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화재 사건 속 두 노인
현정이는 두려움에가득 찼다. 현정은 숨 막히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저 어둠 속으로 달아나기로 결정했다. 순간이었다. 현정은동생 연이의 작은 손을뿌리쳤다.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작은 골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현정이 가진 두려움의 크기만큼빌라 지하에 떨어진 현정이 쥐불깡통의불길도커가고 있었다. 금세 어두웠던골목길이 환해졌다. 달빛보다 밝아진 불빛에 쥐불놀이를 하던 아이들과 지나가던 행인들이 하나둘씩 빌라 앞으로 모여들었다.
빌라 앞에는모여든 사람들이 내는 웅성 웅성 소리만 날뿐그 누구도 불길 속으로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시간은 흐르고 불길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저 불길은 자신이 태워 없앨 수 있는 곳으로 불꽃을 뻗어 가면서크기를 키워나갔다.
"어머, 어머나. 저거 뭐야, 빌라 지하에 불났나 봐. 어떡해. 어떡해. 더 커지기 전에 119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몇몇사람들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공중전화를 향에 달려갔다. 누군가 공중전화로 달려가 119 버튼을 눌렀다.차가운 늦겨울 바람이 골목길을 감싸고 있었지만 쥐불이 일으킨 불길로 공중전화 안까지 매캐한 연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게 뭐다야. 어서 비켜요.비켜. 비켜."
타닥타닥 화르르 불길 소리를 짓이기는칼날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우렁찬 목소리에 누군가 싶어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응시했다.
누군가자신의 몸집만 한 솜이불을 들고 빌라로 돌진하고 있었다. 솜이불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솜이불 보다 솜이불 안에 흡수된 물이 더 많은 듯한 모양새다. 커다란 솜이불에 얼굴이 가려져 있었기에 다들 까치발을 들고 솜이불 덩어리를 요리조리 보기 시작했다. 작은 체구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품 안에 있는 솜이불 뒤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갈 길을 찾고 있었다. 할머니 품에 안긴 솜이불은너무 많은물때문에몸을 축 늘어뜨린 채 뚝뚝 물을 흘려내고 있었다.
"어서 비켜요, 끌 사람 없으면 내가 끌꺼유, 빨랑 빨랑 비끼쇼오~"
빌라 지하로 돌진하는 할머니를 본 사람들이약속이나 한 듯하나같이 갈라지면서길을 만들었다.
하늘의 동그란 달이 할머니의 얼굴을 비추었다. 달빛과 함께 타오르는 불덩이도 덩달아 할머니의 얼굴을 유난히 밝게 비추었다.할머니 얼굴에 노란빛과 붉은빛이 교차되었다.
분선씨였다. 분선씨머리는이미 반 정도 하얗게 세었고, 숱이 많지 않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청록색 비녀를 찌르고 있었다. 분선씨 이마가 노랗고 붉은 불빛에 유난히 반짝였다. 분선씨 얼굴에 짙게 드리워 있는, 나이를 보여주는 주름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연륜을 느끼게 했다. 분선씨가 입고 있는 옷은 절에서 입는 회색 절복 차림이라 마치 도사님을 연상하게 했다.
"엄마, 산에서 내려온 도사 할머니인가 봐."
엄마 손을 잡고 불구경하던 다섯 살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분선씨손에는물에 축축이 젖은 솜이불이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물에 젖은 솜이불로 빌라 지하에서 커지고 있는 불덩어리를덮어끄려는 계획인 듯싶었다.
"누가 좀 도와줘유~."
빌라 지하로 들어간 분선씨혼자서는 무거운 이불을 쫙 펴서 불길을 덮기 역부족이었다. 분선씨는 고개를 휙 젖히며 목청을 높여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불길이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어떻게 해, 어떻게라는 이야기만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오히려 구경하던 사람들은
"어르신, 위험해요. 나와요. 나와. 그러다 죽어요"
라고 고함을 치며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쪽에서는 "할머니, 소방차 기다려요."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불길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분선씨도 곧 소방차가 온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때가 늦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모든 일이란 그런 것이었다.
분선씨는 안 되겠다 싶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툼하고 새까만 패딩을 입고 서있는 할머니라 하기에는 좀 젊어 보이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날카로운 눈빛과 비대한 몸집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때 달러할머니와 분선씨 눈이 마주쳤다.
"거기 거기 검은 패딩 입은 할머니!!이리로 좀 오슈, 이것만 들어주면 된당께.어서유~ 어서유~"
분선씨가 별일 아니라는 듯 달러할머니를큰 소리로불러 세우기 시작했다. 달러할머니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자기도 모르는 사이 발걸음이 분선씨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달러할머니가 계단을 내려오자 분선씨가 불이 타오르는 쪽으로 내려갔다. 분선씨가 달러 할머니를 바라보았다.야!너도 할 수 있다는 눈빛을 보내며 달러할머니에게 이불 귀퉁이를 건넸다.
"이걸 잡아유우."
분선씨와 달러할머니가 이불양구퉁이를 동시에잡자 공중에 커다란 네모가 만들어졌다.
"지금이에유우. 덮어유~."
분선씨가 소리쳤다.달러할머니는 분선씨의 구호에 따라불길위에 푹 젖은 솜이불을 덮었다. 분선씨는 불길이 두툼한 솜이불로 덮이자 그 위를 신발로 지근지근 밟기 시작했다. 달러 할머니도 아래로 내려가 이불을 발로 밟았다. 치솟던 불길도 두툼한 솜이불로 덮이자 어찌할 수 없이 사그라들었다.점점 커지던불길은솜이불속에서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휴우, 고생했어유. 도와줘서 고마워유. 다음에 즈이 집에 오셔서 밥한끼해유."
분선씨가 약간 그을린 얼굴로 달러할머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분선씨는 달러할머니에게 연신 고맙다고 했다. 분선씨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요 앞에 시험지 배달하는 금옥이 엄마라고 소개했다.
그사이소방차가 도착했다.작은 골목에 사이렌 소리가 가득 찼다.두 할머니의 투혼으로 빌라 지하 불이 꺼지자 지켜보던 아이들과 사람들은박수를 쏟아냈다.
분선씨와 달러 할머니가 밖으로 나가자 소방차가 빌라 앞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좁은 골목에 커다란 소방차가 유달리 거대하게 느껴졌다. 소방관이 분선씨와 달러 할머니에게 뛰어 다가왔다.
"어이쿠, 어르신. 큰 불로 번질 뻔했는데 감사합니다. 다행히 큰 불로 번지지 않고 잘 잡혔네요."
소방관의 이야기에 분선씨가 쑥스러운지 머쓱하게 말했다.
"아니여유, 이 할미가 도와줬지유. 신상님, 고생이 많아유. 저희집 이불 이제 가져가도 되겠지유?"
분선씨는 불길을 잡느라 시꺼멓게 변한 솜이불을 네모나게 접었다. 시커먼 솜이불 뒤로 울긋불긋한 빨간 장미가 곱게 수놓아 있었다. 달러할머니는 자기 몸 만한 솜이불을 안고 집으로 들어가는 분 선씨를 바라보았다.
"대단한 노인네야."
달러할머니는 코끝이유난히간지럽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손등으로 코를 쓱 닦자 코 안에서 시커먼 그을음이 묻어 나왔다.
현정은 뭔가 큰 일을 냈다는 생각에 골목 깊숙이 달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이지만 건물 벽 쪽으로 작은 길들이 나 있었다. 어른들은 지나갈 수 없고,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만 지나갈 수 있는 너비의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현정은 큰 골목길로 달리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작은 샛길로 몸을 숨겼다.
"헉헉. 어떡하지?"
현정은 벽과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통로를 천천히 지나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불을 냈으니 이제 경찰서로 잡혀 가는 게 아닐지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자신이범인인 줄 아무도모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쥐불을 빌라에 던지고 뒤돌아 도망 나오면서 마주쳤던 달러 할머니가 기억이 났다.날카로운 눈빛. 달러 할머니가 자신의 행동을 봤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현정의 몸이 다시 차갑게 얼기 시작했다.
현정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아갔고, 현정의 걸음걸이도거미줄처럼 이어진 벽과 벽 사이의 길을 계속 따라갔다.
'이제 나도 경찰서에 가는 걸까? 아빠가 경찰서는 나쁜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고 했는데... 이제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오빠도 못 보는 것인가? 그러기에 내 나이는 너무 어린데....'
그렇게 한참을 걸어 벽과 벽 사이의 길의 끝에 다다랐다. 벽에는 아이들이 수없이 그려놓은 낙서와 만화로 가득했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그림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구름에 가려진보름달이 떠올랐다. 둥근 보름달이 까만 하늘 위로 찬란하게 떠올랐다. 현정이가 서있는 작은 거미줄 길에도 한줄기의 달빛이 들어왔다.
'달이 떴네.'
현정은 달빛을 바라보며 제발 경찰서에 가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달빛이아이들이 써놓은낙서를 비추온라인 카지노 게임. 누가 그려놓은 만화인지 하나하나 읽다 보니현정은 눈물이 마르기 전에 피식 웃음이 났다.그때 누군가 벽에 써놓은 글자 하나가 현정의 눈에 들어왔다.
'나는지난밤 네가 한 일을이미 알고 있다.'
그 글을 읽자현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진정이 되었던 마음이 다시걱정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숨겨도 숨길 수 없는 것이라면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달빛의 힘일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현정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용기가 생겼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정은 거미줄 길을 막고 있는 벽 쪽을 더듬어 구멍을 찾았다. 아주 작은 구멍 사이로 몸을 빼내 슬며시 거미줄 골목을 빠져나왔다.
"현정아!"
자전거가 끼익 멈추는 소리와 함께 금옥 씨가 현정이를 불렀다. 마침 집으로 돌아가던 금옥 씨가 쥐구멍에서 나오던 현정이를 발견한 것이다.
갑작스레엄마를 보자 현정은 순간 멈칫했다. 사실 이미 자전거가 끼익 서는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현정의 마음은 두근두근 요동치고 있었다.
'혹시 엄마는 이미 내가 한 일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빌라가 다 불타서 나를 경찰서에 데리고 가려는 것은 아닐까?'
현정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어서 도망간 후,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엄마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 것인지. 현정이는 우선 엄마 표정을 살폈다.엄마 금옥 씨의 얼굴을 살피니반가운 표정이 전부였다. 엄마 금옥 씨표정으로 봐서는 아직 빌라 화재 사건을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현정아, 어두운데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금옥이는 현정이가 밥은 먹었는지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말을 꺼내다 오늘이 정월대보름인 것을 생각해 냈다.
"아하, 현정아. 오빠랑 동생이랑 쥐불놀이 했니? 연이는 어디 있니? 오빠 호랑 같이 있는 건가?"
금옥이는 아이들도 없는 골목길에 현정이 혼자 있는 것이 여간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금옥은 자전거를 끌고 현정이와 나란히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금옥 씨와 현정이의 뒷모습을 둥근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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