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두기봉 감독 영화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리고 영화가 전개되는 모든 순간 그 시선을 좀처럼 놓치는 경우가 없다. 초반 몇 분동안 관심을 끄는 것은 해볼 만하다. 그러나 관객이 초반의 흥미를 잃지 않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데는 굉장한 공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아름답거나, 이야기가 재밌거나, 영상이 화려하다고 성취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다. 이 모든 요소가 다 갖춰져 있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고.
두기봉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시작이 대범하다. 그는 앞으로 진행될 영화의 배경이 되는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곁가지들을 과감하게 쳐내고 영화의 중심인물이 되는 캐릭터를 바로 상황 속에 밀어 넣는 방식으로 스타트를 끊는다. 암전, 흑사회, 익사일, 문작, 마약전쟁 등 거의 모든 두기봉의 영화들은 이 이야기가 어떤 사람의 주도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그 기대치를 초반부터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암전은 초반 인질 사건 전문 협상가인 이수현의 등장으로 영화의 문을 연다. 인질범들과 대치 중인,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예민한 현장을 이수현은 어떤 부담감 없이 가볍게 누빈다. 몸짓과 언행은 가벼운데 눈썰미는 보통이 아니다. 그는 인질범과 대치하며 범인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빠르게 눈에 밀어 넣는다. 관객들은 이수현이 등장하는 초반 시퀀스를 통해 두기봉이 창조한 이 캐릭터의 특성을 기민하게 감각할 수 있다. 그렇다. 이해가 아니라 감각이다. 설명이 아니라 보여짐이기에 이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각의 영역이다. 관객들은 이수현이 연기하는 인물이 보여주는 장면을 통해 그 사람을 감각한다. 망설임 없는 태도와 거침없는 언행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가 다년의 시간 동안 현장을 통해 단련된 유능한 전문가라는 사실을 감각하게 한다.
<흑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두기봉은 영화의 주축이 되는 거친 양가휘의 로비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어떤 인물이며 추후에 극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힌트를 주며 도입을 연다. 양가휘가 연기하는 따이디는 거침없고 즉흥적이며 자제심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표를 돈을 매수함으로써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배 위에서 벌어지는 로비 시퀀스는 양가휘의 제멋대로의 성정을 폭로하는 동시에 표면적으로는 점잖아 보이는 흑사회의 선거가 실은 진창의 암투판임을 동시에 고발한다.
그것도 길고 지루한 시퀀스를 줄곧 나열하는 게 아니라 흑사회 원로 간부들의 오찬모임과 연달아 이어지는 양가휘의 로비씬 두 장면만으로 끝내버린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이 안에 충분히 녹여져 있다. 정말이지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다. 차기 회장 후보의 아슬아슬한 경합 분위기, 불투명한 선거판, 더러운 암투의 분위기 이 모든 힌트들이 두 개의 시퀀스 안에 간명하게 처리된다.
<마약전쟁의 고천락도, <문작의 임달화도 두기봉은 화면에 자신의 배우들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가타부타 지루한 부연설명 없이 그가 어떤 사람이며 무슨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한눈에 직감할 수 있도록 극을 설계한다. 이 명료함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초반 시퀀스들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몇 번을 다시 봐도 필요한 모든 정보가 가장 효율적으로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기깎기가 완벽한 퍼즐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정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능력이다.
두기봉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 "설명하지 않는다."이다. 영상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획득하기 어려운 성취인지 이해할 것이다. 영상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이것에 실패하기 때문에 대사가 길어지고 영상이 추가되며 불필요한 시퀀스들이 늘어난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공회전을 한다. 영상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들을 관객들에게 이해시키려고 이것저것 추가된 장치들은 정교하게 맞물리지 못하고 각기 삐걱거리면서 전체 작품을 무너뜨린다. 대사로 직접적으로 설명하니 어찌 됐든 이야기는 굴러가지만 시네마적 재미가 증발해 버린다. 인물이 자신의 상황과 성격을 대사로 뱉어내기 시작하면 관객들 역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들어야 하는 퀘스트 정도로 이해하게 된다. 시네마 특유의 보는 즐거움, 시각적 쾌감이 사라지는 것이다.
두기봉 감독은 인물이든 상황이든 영화를 통해 그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조직의 전쟁이 임박해 있든 인질범이 협상을 벌이든, 옛 동료들이 도망간 조직원을 다시 잡으러 왔든 그 어떠한 상황도 사연과 역사를 구구절절 소개하지 않는다.
스타워즈가 길고 긴 은하계의 역사를 자막으로 소개하며 시작하는 것과 달리 두기봉은 영화의 주무대가 어디며 어떤 상황인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인물들이 앞으로 뛰어다닐 배경을 주요한 초반 시퀀스를 통해 보여줄 뿐이다. 그는 관객이 자신이 제공하는 간명한 시퀀스만으로도 충분히 상황을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게 시네마의 힘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듯하고.
<흑사회는 삼합회의 차기 회장 선거를 앞두고 노년의 간부들이 작은 모임을 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주요한 선거를 앞두고 거친 양가휘와 속을 알 수 없는 임달화 두 차기 회장 후보에 대한 걱정거리를 나누는 노쇠한, 그러나 여전히 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장로들의 대화를 통해 관객들은 영화의 주요 정보를 획득한다. 차기 회장 자리를 둘러싼 암투가 전개되겠구나 하는 추측과 두 인물의 대비를 통해 극렬한 투쟁이 예상된다는 점 말이다.
두기봉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정보들을 설명이 아니라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을 극 안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굉장히 독특한 위치를 관객에게 배정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두기봉 감독이 관객을 또 하나의 배우처럼 다룬다는 인상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는 관객의 자리를 스크린 밖이 아니라 안에 마련함으로써(그러니까 장로들의 대화를 엿듣게 하는 방식으로) 관객들을 시청자가 아닌 극의 일원으로 은밀하게 초대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흑사회와는 상관없는, 그러니까 앞으로 일어날 조직 내부의 전쟁을 스크린 밖에서 안전하게 관람하는 위치가 아니라 마치 엑스트라 배역처럼 무대 안 쪽으로 불림당함으로써 안전한 거리감을 박탈당하고 유혈이 낭자할 이 선거판 위로 꼼짝없이 붙들려 들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두기봉 영화의 독특한 관객 위치는 그가 사용하는 두 가지 장치를 통해 정립된다.
첫째는 다양한 인물 군상을 통해 사건을 풀어가는 다시점 방식의 이야기 전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경과 클로즈업의 노련한 배분(특히 클라이맥스에서의 원경 사용)이라는 편집 기법.
1. 다시점 방식의 이야기 전개
대부분의 영화들이 프로타고니스트나 안타고니스트라는 몇몇 주요 등장인물들의 시점을 통해 관객들에게 관람을 허용한다는 점을 상기해 봤을 때 두기봉의 작품은 매우 독특하다. 그는 주인공의 시점 혹은 악당의 시점으로 관객들을 몰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도 아닌 제 3자의 공간을 영화 안에 제공함으로써 독특한 관람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나 대부분의 그의 작품이 한두 명의 주요 인물로만 전개되는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인물이 치고 빠지는 케이퍼극같은 형식을 띤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설명하지 않는 그의 서술방식이 이러한 접근이 가능하게 한다.
어느 인물에 대해 설명을 하면 할수록 관객들은 그 인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감정을 이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설명하지 않는 두기봉 감독의 연출 방식은 어느 특정 인물의 시점으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이 상호작용하는 그 현장 안으로 관객을 초대함으로써 그 모든 사건을 목격하는 자로서 관객들을 위치시킨다. 그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비극적 애상은 바로 이 독특한 관람자의 위치로부터 비롯된다. 관객은 한 인물에 몰입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받음으로써 한 사람의 서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서로를 죽이고 죽는 동물 세계를 보여주는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이야기에 접근하는 두기봉 감독의 방식대로 다양한 인물 군상의 생 자체를 여러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결과적으로 영화를 관조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두기봉 감독의 관객들은 스크린 밖이 아니라 안으로 관찰자의 자리를 제공받지만 동시에 적극적으로 인물에 몰입을 하거나 능동적인 캐릭터로서 움직일 수 있는 참여의 가능성을 완벽히 차단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을 타인의, 그러나 자신이 밀접하게 동행하게 됨으로써 마치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지인에게 벌어진 사건을 함께 지켜보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소비하게 된다. 두기봉 감독의 걸작들을 모두 시청하고 난 뒤에 느껴지는 탈력감과 애상은 이런 독특한 관람경험의 산물이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 발생한 사건은 아니지만 마치 내가 직접 목격한 것과도 같은 깊이의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관람이 아닌 관조의 결과다. 의식적으로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수많은 걸출한 홍콩 영화감독들 사이에서도 두기봉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매력은 이 교묘한 발란스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했었다. 무대 밖의 무기력한 관찰자보다는 인물들과 더 가까운 위치로 초대받았으면서도 그 인물들의 어떠한 운명에도 관여할 수 없는 철저한 조연으로 한정됨으로써 관객들은 인물들에게 가해지는 운명의 폭력을 관찰하고 관조할 수밖에 없는 비통함을 함께 느끼게 되는 설계다. 이러한 관객의 위치성은 두기봉 영화의 또 다른 특징과 결합하며 파괴력을 더해간다. 그것은 바로 원경의 사용이다. 두기봉 감독은 정말로, 정말로 원경을 너무 잘 쓴다.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작품의 뉘앙스는 감독의 원숙한 컷 사용을 통해 획득된다.
2. 원숙한 원경의 사용
두기봉 감독의 영화는 사실 원경의 사용보다 노련한 롱테이크 씬으로 더 유명하다. 여전히 최고의 총격전 중 하나로 언급되는 <익사일의 마지막 시퀀스나 <문작의 우중 소매치기 대결 시퀀스는 몇 번을 다시 봐도 근사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두기봉 감독 작품의 독특한 정서를 쌓아 올리는 주요 장치는 바로 원경의 사용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익사일의 그 유명한 총격전보다 강렬하게 내 시선을 빼앗겼던 시퀀스는 바로 그 직전의 건물 탈출 시퀀스다.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비장한 난투전을 다양한 시점으로 조립해 보여줬던 마지막 총격전보다도 부상당한 동료를 데리고 건물에서 탈출하는 그 직전의 총격씬이 정말로 충격적으로 좋았다. <익사일는 부상당한 장가휘를 찾지 못한 채 건물을 뛰어 내려가는 주인공들의 총격전을 긴 원경으로 보여준다.
영화 <구룡성채가 클로즈업 숏을 쪼개 붙임으로써 다양한 공간의 모습을 제공하고 추격전에 긴박함을 보여줬던 방식과는 정반대로(이것도 너무 좋았지만. 구룡성채 사랑해요.) <익사일의 건물 시퀀스는 좁은 불법진료소 내부의 총격전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다 건물을 급하게 빠져나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느닷없는 원경으로 전환하며 보여준다. 다급하게 탈출을 시도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근접샷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아닌 건축물의 원경을 보여줌으로써 시각적 정보보다 총격 소음, 즉 청각적 정보를 대체 제공함으로써 관객의 시각적 몰입을 차단해 버린다.
이는 기묘한 소격효과를 내는데 시각적 암담함과 충격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쫓기는 인물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청각적 효과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관여를 유지하도록 부추긴다. 한창 몰입해야 할 순간에 의도적으로 (영화의 관객이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시각적 정보를 차단함으로써 한 껏 궁금해진 관객들은 더 적극적으로 청각적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온 신경이 귀로 쏠리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두기봉 감독은 관객의 위치를 완벽한 관찰자도 그렇다고 완전한 주인공으로의 몰입도 아닌 상태로 배정한다. 시각적으로 총을 피해 도망 다니는 주인공들로부터 차단당했으니 이로 인해 주인공과 관객 사이에 벌려진 거리감을 청각 정보를 통해 대체하려는 보상심리가 생기고 그렇게 발생한 보상심리는 역으로 그 씬에 관객을 투신하게 만든다. 이 기막힌 거리감 조절이 두기봉 감독의 영화를 독특하게 만드는 결정적 지점이다.
<흑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원경을 활용하는 두기봉 감독의 독특한 방식은 클로즈업의 강렬한 매력인 몰입을 차단함으로써 상황을 관조하는 힘을 만들어낸다. <흑사회에서 두기봉 감독은 원경을 폭력의 속성을 폭로하는 결정적 장면에서 활용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폭력의 주체가 되는 경험을 박탈해 버린다. 그가 <흑사회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주제의식이 홍콩 누아르 특유의 비장하거나 아름다운 폭력에 관한 찬가가 아니었기에 두기봉은 가장 결정적인 폭력의 장면마다 의도적으로 원경을 선택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폭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폭력을 당하는 피대상자로서 이입하는 아니라 한 발 물러서서 극 중 발생하고 있는 폭력 현장을 관찰하고 들여다봄으로써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임달화가 신사의 가면을 벗고 비열한 본성을 드러내는 클라이맥스에서 두기봉 감독은 원숭이들이 그 장면을 관조하는 쇼트를 삽입함으로써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폭력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결단을 보여준다. 어떠한 미학이나 낭만이 개입될 수 있는 주관적 쇼트를 제거해 버림으로써 폭력의 민낯을 폭로하는 이런 방식의 쇼트 활용은 <흑사회 1과 2 모두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클로즈업이 몰입을(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원경이 거리감을 창조하는 경향을 노련하게 조절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감독이 의도하는 위치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만드는 효과를 창출한다. 이러한 원숙한 원경의 사용이 전술한 두기봉 감독 특유의 다시점 이야기 전개 방식과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관객들은 실로 기묘한 관람경험을 하게 된다. 완벽히 주인공이 되지도 그렇다고 안전한 스크린 밖에서 등장인물들의 비극을 마냥 바라보고만 있는 것도 아닌 제3의 지대에서(그러나 대체로 스크린 안의 위치에서) 이야기에 초대되고 동시에 배제되는 모순적인 위치를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절묘한 위치 짓기가 두기봉의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든다. 몇 번이고 초대받았다가 쫓겨나는 기괴한 경험을 반복하며 관객들은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의 희비극을 목격하는 동시에 관조한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애타게 닿을 듯 닿지 않는 그 거리에서 관객들을 꼼짝없이 이 노련한 감독이 만들어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허락받은 만큼만 들여다보게 된다. 이 안타까운 거리감의 미학이야말로 두기봉의 작품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드라이한 애상이라는 정서를 만들어내는 핵심인 것이다.
아름답다. 놀랍도록 간결하게 부족함도 과함도 없이.
p.s 두기봉 감독.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