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경민 Apr 12. 2025

내 카지노 게임 사이트 구해줄 영화 속 명장면 1

"나를 속이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
카지노 게임 사이트

#호수에서 숀에게 심리 상담을 받기로 한 윌


한적한 호수에서 만난 두 남자. 앳된 얼굴에 늘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속 주인공 윌은 “사진 기억”이라고 불리는 천재들의 특징을 타고났다.대학교 청소부로 일하면서 MIT의 수학 교수도 풀지 못하는 수학 난제를 사칙연산 풀듯 풀어버린 그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모르는 지식이 없으며,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고 법정에서 “자기변호”를 통해 형을 감면받는 경이로운 능력까지 보여준다.


하지만 윌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닫고 방탕한 생활을 영위하며 청소부나 벽돌공 같은 능력에 어울리지 않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나중에 윌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램보 교수가 그가 재기할 수 있도록 심리치료를 통해 그 마음의 문을 열어보려 하지만 윌은 모든 심리 치료를 받는족족 망쳐버리고 만다.


그렇게 여러 상담자들을 물리치고 의기양양(?)한 윌. 멘토인램보 교수가 마지막으로 데려온 숀 또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다시 자신을 보러 온 그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러나 조금은 기대되는 뉘앙스로윌은말을 건넨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

카지노 게임 사이트


윌 :“이건 또 뭐죠? 분위기 잡고 뭐하게요?”

:(중략)...“네가 전에 내게 했던 말을 생각해봤어. 내 그림에 대해서 말이야.”

윌 :“그래요?”


윌의 새로운 상담사로 온숀도 처음엔 윌의 심리 치료를 실패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윌은 심리 치료를 거부하기 위해 교수들을 향해 막말을 내뱉는 것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숀을 만나고도 윌의 태도는 변함이 없어서, 이제는 아예 막말인 정도가 아니라 숀이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렸던 그림을 보곤 그의 아내를 험담하며 숀의 인생에 칼질을 해대기에 이른다. 제아무리 숀이었어도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이어졌고, 그는 윌의 멱살까지 잡으며 내보냈었던 것이다.



:"(중략)...하지만 갑자기 뭔가 깨닫고는, 그대로 깊고 편한 잠에 빠져들었다. (중략)...그게 뭔지 아니?”

윌 :“뭔데요?”

:“네가 어린애라는 거야. 넌 네가 뭘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


호숫가에서 만나기 전, 윌과 다투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숀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인 윌의 상태까지 고민하며 잠에 들지 못하다가 어떤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 해답을 윌에게 들려준다.



윌 :“고맙네요.”

:“당연한 거야. 넌 보스턴을 떠난 적도 없으니까.”

:“내가 미술에 대해 물으면 넌 온갖 정보를 다 갖다 댈걸? 미켈란젤로를 예로 들어볼까? 그에 대해 잘 알거야. 그의 걸작이나 정치적 야심, 교황과의 관계... 하지만 시스티나 성당 냄새가 어떤지는 모를걸? 한 번도 그 성당의 아름다운 천정화를 본 적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난 봤어...”


행위와 행동의 차이처럼, 안다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안다는 것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며, 그 앎의 경험적 상태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은 그 대상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보고 느끼기도 한 것, 덧붙여 체험으로써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있는 것. 즉 완전한 앎의 종결을 말한다.


예컨대 어떤 연예인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연예인 A를 알지만 대부분 알고 지내진 않는다. 보스턴을 떠나보지도 못한 윌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마치 자기 것 인양 선연히 그려내지만 그가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알고 있을 리는 없다. 마치 시스티나 성당의 냄새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진리의 사각지대에서 뜻밖의 진실은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관념적 세계에서는 이러한 앎의 차이가 그나마 덜하지만, 유물론적(사실관계에 근거하는) 입장으로 들어가면 ‘안다는 것’의 이론적 영역과 ‘알고 있는’ 증명된 영역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특히 존재로서만 증명되는 삶이 그러하다.


안다는 것의 영역은 마치 사진과 같다. 중요한 정보를 추려서 보여주지만 시야가 한정되어 있다. 우리가 바라보고자 하는 영역을 분명히 보여주되, 그 풍경의 공간감이나 바람의 청량감 등은 전혀 표현할 수 없다. 알고 있는 것은 그 풍경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것과 같다. 사진으로 접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모든 통제가 해제되고, 우리는 참으로 그 풍경을 알게 된다. 여행이 매력적인 진짜 이유다.



:“또 여자에 관해 물으면 네 취향의 여자들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겠지. (중략)...하지만 사랑카지노 게임 사이트 여자 옆에서 눈뜨며 느끼는 행복이 뭔지는 모를걸. 전쟁에 관해 묻는다면 셰익스피어의 명언을 인용할 수도 있겠지. (중략)...하지만 넌 상상도 못해. 전우가 도움을 요청하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걸 지켜보는 게 어떤 건지.




숀 : (중략)...또한 한 여인의 천사가 되어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어떤 건지 넌 몰라. (중략) 죽어가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두 달이나 병상을 지킬 땐, 더 이상 환자 면회시간 따윈 의미가 없어져. 진정한 상실감이 어떤 건지도 넌 몰라.”


이론의 영역도 그러한데, 하물며 직접 부딪혀야하는 삶의 영역은 어떤가? 삶을 이론만으로 터득할 수 없다. 제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어도,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무리다. 인생의 스펙트럼은 다양하고, 저마다 고유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삶의 통계적인 겉보기는 들여다볼 수 있겠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냄새까지 우리가 맡을 수는 없다. 실로 우리의 인생은 짧기 때문에 모든 삶에 대한 경험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 모든 삶들이 귀중한 배움의 흔적인 것이다. 더 할 나위 없이 부유하고 고귀한 삶도, 더할 나위 없이 천하고 가난한 삶도 모두 나름 인생의 교훈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철학자 니체도 '더없이 천한 것'과 '가장 고귀한 것' 모두를 품었던 것이다.



:“타인을 네 자신보다 더 사랑할 때 느끼는 거니까...누굴 그렇게 사랑한 적 없을걸?”


이러한 삶의 경험들은 거의 확실한 확률로 ‘자신’을 대가로 요구한다. 얻기 위해 포기해야하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심지어 직장, 생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사람들인 우리들 역시 생존을 위해 많은 부분을 포기한다. 그러나 포기된 부분 때문에 우리의 노동과 열정이 가진 값어치가 소멸하는 게 아니다. 분명 그건 나의 소중한 무엇인가를 지키는데 쓰였다.


그러므로 포기된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위해 포기되었느냐가 중요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또한 그렇다.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위해 나를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을 만큼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낮은 곳에서 中


위의 이정하 시인의 시처럼 사랑하는 이를 위해, 혹은 사랑을 알고 싶다면, 잠겨죽을 정도의 각오는 있어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사랑을 얻게 된다.



:“내 눈엔 네가 지적이고 자신감 있기보다, 오만이 가득한 겁쟁이 어린애로만 보여.”


나를 살라먹는 이러한 과정을 겪을 자신도 가지지 못한 채, 누군가가 미리 겪었던 일들만 자신의 것 인양 찬탈하여 체험은 거부하는 것은 그로인해 포기해야할 무언가와 감내된 무엇으로부터 도피하는 행위다. 즉, 겁쟁이들의 전형이며, 그러면서도 이미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오만한 자다.

여기서 잠깐 김연수 소설가가 장석남 시인의 시집에 덧붙인 말을 살펴보자.


“(중략)...번거로운 과정을 피하려면 애당초 사랑하지 않는 게 좋다. 이런 관점에서 사랑을 잃을까 봐 겁을 낸다기보다는 사랑을 잃은 뒤에 거쳐야만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겁내 애당초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무례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장석남「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중


이 평은 다소 격앙되어 있는 편이긴 하지만, 조금 순화해서 생각해도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을 얻기 전과 잃은 후에 얻을 ‘번거로운 과정’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자(자조적인 경향까지)들이란 과연 ‘무례한 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염치가 없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넌 천재야. 누구도 네 지적 능력을 시험할 순 없어. 그런데 넌 그림 한 장 달랑 보곤 내 카지노 게임 사이트 다 안다는 듯 내 아픈 삶을 잔인하게 난도질 했어.”


그런 고로 ‘안다는 것’ 만으로 삶을 단언하는 일은 때때로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진화한다. 안다는 것의 행위로서 상황을 종결짓고 ‘알고 있지’도 못한 채 더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 진실은 왜곡된다. 또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를 향해(혹은 자신을 향한) 분노의 외침으로 바꾸기까지 한다.



:“너 고아지?”


숀은 이런 폭력의 극단을 직접 증명해 보인다. 단편적 지식의 종결은 사건에 대한 연역적이거나 귀납적인 추론도 모두 거부한다. 합리적인 의심 자체가 성사되지 않는 것이다. 도스도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 에서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매춘부라는 낙인을 지고 살아가는 소냐의 발등에 키스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표면적인 수준의 기호를 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앎을 거부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를 숀은 윌이 그러했던 것처럼 너무도 쉽게 재연해낸다. 그만큼 파괴적인, 또한 함부로 행해질 수 있는 게 '겉만 알고 모든 걸 판단하는' 일이다.



:“네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고 어떤 역경을 지나왔는지 '올리버 트위스트'만 읽어보면 다 알 수 있을까? 그게 널 다 설명할 수 있어?”


잔혹하게 편집된 시선으로 윌이 고아라거나, 청소부라는 사실에만 주목하면 윌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기 힘들다. 1심에서 최종판결이 나버리는 셈이다. 그러나 모두 알고 있듯이 정작 고아나 청소부라는 사실이 그를 옥죌 이유 따윈 없다. 과연 윌이 쓰고 있는 껍데기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정의하지 못한다.



:“솔직히 빌어먹을 그따윈 난 알고 싶지도 않아. 어차피 너한테 들은 게 없으니까. 책 따위가 뭐라던 필요 없어.”


숀은 세상의 관점은 지극히 참고적인 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파한다. 만약 사과의 맛에 대해 500장의 논문으로 서술된 기록이 있다면, 그것을 읽고 사과의 맛을 추정할 수는 있으나, 차라리 사과를 먹어보는 것만 못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다.


삶도 마치 사과의 맛과 같은 속성이 있어서, 아무리 좋은 서술과 지식으로 도배한다고 해도 그 삶에 들어가 보느니만 못하다. 게다가 그 서술이 삶을 정확히 표현해 내지 못한다면 더욱 심각한 일이다. 거짓과 위선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세상의 평가나,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재단되어 버린 어떤 굴레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면, 본인이 직접 보여주지 않은 겉치레에 불과한 굴레를 나 자신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선 네 스스로에 대해 말해야 돼. 자신이 누군지 말야. 그렇다면 나도 관심을 갖고 대해줄 거야.”


거짓된 서술로 덧씌워진 내 삶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이를 벗어던지기 위한 시도를 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이가 스스로는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이를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면 그가 알 턱이 없다.


해명이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있어도 좋지만, 조금이라도 억울하다면 적극적으로 이를 해명해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해명하는 방법이란 오직 행동뿐이다. 그럼 결국엔 오해라는 안대를 쓰고 있던 사람들도 당신이 내뿜는 진실의 빛을 볼 수 밖에 없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타자를 대하는 태도를 이와 같이 한다면, 타인들 역시 자신에 대한 앎을 겉보기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지? 네가 어떤 말을 할까 겁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영웅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한순간에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바뀌는 상황을 원하진 않는다. 설령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라 해도 말이다. 또 레옹 편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지나간 자신의 삶을 반추해봤을 때 어떤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자신이 그러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언할 수가 없다.


더구나 형편없는 상황을 지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더욱 인정하기 싫어진다. 특히 방어기제가 항시 작동할 정도로 자신으로부터 멀리 떠난 사람은 더더욱 돌아가기 싫을 따름이다. 떠나있는 동안 또 쌓여버린 경멸스런 자신의 모습은 처음보다 더 견디기 어렵다. 그걸 치우는 일도 버거운데, 덧붙여 새로운 고통까지 감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네가 선택해 윌.”


숀은 여기에 선택지만 던져주고 떠난다. 설령 변혁을 선택하지 않아도 딱히 할 말은 없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혹은 이미 앎의 경지에 있는 사람들을 애써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면, 스스로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는 것은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삶이나 진취적인 삶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윌의 경우처럼 명백히 나아갈 가능성이 있으며, 환경에 대한 비관에 빠져있는 사람, 미래에 대한 갈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처를 다시 수선하고 처음의 위치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빈말쯤이야 아무나 할 수 있다. 실로 그 고통이 크기 때문에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이 두렵다면 하지 않으면 된다. 그 대신 그 공허를 감싸 안고 아무런 불평도 원망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어려울 것이다. 애초에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례한 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이도 마음에 안 든다면 변해야 한다. 파편만 놓고 세상을 관조하거나 파편에 불과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든, 혹은 이 둘을 거부하여 '앎으로서 종결'을 보여주든, 선택은 언제나 놓여있고 자유지만 그 결과까지는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하면서. 그러므로 때론 격려를 위한 희망의 말도 필요하지만, 이처럼 냉정하게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부정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돌아볼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고 무엇을 해야할지 안다고 하면서도 실은 어쩌면 그 누구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모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선택할 시간이다.


어떤 세상의 진리와 철학보다도 중요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