔도 단숨에 비운다.
“아직까지는요 제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선배님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존경? 에라, 이 자식. 너,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아직 술이 덜 들어갔나 보다. 한 잔 더 마셔라.”
“예.”
카지노 쿠폰는 얼른 또 한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무리했다. 어제 폭음한 여운이 남아 있는데다가 단숨에 소주 석 잔이 추가되니 머리가 어질어질 하다.
그런데 마음 속에 기왕 어질어질 해진 김에 갈 때 까지 가자는 엉뚱한 객기가 솟구친다. 카지노 쿠폰는 에라 모르겠다는 기분으로 서너 잔을 더 들이켰다.
술기운이 오르자 있는 말 없는 말 다 튀어나온다.
“싸워야죠. 싸워야 한당게요. 삼촌이 광주에 사시는 디, 해마다 오월만 되면 푸념한다는 것 아닙니까? 계엄군한테 총 맞아서 다리 빙신 되아 부렸다고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고런 짓거리를 한 놈들이 대통령이다 장관이다 해 먹는다요? 그라니게 나라 꼴이 요 모양이 아니냐 이 말입니다. 이딴 꼴을 보고도 싸울 맴이 안 생기면, 고것은 사내 자식이 아니지라. 한 마디로 말해서, 대머리 고 자식을 조사버리자 이겁니다. 와! 전두환 몰아내자! 때려 죽여 버리자!”
그때 카지노 쿠폰 등 뒤에서 째지는듯한 여학생 목소리가 들린다. 87 학번 신입생 중 큰 키와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로 눈에 띄었던 정난영이다. 정난영이 진철과 마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난영이 잔뜩 격앙된 목소리가 따지고 든다.
“알아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 정권이 어떤 정권인지. 그 거짓부렁을 밝히겠다고 나선 청년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탄압했는지, 그리고 박종철 선배를 물고문 해서 죽인 것, 다 알아요. 하지만, 이 학살자가 저와 무슨 상관이죠? 학살자를 몰아내고 민주정부가 들어선다고 한들, 땅 파먹는 우리 집은 여전히 가난할 거예요. 대통령이 전두환에서 김대중으로 바뀌면 우리 집도 부자 되나요? 저도 잘 살 수 있나요? 그런가요?”
“야! 정난영!”
카지노 쿠폰가 그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선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 술기운을 못이겨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뭐라뭐라 고함을 친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 떠보니 신입생 환영회는 언제 끝났는지, 다시 자취방에 돌아와서 팔자로 몸을 뻗고 드러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 자식아.”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연철의 길죽한 얼굴이 보인다.
“너 어제 올나이트 한다 그래서 오랜만에 잠 좀 푹 자보나 했더니 기껏 새벽 두 시에 들어오냐? 온 동네 사람들 잠 다 깨워 가면서? 너 때문에 쪽 팔려서 혼났다.”
“아흐흠!”
카지노 쿠폰는 연철이 잔소리야 어찌 되었건 간에 일단 하품부터 크게 한다.
“그랬냐? 나가 어떻게나 취해 놨던지 잘 모르겠다 야. 내가 뭔 짓 했냐? 뭔 짓을 해서 너가 다 쪽이 팔렸다냐?”
“가르쳐 주랴?”
“굳이 고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아니, 꼭 말해야겠어. 우선 대문 앞에다가 오버이트를 한 무더기 했다. 그거 내가 치웠다고 이 새끼야.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 노래까지 불러 젖히더만. 난 한 밤중에 웬 돼지 잡나 했다.”
“노래라고?”
“그래. 자식아. 무슨 할아버지의 시계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노래를 별 이상시런 목소리로 불러 대더만. 하고 많은 노래 중에 하필이면 고등학교 수업 시작종을 부르냐? 소름끼쳐 혼났다.”
“그랬냐?”
“구호도 외치더라.”
“구호라고?”
“그래. 구호. 뭐 부패정권 학살정권 전두환 정권 타도하자? 하여간 그런 내용.”
“푸하하하!”
“왜 웃어?”
“아따, 그 와중에 내가 그런 소리까지 했단 말이냐?”
“그랬다니까.”
“푸하하하하!”
카지노 쿠폰가 계속 웃자 연철이 발끈한다.
“그만 웃어. 그게 그렇게 웃긴 일이냐?”
“그럼 안 웃기냐? 어떻게 술주정을 해도, 그런 술주정을 다 했다냐? 내가 한 짓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정말 웃기다. 잘못했으면 술주정 때문에 대공분실 끌려갈 뻔했네. 하하하! 안 그러냐?”
“난 하나도 안 웃기다.”
“어찌 안 웃기냐?”
“그게 술주정으로 주절거릴 말들이냐?”
“그것이 뭔 소린데?”
“정말러 피 흘려 가며 목숨 걸고 그 소리를 외치며 싸우는 동료 학우들, 선배들이 있는데, 넌 그래 그 소리를 고작 술주정으로 하고는 그게 재미있다고 웃냐고?”
카지노 쿠폰는 올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이다. 연철의 진지모드가 발동 걸린 것이다.
연철은 고등학교 때도 친구, 선배, 선생을 가리지 않고 뭐든지 진지하게 따지고 드는 성격 때문에 친구가 많지 않았다. 카지노 쿠폰가 그런 연철과 친구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카지노 쿠폰 역시 그런 진지모드에 주눅들지 않고 같이 따지고 들었기 때문이다.
카지노 쿠폰가 다시 항변한다.
“아따 자식 정색하기는. 술주정으로도 외치고 데모 판에 나가서도 외치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따져 쌌냐? 이 말, 저 말 다 따져가며 할까 말까 정해서 하면 그게 술주정이냐? 어찌되었건 새벽에 꼬장 부린 건 미안하다.”
이렇게 말해 놓고 나니 카지노 쿠폰는 마음에 크게 걸리는 것이 하나떠오른다. 어제 밤, 정난영이라는 신입생에게 뭐라고 소리 질렀던 기억이 난 것이다. 분명 좋은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오늘부터 수업시간에 다시 얼굴 마주해야 하는데, 분명 뭔가 못된 말을 한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안나니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