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좋은 꿈을 꿔서 비몽사몽간에 번호만 적어놓고 깜빡 잊어버린 적이 있다. 마침 그 주 주말에 제사를 지냈는데 어쩐지 평소와는 달리 섬찟한 느낌이 드는 게 아닌가. 퍼뜩 적어둔 번호 생각이 났지만 이미 마감 시간은 끝.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보니 내가 적어둔 번호가 3등 당첨 번호였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두 바퀴쯤 방안을 굴렀던 걸로 기억하는데, 또 한 편으로 1등 번호가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번호 하나만 더 맞았으면 내 기분은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영화 <육사오(2022) 역시 그런 상황에 대한 영화다. 그래도 나는 번호도 다 맞진 않았고, 실제로 구입도 하지 않았으니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 상황이었지만 <육사오에서는 주인공의 손에 1등 당첨 카지노 게임가 쥐어지고 한순간 실수로 종이가 북한에 넘어가기까지 한다.
카지노 게임 종이가 주인공의 손에 들어오고 그걸 북한 군인이 줍게 되는 과정, 그리고 주인공이나 부대원들이 카지노 게임 종이를 두고 아웅다웅 다투며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은 세간의 평가처럼 밋밋한데 영화의 결말만은 유독 눈에 들어온다.
느닷없이 등장한 멧돼지 때문에 돈을 다 날리게 됐는데도 만철이 바지춤에 숨겨놨던 얼마 안 되는 돈에 다 같이 기뻐하는 사람들. 그토록 원했던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하게 됐지만 그래도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데 부대원들은 만족한다.
어릴 때는 카지노 게임 당첨 같은 횡재로 큰돈을 받아서 멋진 스포츠카도 뽑고 싶고 달마다 해외여행을 떠나 인스타에 올릴 화려한 인생 사진을 남기고도 싶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드니까 드는 생각은 그저 어머니께서 오래도록 건강하게 뭐라도 챙겨드리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 수 있게 부족함만 없이 지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미디어에서는 억 단위가 우습게 흘러나오니 아직 돈을 제대로 만져볼 일 없는 청년 시절에는 그 감이 잘 없다가도 돈을 벌어보고 백만 원이 우스운 돈이 아님을 알면 과연 영화 <육사오에서처럼 50억을 날리고 1억이 남았어도 웃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본래 가지지도 않았던 걸 아쉬워하다가 당장 얻을 수 있는 행복이 눈앞에 있는데도 걷어차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안락한 노후까지 대비하며 자기만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려는 움직임까지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오히려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 결과물을 단박에 얻으려고 선을 넘을 때,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육사오에서 카지노 게임 종이가 '선'을 넘어갈 때, 주인공 천우 역시 선을 넘는다. 그리고 그 선을 넘은 곳에는 지뢰밭도 있고 총구를 겨눈 사람도 있고 뒤로는 비밀을 지켜야 할 시한폭탄 같은 아군까지 있다. 카지노 게임가 사라져버릴까 봐 시간에 쫓겨 안절부절못하는 천우에게 그 선을 넘는 기점으로 없던 원래는 없던 문제와 걱정거리가 폭발적으로 생겨난다.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또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긴다. 기름도 서서히 달구면 맛있는 튀김 요리를 내어주지만 급한 불에 달궈진 기름은 물 한 방울 튀어도 폭탄이 된다.
모두가 달리고 있을 때 뒤처지는 느낌이 든다면, 그래서 뭐든 해야겠다는 조바심이 든다면 잠깐 서서 이게 본래는 뭘 하려고 했던 것인지, 내가 감당할 수는 있는 속도인지, 혹은 거울을 보고 있으면 거울 속에 비친 내가 섬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살피는 게 좋지 않을까.
카지노 게임 1등 종이를 잃어버리고 웃을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애초에 카지노 게임 1등은 내게 없었던 것이라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