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 전임자의 편지 11
가을은 노동조합에게 단체교섭의 시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임금협약은 매년마다, 단체협약은 격년에 한 번씩 갱신하게 됩니다. 단체협약이 근로조건에 관한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한다면, 임금협약은 당해의 기업 성과, 물가상승률, 최저임금 수준을 기반으로 하여 당해 혹은 차년도의 임금 인상률을 정하게 됩니다. 단체협약 갱신이 있는 해에는 단체협약과 임금협약을 함께 다루게 되는데, 이것을 현장용어로는 임단협, 즉 ‘임금 및 단체협약’이라고 합니다.
임협이든, 임단협이든 일정이 잡히면 노동조합의 지부장은 친한 다른 지부들에게 공지를 합니다. “오실 수 있는 분들은 와주세요!”파티 초청장이 아닌 임단협 Kick-Off 회의 초청장을 구두로 돌리는 것이지요. 연락을 받은 지부장들은 기존의 일정과 중복이 없다면, 시간을 내어 Kick-Off 회의장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게 됩니다.
산업별 노동조합의 개별 사업장에서 임단협이 이루어질 경우 산업별 노동조합의 위원장 역시 참석하게 됩니다. 개별 사업장의 임단협 주체는 지부가 아닌 산업별 노동조합이기에 위원장은 노동자 측 위원의 중앙에 앉아 맨 처음에 발언을 합니다. 특별한 이슈가 없는 상황이라면, 협력적이고 상생적인 태도로 협상에 임해 달라는 내용과 함께 협상 권한을 지부에 위임하겠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산업별 노동조합이 모든 개별 사업장의 임단협을 주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회의석상의 다른 지부장들은 무엇을 하느냐? 해당 지부가 속한 협의체의 의장이 발언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단지 앉아있습니다. 이렇게 앉아있는 것은 해당 지부에게 상당히 큰 힘이 됩니다. 사측에게는 해당 지부가 다른 지부들과 끈끈히 연대하고 있음을, 그러하기에 협상을 쉽게 임해서는 안 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노동조합들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큰 힘이 됩니다.
다른 지부의 임단협 Kick-Off 회의 참석이 해당 지부에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회의 앞뒤로 지부장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안부도 포함되지만 지부의 안부가 오갑니다. 사측과 정부의 움직임부터, 특정 지부에 이슈가 생겼다면 진행상황을 전해 듣습니다. 또 아이디어 역시 오갑니다. 우리 지부에서 이번에 어떤 제도를 도입하려는데 혹시 먼저 시행한 기관은 있는지 묻습니다. 만일 그러한 기관이 있다면, 도입에 있어 어려움은 없었는지, 또 그 어려움을 어떻게 돌파했는지 묻습니다. 이렇게 지부장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멘토가 되어줍니다.
한편 지부장들에게는 노동조합 내에서 고민을 꺼내놓는 것 자체가 상당한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고민을 말할 때는 해결방안 역시 함께 내놓아야 합니다. 내놓은 방안이 잘못된 것이어서 조합원의 의견을 통해 철회되더라도 말입니다. 철회된다면 조합원들에게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막았다는 안도감이라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결방안 없이 고민만 던지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은 조합원들을 불안하게만 하는 일입니다. 지부장이 방안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는 것은 풀 수 없는 문제라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무료 카지노 게임 Kick-Off 회의라는 명목으로 갖는 회합은 지부장들에게 가장 편한 시간입니다. 조합 내에서는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고민을 내놓아도 안전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공감하고 서로에게 공감받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 선 비판이 오가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