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면 꽤나 성공적인 하루였다. 일 년에 몇 번 있는 중요한 회의. 그래서 긴장도가 꽤 높은 회의도 무난히, 탈없이 잘 마쳤다. 퇴근하고 바로 스타디움에서 마라톤 준비하는 직장동료들과 함께 뛰었다. 걷기와 뛰기 인터벌이 아닌 계속 달리기는 얼마만인가. 숨이 가쁜 만큼, 땀 흘린 만큼 꽤 기분이 개운해졌다. 특히 1분 남기고 빠른 속도로 뛰다가 마지막에 툭 내려놓듯 천천히 쿨다운 하는 시간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이대로는 아무렴 좋아. 음악어플에서 알고리즘으로 선곡해서 들려주는 낯선 노래를 들으며 멀리 내다보며 달리는 카지노 게임, 아무 생각도 들어오지 않도록 생각 비움을 실천할 수 있는 카지노 게임. 그 일정의 끄트머리, 집에 오는 길 운전하는 카지노 게임까지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집에 오니 먼저 도착한 남편이 떡만둣국을 끓여 아이들 저녁을 챙기고 있었고 나도 한참 달려서인지 꼬르륵 배가 고파 한 그릇 떠서 먹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아니한가. 그런데 이상하다. 아이들이 거실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장난도 꽤 재밌게 바라보긴 했는데 정신이 홀라당 어딘가로 빠져나간 기분이다. 손뼉 쳐 줄 기분이 아니다. 말할 기운도 없고 생기도 없다. 달릴 때만 해도 분명 의욕이 넘쳤는데 말이다.
빡빡한 일정에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니 기운도 없거니와 무덤덤하기까지 하다. 달리기로 체력을 소진해서일까? 새 학년을 앞둔 아이들 챙길 생각,매일매일 있는 스케줄, 정해진 약속과 일정들이 생각의 카지노 게임표에 새치기하듯 하나 둘 끼어들어 답답함이 밀려들어온다.
그냥 드러눕고 싶은데 이렇게 그대로 이불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면 구멍이 송송 나있는 하루를 그대로 마감하는 느낌이다. 연체된 도서관 책이라도 반납하러 가야겠다. 고백하자면 핑계다. 그저 혼자 있고 싶은 거다. 피곤이 밀려왔지만 아이들 숙제검사하고 공부거리 챙겨주고 혼자 나서기로 한다.
딱 한 명만 데리고 갈까? 아이들을 몽땅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일종의 면피용 꼼수부리기다. 한 명만 데리고 가서 같이 책 읽을까 슬쩍 던졌는데 세명 다 따라나선단다.
오, 말도 안 돼! 그냥 집에 다들 있어라. 이따 숙제검사나 하련다. 이것들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뭐 했나.잔소리도 귀찮아 돌아선다.
차를 끌고 갈까 하다가 밤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다시 찾아온 밤길. 걷기를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다. 아직 쌀쌀하긴 하지만 곧 봄이 오려나. 바람이 한 풀 꺾여 찬 기운을 잃은 느낌이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길었다. 마음이 많이 출렁거렸고 쉬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왜 항상 벗어나고 싶은 걸까?
나는 무언가를 앞두면 불안도가 아주 높아지곤 한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엔 회의를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들로 잠을 못 이루긴 했다. 시나리오가 잘못되고, 회의가 엎어지는 그런 악몽을 꾸기도 했던 것 같다. 카지노 게임이 흘러가면 자동으로 먹게 되는 나이 덕분에 여차저차 어른은 되긴 했지만 어른 아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실수하고 부족하다. 언제쯤 단정하고 차분한 똑순이 어른이 될까?
돌이켜보니 몇 달 전부터 일주일에 꼬박 세 번 이상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예전엔 일주일에 하루, 몇 카지노 게임만 혼자 있어도 충분히 만족했는데 조금씩 조금씩 빈도가 잦아졌다. 더군다나 아이들로 집안이 시끌벅적하면 혼자 있을 수가 없으니 어느 때부터인가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원래 사무실에서도 잘 웃고 말도 많은 편인데 퇴근하거나 주말이 되면 말없이 집에만 있고 싶은 성향이다. 혼자 집에 있는 카지노 게임, 고요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카지노 게임이 늘 곁에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생긴 이후로 집이라는 곳이 고요한 공간, 나만의 공간이 되는 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이었다.
심지어 아이들과의 특별한 카지노 게임을 위해, 하나라도 더 경험했으면 하는 마음에 인터넷의 보이지 않는 엄마들과 경쟁하며 리스트를 만들고 이곳저곳을 나다녔다. 소란스럽고 유난 떠는 엄마였다. 기쁘게 그 카지노 게임을 보냈는데 십 년이 넘도록 이러고 살다 보니 조금씩 지쳐갔던 것 같기도 하다.
번아웃이 온 것인가? 아니면 홀로 있는 카지노 게임의 기쁨을 너무 달콤하게 맛본 것인가? 오래전 내게서 멀어져 간 것들, 조금씩 잃어버린 것에 시선이 가고 마음이 옮겨 가기 시작했다.
책을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더 걷고 싶어 멀리 돌아가던 밤. 차갑지 않은 공기 속에서 마음이 살랑살랑 가벼워지는 순간,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때, 시골집 대청마루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 잠 깊이 들었다가 깰 무렵, 완전히 깨지는 않고 이곳과 저곳을 오가며 혼미해질 무렵, 보드라운 바람이 사르르 나를 훑고 지나갔다.
바쁜 일도, 해야 할 숙제도, 재촉하는 이도 없는 한가로운 평일의 오후. 약속 하나 없는, 아무래도 좋은 그런 날, 내 인생에 나만큼 중요한 사람은 누구도 없었던 그날 내게 선물처럼 불어오던 바람, 그 시절의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새삼 궁금해지는 밤.
마음의 불순물을 고운 체에 거르듯 정리하고 조금 더 단순하게 살고 싶은 날들.
우울하고 혼란스러운 이 카지노 게임을 외로움과 잘 버무려 그저 그렇게 별일 아닌 듯 지나가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과 함께하는 매일매일에 감사하며, 아이들에게 한 번 더 웃어주고, 한 번 더 보듬어주며, 또한 남편에게 다정한 목소리를 건네는 나로 설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이 카지노 게임을 지혜롭게 지나고 나면, 나만의 카지노 게임과 엄마이자 아내로서의 카지노 게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날도 오겠지.
바라건대, 그 사이에 혼자 동굴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게 되는 일은 없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