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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2

1.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올파의 딸들은 튀니지에 거주하는 올파와 그의 네 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첫째와 둘째 딸은 IS에 가담하기 위해 떠났고, 남은 셋째와 넷째 딸은 비극 속에서 어머니와 살아간다. 이렇게 카지노 게임의 줄거리를 서술하면 특별한 소재가 있을 뿐 이 카지노 게임의 형식적 특이함은 잘 감지되지 않는다. 다큐-픽션으로서 <올파의 딸들은 올파와 두 딸에게 자신들의 과거를 연기할 것을 주문한다. IS에 가담하고자 집을 떠난 다른 두 딸은 배우의 연기를 통해 재연된다. 다큐멘터리에서 재연은 단순히 지나간 사건을 촬영하지 못했기에 다큐멘터리적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다. 재연은 지나간 사건 이미지의 재생산일뿐 아니라 그 자체로 특정한 관점을 가진 채 과거를 복기하는 것이며, (빌 니콜스를 따라 말하자면) 원본과의 지표성을 잃어버린 채 근접성만을 가진, 여타 다큐멘터리 이미지와 구별되는 '환상적 주체(fantasmatic subject)'를 생산한다. 이를테면 박찬경의 <만신에서 세 명의 배우(김새론, 류현경, 문소리)를 통해 재연된 김금화 만신의 모습이 다큐멘터리적 촬영의 결과물로 재현된 모습과 간극을 갖게 되고, 카지노 게임는 그 이미지들의 간극 자체를 질료삼을 수 있다. 그것의 극단적인 성공사례라면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이 있을테다. 타자가 아닌 자신이 직접 자신을 재연하고, 원본이면서 모사인 이들의 연기는 실제 사건과 그것의 재연 사이의 시간적 지연을 통해 비판적 거리와 복잡성을 갖는다. 그것은 재연된 기록으로서 아카이브로 기능함과 동시에 과거와 현재 사이를 재설정하는 행위다. 마흐발마프의 오토바이를 탄 사브지안을 담아낸 <클로즈업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마흐발마프의 신상을 도용했던 사브지안의 과거 행위와 지금의 이미지 사이에 새로운 의미관계를 창출한다. <올파의 딸들이 수행하고자 하는 것도 그것과 같다. 다만 이 카지노 게임는 하나의 극카지노 게임처럼 느껴지기던 <클로즈업과는 다르다. 이 카지노 게임는 이들이 연기를 수행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 것을 넘어, 메이킹 필름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촬영 과정 전반의 기록들을 끌어들인다. 자신의 과거를 연기하던 올파와 딸들은 감정이 북받쳐 울음을 터뜨리거나 계획된 것을 벗어난 행동을 한다. 그들의 연기는 다큐멘터리에서의 재연이라는 맥락을 벗어나 연극치료에 가까워진다.정해진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행위성을 체현(embodiment)하고, 그럼으로써 과거의 자신을 타자화하고 거리를 둠과 동시에 현재의 관계 위에서 그것을 재설정한다. 물론 <클로즈업에서와 같은 극적인 만남은 없지만, <올파의 딸들은 이를 통해이슬람 사회에 내재된 여성혐오와 가부장제, 종교 원리주의의 폭력성이 한 가정을 어떻게 갉아먹었는지 그 과정을 낱낱이 까발린다. 그것은 '너'의 이야기로 전제되는 형식이 아니라 '나'가 '너'가 되어보거나 '나'와 '너' 사이 공간을 창출해내는 재연 형식이 가능케 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2. 윤성현의 최고작은 <뉴토피아다. 만우절 농담이 아니다. <파수꾼이라는 수작과 <사냥의 시간이라는 범작은 윤성현이 그려내는 세계가 지닌 매력과 한계를 두루 드러낸다. 전자의 경우에 영원히 철들지 못할 청년의 시간 속으로 뛰어든다면, 후자의 경우엔 그것을 세계 자체로 펼쳐내려다 실패했다. <뉴토피아는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지난 10년 사이 한국카지노 게임 안에서 너무나도 익숙해진 장르를 경유한다. 아포칼립스는 그 자체로 예견된 미래를 파괴하고, 여느 언데드 몬스터가 그렇듯 좀비는 그들을 더 이상 나이들지 않게끔 한다. 그러니까 좀비 아포칼립스는 더 이상 철들지 않아도 되는 세계 그 자체다. 장르적인 틀 안에서만 고유하게 작동할 수 있는 이 세계는 한국(혹은 서울)의 열화판 미니어처다. 좀비가 언제나 은유해 온 자본주의 노예라는 속성은, 좀비에 물린 사람이 술을 마시면 감염이 늦춰진다는 기이한 설정으로 변주된다. 배달노동을 위한 백팩은 생존의 도구임과 동시에 죽음의 원인이고, 안전한 공간 바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창-스크린에서 벌어지는 유희의 대상이 된다. 계엄령, 비행기 추락, 압사사고 등의 장면은 그 의도와 관계없이 우리의 현재를 소환한다. 국내 좀비 장르물 중 유례없을 고어와 죽음의 향연은 전기톱을 든 (모에한) 지수나 벨리곰 코스튬을 입고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박정민처럼 상반되는 이미지와 공존한다. <뉴토피아에서의 윤성현은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 박살나고 뒤틀렸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3. 탄핵선고일이 드디어 고지되었다. 금요일에는 오전이지만 그래도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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