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기타를 처음 만져본 것은 17살 때였다. 왜 갑자기 기타를 배우려 했는지는 모르겠다. 여자를 꼬셔보려고 그랬는지,아침이슬을 연주하고 싶어서였는지,아니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중차대한 이유라도 있어서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명확하지 않다. 한동안 스트로크를 연습하며 손끝마다 굳은살이 배겼을 때 나는 아르페지오를 넘어 하이코드에 익숙해져 있었다. 악보를 보면 코드 표기가 없어도 어지간한 곡은 연주할 수 있었지만 가장 좋아하던 것은 로망스 코드를 잡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다. 기타의 1번 낱줄을 튕길 때의 쨍한 소리에 나는 마치 영혼이 사방으로 분산되는 듯 잠잠해졌다. 어떤 때는 공연히 눈물이 났다. 내 지나친 과대망상을 숨죽이게 하는, 오늘날의 그리움을 대변할 만한 이유 중 하나였지만이렇다 할 특별한 이유도 없이 기타를 놓은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때 내가 왜 기타를 놓게 되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또 왜 눈물이 났는지, 로망스 선율이 슬퍼서였는지 1번 줄의 쨍한 울림 때문이었는지는 정말이지 알 수 없다.
집 앞의 구멍가게를 단체로 습격했을 무렵의 일이다.어느 추운 겨울날, 엄마는 내게 극장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동생들을 데리고 불광극장 앞으로 나오라 하셨다. 예전엔 왜 영화를 보여준다는 말을극장구경이라는 말로 대체했는지아리송하지만 어쨌든시간에 맞춰 동생들을 데리고 극장 앞으로 간 적이 있다. 전혀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극장 앞에 도착한 우리를 반긴 건 바로 앞 도로에좌판을 깔고 노점상을 하던 엄마의 목소리였다. 생각만 하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실제로 나는무척이나당혹스러웠다.한겨울 노점상을하는엄마의 모습,길바닥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늘어놓고 우리를 부르며웃던 엄마의 얼굴은 너무나 생경한것이어서 일순간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기도 했던 것 같다. 막내는 내 손을 잡고 있었지만 누이동생은 벌써 멀찍이 떨어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누이를 향해 작은소리로네가 이러면 엄마 마음이 어떻겠냐며 조용히 달래던 오빠도 사실은 누군가 달래주었으면 싶었다. 왜냐하면 엄마에게 다가가 애써웃으며밥은 먹었는지 춥지는 않은지 묻는 내 목소리가 자꾸만 작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괜찮다며 극장 관리인아저씨에게 우리를 인사시켰고 아저씨는 웃으며 우리를 반겼지만 영화는 좀처럼 보고 싶지 않았다.몇 번이나 사양하던 우리는 극장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면서도자꾸만 길거리의 엄마를 뒤돌아보았다. 영화는 한없이 슬펐다. 눈가에 땟구정물이 잡히도록 울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앞에서우리를 기다리던엄마는 오뎅을 사주셨다. 오뎅을 먹으면서 또 연신 눈물이 났다. 영화가 슬퍼서인지 아니면 엄마에게 미안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뎅국물이 너무 뜨거워서였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영화의 제목은 '엄마 없는 하늘 아래'였다.
왜 당신을 좋아하게 내버려 둔 거죠?우리가 헤어지던 날의 내 마음은 미필적고의가 분명했는지도 모른다. 이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을 보았을 때부터 나는 이미 그녀가 나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속으로 오늘 저녁 이 세상의 사랑 하나가 또 시드는구나 싶은 무기력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아무 말도 없이 백치 같은 표정으로 멀뚱하게 앉아있던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도대체 당신은 왜 내 인생에 끼어든 거죠? 눈물이 터질 것만 같은 두 눈을 바라보며 나는 끝내 서툰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문득 눈앞에서 섬광탄이 터진 것도 같았지만 잠시 후에는 집에 가고 싶다는마음이 들기도 했다.아찔한 심정이었지만침묵하는 것이 더나을지도 모르겠다는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잠시 후 그녀가 떠난 카페에 혼자 남은 나는 슬픈 것도 같고 배가 고픈 것도 같은 마음으로한참 동안을 내가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 가만히 곱씹어야 했다.그때 나는 아마도 틀림없이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고 그녀와 함께라면 생의 보완책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당시의 미숙한 우리는 매일 조금씩 더 슬퍼져서 나중에는 그런 것들이 거대한 대형 매립지의 쓰레기더미처럼 쌓여갔다. 그다음부터는 뻔했다. 아니 뻔뻔해졌다. 내가 그때 왜 그녀를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는지, 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지는 정말 모르겠다.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정말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뭐 언제는예측이 맞았던 적이 있던가.집으로들어가기전,우동집에들러뜨거운국물을 마신것과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는 것만이명백한 사실이다.
술을 마시다 보면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리가 길어질 때가 있고 막차를 걱정해야 하는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과 그렇게 먹고도 이상하게 배가조금씩 고파진다는 사실을 술꾼들이라면 알고 있다. 동료들과 늦은 술자리를 파하고 나서는 길목에 매복처럼 숨어 카지노 게임을 파는 포장마차는 그래서 지나치기 힘들었다. 그날도 술판이 끝나고 몇몇이 전절을 타러 가는 길이었는데 장충동 태극당 과자점 앞 도로에 즐비한 포장마차에서오뎅을 파는 집이 눈에 들어왔고일행 중 두어 명이 홀린 듯 들어가 오뎅을 몇 개 집어먹으며 장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계산을 치르기 위해 얼마죠? 하고 묻자 할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알아서 주세요. 참 어려운 말이다. 잠시 머뭇거리다 만원이면 오뎅값보다는 후할 것이란 생각에 지갑에서 돈을 꺼내드렸더니 뭘 이렇게 많이 주시냐 하면서도 사양 않고 받으신다. 그다음 주도 또 그다음 주도 똑같았다. 그냥 알아서 주세요. 그러면 나는 또 알아서 만원을 드릴 때도 있고 기분이 좋은 날은 이 만원도 드렸던 것 같다.오뎅국물이 그렇게 하는 것인지 오뎅을 보면 엄마 생각이 나는 것인지는모르겠지만, 아무튼.어떤 날엔 슬그머니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주기도 하셨는데 잔뜩 술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지만 매정하게 그걸 사양하지 못한 나는,아유 뭘 또 이런 걸 주실까, 하며 부담 없이 알아서 마시고 알아서 값을 치렀다. 몇 년 후 태극당 앞 포장마차 거리는 작은 공원이 들어섰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카지노 게임을 파는 할머니를 만날수는없었지만 이따금씩 생각이 나긴 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항상말하던 '알아서'의 값어치가 어느 만큼 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카지노 게임집이 사라지고 용케 전철을 타더라도 집 앞 대로변의 길거리 야식들이 다시자극적인 유혹을 해오면 무심히 지나쳐 집에 들어가기란 여간 만만치 않다.그중에서도 우동선생이란 작은 간판을 달고출출한 심야를 저격했던 푸드트럭은 조금쯤 특별했다. 1톤트럭 짐칸을개조해 오로지자장면과우동두가지만팔던 푸드트럭.지친 기차역에서의 허기진감칠맛도 아니고 쓰라린 실연 후의 국물맛도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는 왜인지도 모르게맥없이 끌려가기도 한다.다소 뻔한 레시피에 짐작 가능한 보통의 뻔한 맛이었지만인상 좋은 주인이 내놓는 뜨거운 시간만은 특별했다. 서서 먹어야 했고 찬은 단무지 하나뿐이었지만 거기 트럭 앞에 서서 주문을 하고 혼자 내 것인 뜨거운 한 그릇을 받아먹고 있을 때면 하루의 번잡하던 생각들이 정리되기도 했고 속이 뜨근해지면 마음이 쓰이던 일들도 조금쯤은 모호해졌다. 물론 술이 조금 깨는 것도 같았다.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옆자리 손님들의이야기를 절로 엿듣기도 했고 아무도 없어 혼자 먹을 때는 그것 나름의 뜨거운 고요가 좋았다. 주인은 여전히 인상 좋은 표정이었고 간혹 눈이 마주치면 작게 웃어주었을 뿐 가벼이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마츠오카조지 감독의도쿄 뒷골목을 밝히는 카지노 게임 '심야식당'도 아니고 나카무라 사츠키의 소설처럼 영혼이 빚어내는맛을 짐작할 수 있을 것만같은 '그리움을 요리하는 심야식당'도 아니었지만 조용한 우동선생이 끓여주는국물과 면발은 꽤나 그럴듯했다. 주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손님들의 우스갯소리에 혼자서 슬쩍 웃기도 했고 우울한 이야기를 할 때면들었겠지만 내색이 없었다. 주인이 주문을 받고 면을 삶고 이것저것을 준비하면서 손님들의 그 목소리들을 다 듣고 이해했는지는 조금 아리송하지만.
어떤 기억들은그리움을 구성하는 하나의 단면들이기도 하다. 하지만그때정말몰라서였는지아니면알았었는데기억이나지 않는 건지에 대해서는지금도 간혹 궁금하다.그리고 또이 모든 알 수 없던 일들을 이제는 조금쯤 알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많은 시간이 지났다. 결국기타의 1번 줄을 튕기던 날들과불광극장에서 카지노 게임를 보고 나서도 계속 울었던 이유와나를 떠나던그녀를잡지않았던미필적고의, 오뎅집할머니가 달라던'알아서'의 값어치와 우동선생의 침묵 같은것들도 내 삶의 일부였다는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나는또 미안하지만그때 그 순간왜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을까 하는 식의 일들을 지금도 반복하며 살고 있다.어쩌면그때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쩌면 짐작조차 못한 것 같기도 한그리운 심야처럼.
* 어묵과 가락국수를 굳이 오뎅과 우동이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