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750. 티포미
새해가 되면 그 해의 띠에 맞춰 발매되는 루피시아의 신년 간지차. 2025년은 뱀의 해로 뱀 사자의 일본어 발음인 '미'를 활용하여 녹차와 홍차 각각 하나씩을 발매했다. 24년이 끝나자마자 개봉했는데 이런저런 일들이 있다 보니 이제서야 시음기를 적게 되었다. 번아웃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여러분. 참고로 12월 초에 주문했고 간지차의 생산을 점점 줄이는 건지 인기가 늘어나는 건지 품절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기분인데 1월 초가 되기도 전에 이미 일러스트 틴은 품절이 떴던 것 같다. 작년 튀어용 날아용은 그래도 1월 말까진 있었던 것 같은데 갈수록 빠른 속도로 품절되는 추세이니 내년차를 구매하실 분들은 이 점 참고. 간지차 구매해야겠다 하던 그날 갑자기 환율이 미친 듯이 오르는 사건이 발생해서 주문을 바로 하는 게 맞나 아닌가 이틀정도 고민했었는데 진짜 못 구할 뻔했다.
티 포 미는 나를 카지노 게임 사이트 차, 혹은 뱀을 카지노 게임 사이트 차로 중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제목이다. 아무튼 올해를 카지노 게임 사이트 차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거친 붓글씨 느낌으로 뱀 사자를 크게 그려놓았는데 앞의 티포의 폰트와 함께 생각해 보면 동서양의 조화 같은 느낌도 들고 그렇다. 여러모로 중의적인 표현들을 녹여놓은 듯.
모모야 망고노 카오리가 토케아우 코우챠. 코코로 미치루 아마이 하아모니이데 하나야카나 이치넨노 하지마리를 요칸사세마.
복숭아와 망고 향이 어우러지는 홍차. 마음이 충만해지는 달콤한 하모니로 화려한 한 해의 시작을 예감하게 한다.
홍차계열로 복숭아, 망고, 오렌지의 달달한 향이 블렌딩 되었다면 트로피컬 한 느낌이 물씬 난다. 하지만 일러스트와는 크게 붙지는 않는 느낌. 뱀 일러스트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조금은 애매한 일러스트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봉투를 개봉하면 약간의 휘발향과 함께 진한 망고향 위주의 열대과일향이 달달하게 올라온다. 기분이 슥 좋아지는 향에 마음이 충만해진다. 진득한 느낌만 빠진 알폰소망고 느낌이랄까. 건엽을 덜어내 보니 예상외의 화려함이 숨어있다. 기본적으로 홍차는 브로큰과 씨티씨가 섞여있고 거기에 핑크페퍼와 오렌지 플라워, 콘플라워의 조화가 다양한 색으로 화려하다. 루피시아가 잘하는 향이고 잘하는 토핑이 들어있는 느낌. 마셔보도록 한다.
별 다른 특이사항은 없어 보여 늘 우리던 대로 우려 본다. 찻잎 6g을 300ml의 100도씨 물로 2.5분 우려낸다. 씨티씨 위주로 점핑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한참 바라보다가 열대과일향의 산미가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찻물을 따라낸다. 겨울에 접하게 되는 신년차인데 느낌은 트라이앵글이나 그레나다처럼 아이스티 전용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오렌지 플라워가 주는 상큼한 향이 그런 느낌을 더 느껴지게 하는 듯하다. 한 모금 마셔보면 정말 많이 마셔봤던 그 맛이 나는데 딱 집어 기억은 잘 안 난다. 작년에 이것저것 많이 마셔서 아무래도 협소한 메모리에 덮어쓰기가 많이 된 것 같다. 기억을 더듬더듬 찾아보니 그나마 비슷하게 떠오르는 맛이 다루마에서 상쾌한 느낌을 좀 줄이고 닝닝 달달한 느낌으로 치환하면 비슷하겠다 싶다. 사실 마실 때마다 이거 뭐였더라의 늪에서 빠져나오질 못해서 차 자체를 잘 즐기지 못하고 있는데 기존 경험을 다 지우고 이야기하자면 깔끔하고 화사한 과일 가향차임에 틀림없다. 망고와 복숭아 가향이 주가 되면서 오렌지 플라워의 블렌딩이 킥을 담당하는 심플한 구성이지만 역시 가격대비 너무나도 뛰어난 루피시아의 퀄리티 있는 가향능력이 돋보인다. 그렇다고 향수처럼 강하게 치고 나오는 과한 향도 아니고 차도 가향도 어디까지나 깔끔하게 딱 정리가 되는 미덕을 갖췄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신의 아이스티 픽으로 이것은 냉침을 강력 추천. 씨티씨가 다량 포함되어 있어서인지 급랭에선 수렴성이 꽤나 날카로운 편이다. 냉침 아이스티에서는 단향이 살짝 죽는 편이긴 하지만 부드럽고 단정한 홍차맛에 망고와 복숭아를 과육 없이 향만 깨끗하게 추출하여 오렌지 플라워향으로 산뜻하게 마무리한 아주 단정하게 화사한 아이스티로 만들어진다.
요즘은 글이 잘 써지지 않아서 차를 아주 많이 마시고 나서야 내용이 채워지곤 한다. 뭐 얼마나 대단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나 어려워하나 싶은 생각을 자주 한다. 사실 시음기라는 것, 굉장히 기술적으로 내용만 채우면 얼마든지 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지난 글들을 주욱 둘러보면 디테일하게 계산하고 고려해서 써둔 내용은 많지가 않다. 충분히 기계적으로 적고적을 수 있을 텐데 이렇게나 될 때 안될 때가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진심이 아니면 이걸 써야 할 이유가 없어서인 것 같다. 그냥 많은 사람들과 이 차를 마시는 마음과 느낌을 공유하고 싶을 뿐이어서 그런 것 같다. 가만 보면 남이 아닌 나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탕비실에서 꾸준히 차를 마시는 이유도 그렇다. 결국은 나를 위한 일. 티포미라는 이름이 자꾸만 맘에 걸린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는데 결국 차를 마신다는 건 나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가 보다. 이렇게 된 거, 올해도 열심히 차를 마셔보겠습니다. 그냥 나를 위해서. 티포미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