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하는 습관
이 글을 쓰면서 적어도 열두 번은 글쓰기를 중단했어요. 한 번은 생선장수한테서 생선을 사려고, 또 한 번은 출판업자를 만나려고, 그다음에는 아이를 돌보려고 글쓰기를 멈췄어요. 그러고는 저녁식사로 차우더 수프를 끓이려고 부엌에 들어갔어요. 지금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다시 카지노 쿠폰 쓰고 있죠. 그런 결심 덕분에 항상 글을 쓸 수 있어요. 이건 마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죠.
<메이슨 커리, 예술하는 습관 - 해리엇 비처 스토의편지 p.232
주방 문을 열고 나오면, 옆으로 돌아앉은 의자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의자의 등덜미를 잡아당긴 틈 사이로 몸을 끼워 넣는다. 군데군데 벌어지기 시작한 합피 모서리 사이로 공기가 훅하고 빠져나간다. 배기排氣 소리는 글쓰기의 시동이나 식사의 시동을 알리곤 했다. 4인용 식탁에 둘러앉은 세 가족 중 두 명이 내 앞으로 얼굴을 나란히 하면, 내 옆엔 한자리가 덩그러니 남게 된다. 그 자리가 온전한 벌거숭이로 남겨지는 일은 한 번도 없다. 빈 의자 위엔 책, 필사 노트, 그리고 성경과 같은 묵직한 것들이 놓여 있다. 바로 위 식탁 공간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책과 펜들 사이로 종잇장과 지우개 가루 같은 것들이 오늘도 쉼 없이 분열과 번식을 한다. 치워도 치워도 금세 너저분해지는 모양새는 어느새 내 의지와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내가 이 자리를 택하게 된 건 자연스러웠지만, 자의는 아니었다. 자리에는 경계가 될만한 표시같은 것은 없지만 내 구역은 갈수록 뚜렷해졌다. 오직 나만을 위한 자리는 주부 전용 좌석 혹은 나의 고정 좌석이 되어갔다.
내가 나의 구역 안에서 무언가에 골똘할 때, 그 안의 나를 불러내는 이들에게는 한치의 미안함이나 거리낌 같은 것이 없다. 노크 없는 방문은 종종 나의 적막을 깨뜨렸다. 드물긴 하지만, 쏟아지는 생각을 글로 감당할 때가 내게도 있다. 소용돌이의 정중앙에 있을 때에는 누군가의 있을법한 부름에 조마조마하기까지 하다. 가족은 늘 그랬고, 가족 외의 이들 또한 그랬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연신 뚜껑을 밀어내며 보글거리는 하얀 기포의 위협이 그랬고, 시도 때도 없이 눌러대는 택배 기사의 초인종 소리가 그랬다. 주방과 제일 가까우면서도 바로 현관을 등지고 있는 이 자리는 어쩌면 타의였다.
하루에 수차례 마음을 다잡고 앉기를 반복해야 했다. 차가운 공기로 채워진 머리는 좀 전의 뜨거운 것의 행방을 알 수 없다. 몇 가지 단어를 단서처럼 엮어가며 스무 고개를 이어가지만 휘발된 생각이 쉽게 잡힐 리 없다. 글은 때때로 애초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의외로 글이 더 좋아졌을 때는 잠잠할 수 있었지만, 막다른 곳에 부딪히면 원망이 향할 곳도 마땅히 없어 나는 카지노 쿠폰 잠잠하고 말았다.
은퇴 후에는 종일 글만 쓰고 싶다는 어느 작가님의 카지노 쿠폰 읽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온전한 내 공간에서 나와 내가 협력하거나 싸우면서 만들어가는 작업. 출근이라는 방해를 거부하고 영감을 제때 붙잡아 둘 수 있는 그 희열의 갈망을 잠시 짐작해 본다.
식탁이자 책상 위에 얽혀있는 숟가락과 볼펜의 팽팽한 대립이 서서히 공존을 받아들이고 있다. 일상과 글쓰기가 본래 한 몸뚱이라고 스토는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육신을 먹이고 영을 배설하는 경계 없는 순환은 처음부터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다시, 카지노 쿠폰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