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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Mar 08. 2025

*이상한 카지노 게임 2

카지노 게임의 소통을 위하여


카지노 게임에 한자어가 많다보니 한자어에 고유어가 결합할 때가 많고, 그때마다 어색한 일이 잦다. 많이 알려진 말이지만 ‘驛前(역전)앞’이란 말은 前과 앞이 같은 뜻이므로 동의어를 중복시킨 말이다. ‘妻家(처가)집’ ‘喪家(상가)집’ ‘宗家(종가)집’이란 말도 家가 집이므로 마찬가지이다. 말의 정확성이나 효율성으로 볼 때 중복은 바람직하지 않다. 같이 보이지만‘畫家집’은 중복이 아닌데 여기의 家는 집이란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왕 그렇게 굳어진 말은 어쩔 수 없더라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죽은 사람의 사진을 ‘영정사진’카지노 게임고 하는데 생각하면 그리 바람직한 말은 아닌 듯하다. 影幀 이란 원래 ‘죽은 사람의 그림’인데 그것이 초상화의 내력이다. 그림이었던 옛날에도 ‘영정’으로 족했는데 지금에 와서 구태여 ‘영정사진’카지노 게임고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幀에 이미 망자의 얼굴카지노 게임는 의미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사진’을 붙이면 역시 의미의 중복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옛날처럼 ‘영정’으로 말하는 것이 효율성도 좋다.


언제부터인가 ‘임종을 지키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언어의 달인 노벨수상자의 소설에도 나올 만큼 굳어진 말이라서 토를 달기가 쑥스럽지만 바람직한 말은 아닐 것 같다. 이 말은 ‘사람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다’라는 뜻으로 통한다. 연장자나 어른이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키면서 유언을 듣는 행위이므로 ‘-지키다’라는 건조한 말보다는 ‘-모시다’라고 높여 말해야 더 좋을 듯하다. 더 생각하면 臨이란 말에 이미 ‘맞다, 지키다’라는 뜻이 있으므로 ‘임종을 지키다’라는 말은 ‘역전앞’처럼 중복을 면할 수 없다. ‘임종을 모시다’까지 높일 필요가 없는 경우라면 ‘임종을 하다’라고 해서 최소한 의미의 중복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외할머니의 임종’이란 표현도 있었다. ‘외할머니가 죽음’이라는 뜻이므로 구태여 ‘임종’이라기보다는 ‘돌아가심’이 더 좋아 보인다. 가급적 한자어를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전에는 ‘본인의 죽음도 임종’이라고 나와있지만 그런 용례는 매우 드물 것 같다.


고속도로 출구에는 ‘요금소’라고 쓰여있지만 그것도 어색한 말이다. 계산소, 출장소는 ‘셈하다, 출장하다’라는 동사에 접사 所가 붙어서 ‘-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통사적 파생어이다. 그러나 ‘요금’은 명사이기 때문에 같이 앞처럼 所가 붙을 수 없다. 은행소, 시장소. 평화소란 말이 없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요금소는 ‘계산소’라고 해야 옳건만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자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면서 나타난 일종의 언어혼란 현상이다. 이런 현상들을 학계나 언론에서 우리 언어의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간과한다면 갈수록 카지노 게임이 무질서해질 것이라는 걱정에서 하는 말이다.


또 하나 걱정되는 일은 카지노 게임 한자어 중에 상당수가 일본식인데 본래의 뜻이 왜곡되는 일이 많아서 문제이다. 空港이란 말은 비행기가 출입하는 곳인데 이를 글자대로 ‘빈 항구’ ‘공기 항구’라고 한다면 이상한 말이 된다. 野球를 글자대로 하면‘들에서 하는 공놀이’라는 뜻이므로 잘못된 번역이었다. 각서(覺書)를 글자풀이하면 ‘깨닫는 글’이라는 뜻이니 본의와는 전혀 다른 말이 되었다. 납골당(納骨堂)이 ‘뼈를 반납하는 곳’이라면 일리 있는 말이지만 소름 끼치는 말이다. 노견(路肩)은 갓길이지만 글자대로 ‘길어깨’가 되거나 '유기견'이 되기도 하니 이상한 말이다. 대절(貸切)을 ‘빌려 자른다’라고 풀이하면 우스운 일이고, 건축설계구조를 사양(仕樣)이라고 한다면 그 내력을 모를 말이다. ‘법적 제재대상인 사람’을 ‘身柄- 몸자루’라고 한다면 해괴한 말이다. 部落은 일본의 천민촌을 말하는데 우리는 일본이 시키는 대로 마을을 부락이라고 했으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말이다.Hospital을 병원이라고 했는데 그곳은 病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의료시설이 있는 곳이므로 마땅히 醫院(의원)이라고 해야 옳았다. Human을 ‘人間-사회적 동물’으로 번역한 것은 경탄할 일이지만 Freedom을 自由로 번역한 것은 우리한테는 슬픈 일이 되었다. 자유를 한자대로 풀이하면 본의와는 달리 ‘제멋대로’로 통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방종’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뜻도 모른 채 ‘자유 민주주의’를 함부로 남발해서 지금도 사회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언어의 위력이 이러하니 살펴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한번 카지노 게임로 자리 잡은 한자어는 쉽게 없앨 수 없다. 한자어휘가 절대다수인 카지노 게임에서 한자를 일시에 제거할 수 없다면 이를 잘 다듬어 쓰거나 장기적인 계획아래 점차 줄여나가야 한다. 앞에서 든 사례들은 잘못 정착된 한자어를 다듬어 써야 할 경우이다. 그러나 한자를 모르면 다듬기도 어렵고, 줄여나갈 수도 없다. 그럴 수 있을 때까지는 적절한 한자교육이 필요하다. 그러한 노력도 없이 무작정 한글전용을 부르짖는 짓은 소통을 포기하는 만용이다. '물막이'를 차수벽(遮水壁),‘젖은 눈’을 습설(濕雪)이라는 생뚱맞은 한자어를 휘두르는 짓은 反문화적이다. 언어의 혼란은 곧 사회의 불통과 혼란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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