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이야기 1
“온 가족이 벌써 다 봤어요?”
카지노 쿠폰 가게 아저씨의 신기한 눈빛을 뒤로한 채, 동생과 나는 이어지는 5편의 카지노 쿠폰를 빌려 서둘러 집으로 갔다. 뭔가 엄청난 보물 꾸러미를 가득 안은 듯,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쯤, 우리 집에서 걸어 5분 거리에 작은 카지노 쿠폰 가게가 있었고, 거의 일주일에 5일가량 그 가게를 들락날락하며, 한 번에 5편~10편가량 중국 무협 시리즈물을 빌려봤다. 당시 ‘무협 시리즈’ 하면 홍콩 TVB 방송국에서 방송하던 무협 드라마를 대륙의 언어, 즉 중국 표준어로 더빙해 한국에 들여오는 것들이었다. 거의 대하드라마 수준인 20~30편가량의 시리즈물을 신속히 보고 또 다른 드라마로 넘어가기 위해 온 가족이 밤 3시까지도 카지노 쿠폰를 돌려보곤 했다. 취향이 비슷했던 우리 4 가족은 복수(復讎)에서 의리와 보은으로 이어지는 무협드라마의 매력에 중독되어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는 김용 소설 원작의 1986년 판 <의천도룡기, 남자 주인공 장무기역은 우리가 잘 아는 양조위가 열연했다. 오프닝 곡은 지금 당장 쿡 찔러도 바로 뽑아낼 수 있을 정도로 여러 번 따라 부르고 불렀다. 호환·마마의 공포도 이겨내며 불법복사를 감행해서 카지노 쿠폰를 소장하며, 보고 또 봤었다. 나와 여동생, 여자 둘이 매일 서로의 혈도를 누르고 무공연습에 매진했으니, 당시 우리 삶에 ‘무협 시리즈’ 속의 주인공들이 차지하는 지분이 상당했었다.
의천도룡기의 두 주인공 장무기와 조민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몸담고 있는 종파가 달라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명문정파인 무당파의 장무기, 몽골인이자 마교의 조민, 거기다 잘생기고 우유부단한 장무기는 출생의 비밀과 여자관계가 상당히 복잡해, 둘의 관계는 오해 범벅에 배배 꼬여서 풀기 힘든 지경에 이른다. 약 20편가량에 이르는 대 서사의 핵심 줄거리는 그 둘의 이루어질 수 없는 험난한 사랑.
너무나 복잡해서 결론만 소개하면, 장무기는 자신이 이끌던 명교를 이용해 나라를 구한 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민을 찾아간다. 조민도 가족과의 연을 끊게 되고, 언젠가 함께했던 술집에서 약속 없이 우연히 만난 둘.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애틋하게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때 조민은 장무기에게 “마지막으로 영웅답지 못한 일을 부탁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긴장하고 있는 장무기에게 그녀가 건넨 마지막 대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내 카지노 쿠폰 그려 줄래요?”
그 둘의 긴긴 서사의 마지막, 눈썹 그려 주겠냐는 그 이야기에 어린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랑한다는 말도, 보고 싶었다는 말도, 앞으로 너만 바라보겠다는 말도 없었지만, 마음은 그 어떤 말보다도 진하고 선명하게 전해졌다. 이제는 흔한 사랑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둘의 마음, 돈 명예 인연 모두 포기하고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평범하게 살고 싶은 두 사람의 마음이 전해지는 마지막 대사가 아직도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얼마 전 드라마 <트렁크를 보다 ‘장무기와 조민’이 스쳐가는 대사가 나와서 수첩에 적어두었다. 이뤄지기 쉽지 않은 사랑을 하고 있던 두 사람, 언제고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함께 나누며, 더 이상 이별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매일이 오길 기도하는 그들의 대화가 내 마음을 머물게 했다.
“내일 아침 눈 뜨면, 20년쯤 늙어 있어요. 우리는 너무 뻔해서 지긋지긋해요. 당신이 아는 카지노 쿠폰을 내가 다 알고, 내가 아는 카지노 쿠폰을 당신이 다 알고, 그래서 그 카지노 쿠폰들을 돌아가며 흉보는 게 낙이에요. 눈곱도 안 떼고 아침을 같이 먹고, 온종일 서로 붙어있으면서 지겨운 카지노 쿠폰, 툴툴대다가 저녁으로 생선을 구워 먹고 같이 곯아떨어져요. 그리고 그다음 날도 뻔하게 일어나요.”
“해줄게요. 뻔한 카지노 쿠폰.”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사랑의 모습은 매일 설레고 두근거리는 삶이 아니라 이토록 뻔하고 흔하고 지겨운 하루하루 일지 모른다. 눈썹을 그려 주고, 같이 생선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잠들어 비슷한 시간에 서로의 뒤척임에 눈 뜨는 뻔한 매일이 모여 있는 나날들. 그 지겨운 나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깊이 이해하고 지키고 싶은 마음. 이토록 뻔하고 지겨운 나날 속에 나와 함께한 사람이 너라는 사실을 감사하는 순간순간의 모음. 신기루처럼 잠시 피어났다 사라지는 행복의 감정이 그 사람으로 인해 오랜 시간 여러 번 곱씹고 싶은 추억이 되는 사랑.
카지노 쿠폰 가게에 카지노 쿠폰를 반납하면 아저씨는 카지노 쿠폰를 처음으로 되감는 작업을 한다. 맨 앞으로 돌려놓은 후 다음 손님을 기다릴 수 있게 원래 자리에 꽂아둔다. <의천도룡기 마지막 회 카지노 쿠폰테이프가 앞으로 돌아가던 순간을 기억한다. 카지노 쿠폰 테이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처음으로 돌아가지만, 그 둘이 어디선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썹을 그려 주고, 입에 묻은 밥풀을 떼어주며 그렇게 평범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기도했던 어린 나의 마음.
‘계속 그렇게 잘 살아주세요. 헤어지지 말고, 아프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