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카지노 게임은 나처럼 악을 쓰며 울지 않고 우우우우 비둘기처럼 울었다.
카지노 게임은 나처럼 영혼이 아플 때 울지 않고 입술이 아프고 배고플 때 울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나처럼 엉엉 울지 않고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어른이 되어서 카지노 게임은 농담을 툭 던져 가족들을 웃겼다.
카지노 게임과의 첫 기억이다. 카지노 게임의 양쪽 입술 가장자리에서 시작된 입병이 심해져 입술을 거의 다 막아가고 있었다.
카지노 게임은 방에 앉아 우우우우 울었고 오빠들은 사탕을 다디미돌 위에 놓고 방망이로 깨 작아진 사탕조각을 가운데 조금 남은 카지노 게임의 입술 구멍으로 조금씩 밀어 넣어주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나는 앉아서 우는 카지노 게임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 역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는 오빠들처럼 입병의 처치 방법을 알 리 없었다. 삶은 혼자 겪어내야 한다는 것은 안타까이 알아가고 있었다. 사탕조각을 입에 넣어주는 정도의 도움만 받을 뿐.
타지에서 장사하던 어머니가 오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카지노 게임의 입술이 거의 다 나아 깨끗해져 있었다. 양 입술 가장자리에만 조금 남아있는 상처에 연분홍색 연고가 발라져 있었고 카지노 게임은 봄볕 좋은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나는 안도했다.
어느 해 겨울에 카지노 게임이 감기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우리의 보호자였던 작은 언니가 약을 외상으로 달라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밤중에 아랫말 약 파는 가정집에 가서 아줌마한테 지금 돈이 없는데 감기약 좀 달라 달라고 삽작문에 어정쩡히 서서 쭈뼛쭈뼛 말했다. 아줌마는 안 된다고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카지노 게임은 끙끙 앓았다.
며칠 후 카지노 게임은 그 감기 끝에서 짙은 비염과 함께 코피를 많이 쏟았다.
카지노 게임은 약 없이 오래 앓고 일어났다.
카지노 게임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공부를 아주 잘해 전 과목이 ‘수’였다.
미술도 잘해 방과 후에 미술 잘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에게 뽑혀 미술도 했다. 나는 짧은 복도 계단의 난간을 잡고 계단을 수십 번 오르내리고 난간 위에서 미끄럼 타며 카지노 게임이 끝날 때를 기다려 같이 집으로 왔다.
작은 언니가 살림을 맡아 하기 시작할 때 카지노 게임이 이학년이 되었다. 작은언니가 예쁘게 옷을 입히고 머리도 예쁘게 빗겨 학교에 보내 카지노 게임은 학교에서 제일 예쁜 학생이기도 했다.
카지노 게임이 초등학교 사 학년 때 우리 가족은 서울로 전학을 왔다.
카지노 게임은 서울에 와서도 공부를 잘해 부반장을 했다.
카지노 게임은 책도 많이 읽었다. 오빠가 금성출판사 세계 위인전집을 우리 집에 온 외판원에게서 사주었는데 카지노 게임은 한동안 그걸 읽었다.
그 책을 다 읽은 카지노 게임은 그 책으로 세계사를 익혔다고 나중에 말했다.
카지노 게임이 인문계고등학교 삼 학년 때 왜 취업반에 들어갔는지 지금도 궁금하지만 묻지 않는다.
카지노 게임은 취업반에 들어가 삼 학년 말에 취업을 했다.
휴일엔 종로에 있는 영어학원을 다녔다. 카지노 게임이 영어공부를 하며 혼잣말을 했다. ‘모든 건 자신과의 싸움이야!’
일로 영어공부로 쉴 새 없이 뛰어다녀 그녀의 입술은 부르트기 일쑤였다.
어느 날 카지노 게임의 월급 때가 다가오자 어머니가 말했다. 공장에서 가게로 들여오는 물건(옹기) 값을 네 월급 받으면 주겠다고 공장 사장에게 약속했다고. 그 말에 카지노 게임은 바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카지노 게임은 대학 공부를 시작했다. 얼마의 퇴직금으로 학원에 다니며, 집에서 EBS TV방송으로 복습하며 공부해 다음 해 전문대 응용미술학과에 들어갔다.
영어 회화 서클에도 들어가 활동했다. 장학금 받으며 차석 졸업을 했다.
미술 공부를 더 하고 싶어 대학에 편입시험을 보았고 합격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자신을 이기기도 쉽지 않지만 상대를 이기는 건 더 힘들다. 더구나 돈이 싸움의 근원이라면.
결혼해 부모님과 같이 살던 오빠가 카지노 게임의 편입을 반대했다.
부모님은 가게에서 벌고, 오빠는 옹기를 가지고 나가 밖에서 버는 수입으로 같이 살아가는, 모든 지출은 어머니의 손을 통해 되는 구조에서 아내와 아들 둘 자기 식솔이 있는 오빠는 억울해했다.
대학에 다니는 딸을 두었다는 자부심이 컸던 어머니였지만 오빠가 반대하니 오빠의 눈치를 보며 그 앞에서 어머니가 더 세게 반대했다. 등록금 못 대주겠다고.
카지노 게임이 대들었다. 밖에 나가봐라, 우리 같은 집이 있는가. 밥은 굶어도 자식들 대학은 다 보낸다. 우리는 밥도 안 굶고 빚도 없고 집도 있다.
그리고 카지노 게임은 뛰쳐나갔다.
그날 밤 나는 오빠가 욕실에서 토하듯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 밤 카지노 게임은 늦게 들어왔다. 자려고 누운 내 옆에 카지노 게임이 누웠다.
불 꺼진 방에서 뒤척이던 카지노 게임이 목 메인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나 등록금 좀 어떻게 해줘!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 역시 출근길 지하철에서 오늘은 누구한테 돈을 빌려 퇴근하나.. 퇴근길 교통비를 걱정하던 때였으니까.
카지노 게임은 편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취업 자리를 백방으로 알아보더니 어린이 미술학원 교사로 취업해 다니기 시작했다.
카지노 게임은 어떤 상황에서든 대가족을 생각했다. 조카들을 사랑했다.
명절 때 모인 많은 조카들을 데리고 학예회를 했다.
카지노 게임은 조카들이 부르는 노래에 맞춰 피아노 반주를 했고 무대는 거실에 붙은, 거실보다 조금 높은 작은 테라스였다.
관객은 우리 대가족과, 명절이어서 부모님을 뵈러 온 외가 쪽 형제들이었다.
올케언니들은 동서들끼리의 질투와 견제로 내면은 복잡했지만 아이들을 한 마음으로 모아주는 카지노 게임의 마음 씀씀이엔 한 마음으로 기뻐했다.
그녀는 조카들의 모습을 늘 사진으로 기록해 두었다.
카지노 게임은 조카들의 공부도 챙겼다. 너무도 어려운 형편에 있던, 초등학교 사 학년이던 큰 조카에겐 같이 방에 엎드려 최소공배수 최대공약수를 가르쳤다. 그 조카 집에도 자주 가서 수학을 가르쳐주었다.
카지노 게임은 미술학원에서 일하며 야간 대학교 영문과에 편입했다.
카지노 게임은 더 넓혀서 혈육을 챙겼다. 어머니가 늘 째려보며 미워하는 작은어머니에게도 어머니의 눈초리는 개의치 않고 자주 찾아가 뵙고 왔다.
카지노 게임은 그녀 친구의 소개로 싱가포르 남자를 만났다.
어떤 외국 남자가 결혼 허락을 받으러 처음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낯섦에 “야 이 도둑놈아!!” 소리쳤다. 내 딸과 결혼하려거든 세례문서를 가지고 오라 했다. 그는 싱가포르로 돌아가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고 일 년 후에 세례문서를 가져와 결혼허락을 받았다.
나와 동갑이기도 한 그 남자는 그렇게 나의 제부가 되었다.
그들은 87년도에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제부가 카지노 게임에게 말했다. 정부아파트는 얻었지만 현금은 40만 원이 있다. 우리 이제 40만 원에서 시작하는 거다.
외로움이 묻어있는 카지노 게임의 편지가 매일 도착했다.
감기를 앓고 있는데 어릴 적 고향집에서 앓던 비릿한 그 비염냄새가 향수병을 치유하는 깜짝 친근함으로 다가왔다고도 했다. 지금 고향집에서 감기를 앓고 있는 것 같아 온기로 아늑하다고.
나도 매일 답장을 써서 보냈다.
단칸방에서 작은 책상을 놓고 앉아서 기어 다니는 내 아가에게 틈틈이 깍꿍, 깍꿍,에비 에비 ! 하며
부지런히 써서 부지런히 보냈다.
돌아보면 그녀에게 매일 편지 쓰던 그때가 나의 귀한 습작 기간이었다.
어느 날은 외로움이 깊이 배어있는 카지노 게임의 편지를 받고 나서 바로 아이를 포대기로 끄려 업고 음악 테이프가게로 갔다.
송창식의 ‘가나다라’가 노래가 들어있는 테이프를 사서 지하철을 타고 우체국으로 가서 카지노 게임에게 보내주었다.
맨 땅을 긁는 마음으로 알뜰히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카지노 게임은 송창식 테이프를 보내주는 데 드는 해외 소포금액을 부담스러워하며 미안해했다.
그 테이프를 매일 반복해서 종일 듣는다고 했다.
더 나중에 말했다. 그때 그 테이프를 얼마나 들었던지 테이프가 늘어졌었다고.
카지노 게임이 입덧을 시작했다.
그들 역시 어렵게 시작한 살림이었으나 한국 김치와, 그녀가 좋아하는 자두 살구가 먹고 싶었다. 사십 년 전이니 귀하고 많이 비싸던 시절이었다.
카지노 게임이 제부와 같이 시장에 나가서 제부의 손을 끌고 과일가게로 가면 제부는 손을 슬며시 빼며 그냥 지나쳐 갔다는내용이 들어있는 그녀의 편지를 받았다.
나는 화가 나서 답장에 썼다. ‘제부한테 전해라. 제부 니가 입덧해라!고’
부모님이 계시기에 결혼 후 그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친정집을 방문했다.
첫 방문 때 공항에서 전화로 말한 내용과 분위기를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바나나 가지고 간다고 히히히히 웃으며 카지노 게임이 더 기뻐 흥분했다. 그때 한국에선 바나나가 아주 귀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나도 같이 웃었다.
선물은 받는 마음보다 주는 마음이 더 기쁜 게 맞나 보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에게 바나나 먹일 생각에 흥분하는 착한 카지노 게임의 마음에 나는 눈이 뻐근했다.
그들은 올 때마다 부모님과 조카들에게 하는 봉투 인사를 빠트리지 않았다. 자기들의 형편 내에서 했다. 결혼 초창기에 올 땐 부모님께 적으나마 용돈을, 조카들에겐 아주 조금씩의 용돈을 주고 갔다.
첫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그녀는 나에게 조카들 좀 잘 살펴달라는 부탁을 나보다 어른처럼 했다.
그녀는 싱가포르에서, 우리는 여기서, 이 집 저 집 다 어렵던 시기였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그러나 부모 곁을 떠날 수 없는 오빠 내외는 정신적으로 미치겠다고 아우성, 한 오빠 네는 극심한 생활고로 죽겠다고 아우성, 한 올케언니는 오빠의 알코올 중독으로 혼자 벌어먹느라 아우성, 한 오빠는 일이 풀리지 않아 답답한 상황.
모두를 사랑하지만 이리저리 그녀도 어찌할 수 없는, 해볼 엄두조차 못 내는 상황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는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그녀의 옆에 앉은 제부는 그녀에게 부모님과 같이 사는 오빠 얘기를 했다. 그 형님은 안 됐지만 그 생활이 부모님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겠더라고.
그녀가 하던 조카들의 사진 기록은 내가 맡아 이어갔다. 집안 행사 때나 명절 때 조카들 사진을 찍어서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카지노 게임이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몇 년 후엔 바닥에서 일어나기 위해 사투에 가까운 절약의 결과로 작은 주택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그 집에서 딸을 낳았다. 카지노 게임은 산후 우울증으로 힘들다고 편지로 말했다.
그녀의 딸이 조금 컸을 때 한국에선 김영삼 대통령의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작됐다. 해외여행 붐이 일었다.
그녀가 우울감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가이드 일을 시작했다.
그녀가 제부에게 자신이 통장관리를 하겠다고 말했고 제부는 카지노 게임에게 통장을 넘겨주며 경제권을 다 주었다.
카지노 게임이 해보니 어려웠다. 그녀는 못하겠다고 두 손 들고 통장을 제부에게 도로 주었다.
그녀는 가이드로 많은 돈을 벌어 돈 관리에 철저한 제부에게 다 주었다.
그들이 부모님을 싱가포르로 초대했다. 제부가 먼저 제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결혼 전 제부가 부모님을 처음 찾아뵀을 때 야 이 도둑놈아! 했던 아버지의 말을 제부는 서툰 한국말로 흉내냈고 이제 맘놓으신 부모님은 크게 웃었다.
카지노 게임은 가이드로 바쁜 중에도 나에게 편지로 권유했다. 아이들 유치원에 보내놓고 나서 도서관으로 출퇴근하며 글 쓰라고.
나는 잠이 많아 졸려서 귀찮다고 했다. 애들 보내놓고 나서 또 자야 한다고.
셋째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한 달 후에 그녀가 왔다.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하는 친정 방문이었다.
그녀에게 언제 어떻게 이 슬픈 소식을전할까. 나는 그 기회만 보았다.
다음날 저녁에 그녀에게 말했다.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을 해야 했다. “셋째 오빠가 떠나셨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그녀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한국에 올 때마다 담배를 사다 주는 카지노 게임을 고마워했고 시장 사람들에게 내 카지노 게임이 외국에서 사다 준 담배라며 자랑했던 오빠였다.
며칠 후에 그녀가 말했다. 결혼해서 싱가포르로 떠날 때 우리 대가족을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생각했었다고, 그런데 셋째 오빠가 제일 먼저 떠났다고.
그녀는 가이드 생활을 칠 년 했다.
그녀가 제부에게 말했다. 가이드 그만하겠다고.
그동안 고생했다며 제부도 동의했다.
엔지니어인 제부는 자신의 월급과 카지노 게임이 번 돈을 저축하고 조금씩 투자도 하며 실수 없이 재산을 늘려나갔다.
간절했지만 이루지 못한 과거의 순간은 잠재의식 속에서 괴롭힌다.
등록금을 기한 내에 내지 못해 편입하지 못한 그때가 수면 중에 현재로 다가와 그녀를 자주 괴롭혔다. 그녀는 종종 흐느끼다가 잠에서 깼다.
카지노 게임은 돈과는 다른 결의 가치를 찾기 위해 둘러보았다.
싱가포르에서 우연히 만난 동창의 아들에게 조건 없이 한국어를 가르쳐주었다. 마음도 아픈 아이여서 표 나지 않게 모자를 도왔다.
한인 성당에서 개설된 한국어 반에서 싱가포르 성인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자원봉사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 그들이 다녀갔다.
그들이 싱가포르로 가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다음 달에 초대할 테니 오시라고. 어머니 건강이 이만이나 하실 때 한 번 더 다녀가시라고.
그들은 약속대로 티켓을 보내왔다. 비즈니스 석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내가 어머니와 동행했다.
그들이 작은 주택에 살 때였다.
우리가 도착한 그날 제부가 말했다. 카지노 게임이 가이드 생활할 때 살림이 벌떡 일어났다고, 카지노 게임이 고생 많았다고, 고맙다고.
제부는 휴가를 내고 우리를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로 여행을 시켜줬다.
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었던 동창에게서 카지노 게임한테 연락이 왔다. 몇 명의 연결을 거쳐 받은 소개로 싱가포르에서 있을 한국 박람회의 통역을 부탁했다.
그렇게 카지노 게임은 통역 일을 시작하게 됐다.
성당 자원봉사 하던 중에 한 학생의 소개로 한국어학원에 면접을 보고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곳 젊은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 그들에게서 카지노 게임이 한국 가수들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들은 아이돌 가수들의 소속사까지도 꿰고 있었다.
그들 중 한국으로 유학 가는 학생도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땐 카지노 게임이 한국의 지인을 통해 숙소를 연결해 편히 지내게 해 주기도 했다.
카지노 게임네는 더 큰 집을 사서 부수고 새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물론 제부가 결정하고 앞장서한 일이었다.
그때는 우리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였다.
형제들이 그들의 집을 방문했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김치를 만들어 가져갔고, 한국의 여러 종류의 과일도 사가지고 갔다. 입덧할 때 살기 힘들어 그녀가 먹지 못했던 자두 살구도 잔뜩 사가지고 갔다.
그땐 한국의 형제들도 생활고의 아귀다툼에서 다 벗어난 후였다. 특히 막내오빠는수 년 전에실직해 있던 겨울에 카지노 게임이 보내준 돈으로 중고 트럭을 사서 맨바닥에서 시작한 양초 공장 사업으로 성공해 있었다.
현금 40만 원으로 시작한 카지노 게임네살림도 확 펴서 좋은 주택과 좋은 차를 가진 단단한 부자가 돼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준비부터 최선을 다했다. 얼음을 채운 아이스박스에 여러 종류의 술을 담가놓았고 미리 짜놓은 계획대로 첫날 첫 저녁식사는 생선 위주로 외식을 했다.
다음 날은 시장을 가서 두리안과 다른 과일들을 같이 사고 새 공원 관람과 쇼핑 등을 같이 했다.
좋은 곳에 가서 식사를 했다. 늘 다른 메뉴로.
그들 집에서 식사하게 될 땐 우리가 가져간 각종 김치와 함께 우리가 찌개도 끓였다. 음식 만드는데 달인인 여자 어른들이 몇 명인가.
넓은 거실에서 한국에서 가져간 마른반찬과 깻잎 등 밑반찬들로도넓은식탁이 풍성했다.
카지노 게임이 한국어학원에 출근하는 날도 있었는데 그 때도 오랜 생활고를 깨고 우뚝 일어서 이젠 거칠 것 없는 여자 어른들이 부지런히 상을 차려카지노 게임에게 밥을 먹여 보냈다.
그들은 시작부터 그랬듯 지금도 생활은 검소하다.
제부는 싱가포르는 날씨가 더워 옷값이 안 들어 좋다고 한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제부는 그들의 결혼식 날 입었던, 너무 오래돼서 앞 단추가 잘 잠기지 않는 양복을 입고 왔었다.
제부는 여전히 구멍 난 티셔츠를 개의치 않고 입은 채 마트에 가곤 한다.
한국은 사계절이어서 옷값이 너무 많이 들어 안 좋다고 제부는 말한다.
카지노 게임은 한국어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법원 통역일도 소개받아 그쪽으로도 일을 했다.
그들의 가족사랑은 깊다. 일찍 혼자된 올케언니의 사위가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조카의 아이들이 어렸다. 그 말을 들은 제부는 여 조카에게 큰 액수의 돈을 보내주었다.
카지노 게임과 제부는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려하지 않는다.
그들의 아들 결혼식에 한국의 가족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며느리 측 부모와 상의해 가까운 가족만 초대해 피로연 식당에 아홉 개의 테이블만 예약했다.
축의금도 받지 않았다.
카지노 게임은 그곳 대학에서도 학생들에게 한국어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제부는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한국행에 동행하지 않는다.
카지노 게임은 부모님 기일에 맞춰 한국에 오면 어른들부터 간난 조카 손자손녀들까지 다 챙긴다.
삼십 년 넘게 오빠의 병시중을 들고 있는 올케언니, 부모님을 오랫동안 모셨다가 먼 길 보내드린 올케언니, 삼십 대에 혼자돼 네 딸을 잘 키워낸 올케언니, 성공했지만 젊어서 생활고를 겪었던 막내 올케언니.
살아내느라 고생 많았던 모든 올케언니들에게 많은 돈을 넣은 봉투를 똑같이 드린다.
내 남편의 생일도 마침 그때여서 대가족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남편의 생일도 챙겨준다.
그래도 돈이 남으면 부모님을 모셨던 넷째 올케언니에게 다 준다.
그리고 말한다.
“일 년 또 빡씨게 일해서 내년에 또 와야지!”
그리고 돌아가 일 년 또 빡씨게 일해 번 돈과 제부가 따로 챙겨주는 여행비를 가지고 우리에게 또 온다.
어느 해엔 그녀가 고등학교 삼 학년 때 취업반에 들어서 교육받고 취업했던, 어머니가 그녀의 월급 타면 항아리 값으로 주겠다고 해 그만둬버렸던 특급호텔에 그녀 혼자서 하루 묵었다.
룸서비스 직원에게 그 시절에 카지노 게임과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대며 그들을 아는지 혹시 이곳에서 임원이 돼있진 않는지 물었다.
직원들은 그 이름들을 하나도 모른다고 했다. 그때로부터 사십 년도 훨씬 넘은 얘기니 젊은 직원들이 그들을 알 리 없다.
그때의 직원이 임원이 됐다 해도 이미 퇴직했을 것이다. 세상에 없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올 때마다 우리는 같이 고향 집을 방문했다. 우리가 서울로 이사 올 때 고향 집을 옆집 순이네에게 그냥 주다시피 했었다.
장사로 나가 계셔 부모님이 안 계신 우리 집을 순이 어머니가 오며 가며 들러 살펴준 것에 대한 어머니의 보답차원이었다.
고향집에 가면 순이 어머니가 고향 반찬과 함께 따뜻한 밥을 지어주었다. 내 고향집에 하는 식사였다. 알타리 김치, 청국장, 나물들..
해외에 있는 카지노 게임에겐 더 특별한 식사다. 아직 남아있는그녀의 향수병이 내 고향집 음식으로 치유하고 돌아가 또 일 년을사니까.
어느 해엔 우리가 하루 자고 가겠다고 했다.
우리 집이었던 이 터에 잘 지어놓은 주택 이층에 묵었다. 우리는 그 방에서 아마 여기쯤이 카지노 게임이 입병으로, 감기로 죽을 뻔했던 건넌방 자리일 거라고 말했다.
카지노 게임이 자기는 죽을 고비 어려서 여러 번 넘겼으니 오래 살 거라 말했고 우리는 조금 슬프게 웃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니 개울에서 올라오는 뽀얀 물안개가 장관이었다. 아 맞아, 우리가 개울 물 위에 임시로놓인다리를 건너 학교에 갈 때 안개가 짙었었지 말했다. 그때도 이렇게 높은 데서 보았으면 장관이었겠다고 말했다.
카지노 게임이 그 개울에서 뭉글뭉글 잔뜩 피어오르고 있는 물안개 사진을 찍었다.
세월이 흐르며 남은 가족들이 한 명 한 명 하늘나라로 떠났다.
오랫동안 부모님을 모시고 잘 보내드린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제부가 부모님을 오래 모셨던 오빠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다고좋은 집을 선물하고 싶다며 고가의 관값을 카지노 게임을 통해보내왔다.큰 액수였다. 어머니 병환 중일 때도 수시로 오빠내외에게 감사를 표했었다.
대학 입학시험 접수 기간이었다.
카지노 게임이 나에게 전화해서 한 마디 툭 떨구었다. "대학 가지 그래?"
나는 그 길로 접수하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녀의 권유로 시작한 사 년의 대학생활이 행복했다.
무사히 졸업을 했고, 졸업의 성취감이 컸다.
늘 부모님 기일에 맞춰 혼자 오던 카지노 게임이 저 지난해엔 아들네 가족과 함께 왔다. 며느리의 뱃속에 있던 둘째까지 함께였다.
카지노 게임의 아들이 그의 어린 자식에게 할머니의 뿌리를 알려주기 위해 앞장서 계획해 이루어진방문이었다.
한국의 대가족과 함께 카지노 게임의 삼대 가족은 산소에 묻힌 우리 부모님, 같은 묘원에 잠들어있는 두 오빠들 산소에 가서 인사를 했다.
그때 와서 가족들의 극진한 대우와 선물을 많이 받은 그녀의 며느리는 싱가포르로 떠나며 말했다. 모두 싱가포르에 꼭 오시라고, 다 오셔도 잘 데 부족하지 않다고, 넓은 부모님 집에서 다 자도 되고, 자기네 아파트에서도 다 자고 되고 또 부모님 집과 자기 집에서 나눠 자도 된다고.
싱가포르에서 카지노 게임네 삼 대가 온다고 큰 차까지 사고 대가족을 진두지휘했던 공장 막내오빠내외에게는 더 고맙다며 특별히 초대의 말을 했다.
오빠는 이렇게 공장이 성공하도록 첫 씨앗을 심어준 카지노 게임에게 제일 고마워했었다.
한정식 집에서 내 남편의 생일식사를 하며, 산소에서, 공장에서 거실에서 춤추며 노래하며.. 모두가 같이 찍은 단체 사진과 동영상이 많건만, 머무는 동안 본가가 되어 짐을 풀었던 막내오빠네 공장 앞에서 한 번 더 찍자고 카지노 게임의 며느리가 말했다.
우리 대가족은 그녀의 요청대로 공장 앞에서 단체 사진을 또 찍었다. 이젠 이별의 단체사진이었다.
그들이 싱가포르로 가서 몇 달 후 며느리는 둘째 아들을 낳았고 일 년 후에 공장 막내오빠는 싱가포르 며느리의 꼭 오시라는 방문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조카들이 자랄 때의 사진들은 각 집 벽에 여러 장씩 걸려있다. 오빠들이 떠난 올케 언니들 집 거실 벽에도, 올케언니의 병시중을 받고 있는 오빠네 방 벽에도.
그녀는 이십 대에 이어가지 못한 그림을 그녀의 주택 담장에 그렸다.
고향 마당의 다알리아와 기생화초도, 동네를 흐르던 맑은 물과 그 안에서 요리조리 빠르게 몰려다니던 작은 물고기들도 거기에 담았다.
초등학교 땐 학교에서 예쁘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유명했고 지금은 그녀가 담장에 그려놓은 그림이 예뻐 동네에선 '담장 예쁜 집’으로 불린다.
나는 그녀의 집 마당에서 거실에서, 이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에서, 강아지와 함께 까르르까르르 웃고 뛰는손자들과 가족들의 동영상을 볼 때마다 중곡동에서 살던 시절에 같이 시청했던 미국의 가정드라마 ‘월튼네 사람들’을 떠올린다. 넓은 전원 2층 집에서 삼대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드라마였다.
그녀는 올해는 빡씨게 일을 안 할 것이고 한국에도 오지 않을 것이다.
제부가 아프다.
제부의 암수술을 마치고 바로 제부와 카지노 게임은 보증인을 세워 유언장을 썼고 공증까지 마쳤다. 재산 분배에 관한 것이었다.
제부가 말했다.
“내 인생에 후회는 없소 무엇보다 좋은 아내를 만나 행복했소.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니 두려움은 없소. 다만 소원이 있다면 고통 없이 가는 것이오. 고통이 온다면 그건 내가 갚아야 할 빚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일 테고 고통 없이 간다면 세상에 지은 빚을 모두 갚았다는 뜻일 거요.”
제부는 사후에 자신을 화장해서 흔적 없이 뿌리라고 말했다. 그 부탁에 카지노 게임과 자식들이 반대했다.
제부는 가족들이 반대하면 지금 여기서 사라져 버리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의 끝에서 카지노 게임도 아이들에게 말했다. 나도 죽으면 너희 아버지처럼 해달라고.
카지노 게임과 제부는 아이들한테 또 당부했다. 자기들이 죽거든 한국 가족에게 알리지 말라고, 장례 치른 후에 가족 밴드에 세상을 떠났다는 한 줄 소식만 올리라고.
카지노 게임은 갑자기 닥친 일에 야단스러워하지 않고 그런 일상과 담담히 손잡고 지내고 있다.
예전에 어머니가 노환으로 자리보존을 시작했을 때 카지노 게임이 메일로 말했었다.생로병사의 순리에 너무 야단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제부는 수술 후 정기검진을 받으며 카지노 게임과 함께 집에서 두 손자를 봐주며 지내고 있다. 제부는 수술 후 직장에 사직서를 냈고 오랫동안 한 몸이었던 고급의 공구류는 열심히 일하는 후배 엔지니어에게따로 만나서 넘겨주었다.
어머니 사후부터는 동행하지 않았던 한국행에,제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다녀가고 싶어 한다. 카지노 게임의 판단으로는 다녀갈 수 있는 건강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카지노 게임은 여전히 나와 작은 언니를 카톡으로 챙긴다.
며칠 전에 단톡방에서 작은 언니가 작은 형부 흉을 봤다. ‘느닷없이 나한테 지랄한다고, 왜 저러나 모르겠다’고.
나는 카지노 게임에게 말했다. 형부가 왜 저러는지 심리분석 좀 해보라고.
카지노 게임이 ‘언니가 혹시 자식 내외 앞에서 형부 무시하는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라’고 했다.
언니가 답을 올렸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고 했다. 자기가 형부 무시하는 말을 자식들 앞에서 했다고.
카지노 게임이 나에게도 말했다. 식구들 있는데 내가 남편한테 꽥꽥 소리칠 때가 있다고. 그럴 때 카지노 게임의 마음이 움찔움찔한단다. 나는 놀라며 반성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나를 살피겠다고 말했다.
스승이라고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다. 동시대를 같이 앓았던, 나 보다 세 살 아래인 카지노 게임이 나의 스승이니까. 더구나 카지노 게임은 우리 구 남매 중에 막내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서 어머니와 싱가포르 방문 때 제부에게서 받았던 CD를 가끔 듣는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때 그곳에서의 더위와 마른 공기, 제부의 세심하면서 깊은 배려가 담긴 접대, 갑자기 쏟아지던 빗줄기의 향내로 마음이 젖는다.
그들이 한국에 오면 대가족이 같이 노래방을 가곤 했는데 그녀는 노래방에서 가끔씩 엄청 웃기기는 해도 다른 형제들처럼 춤과 노래를 즐겨하진 않는다.
노래방에서 그녀는 이 노래 하나만 불렀다. <에레스 뚜
동행해 돈과 여권 등 중요한 것들이 들어있는 빵빵한 허리지갑을 차고 키 큰 제부는 카지노 게임의 노래에 씨익 씩 웃으며 사알 살, 양손을 구부렸다 폈다 하고 돌며 춤을 추었었다. 그의 이상한 고전무용 같은 춤에 우리는 박장대소했었다.
형제들이 한국에서 제부를 한 번 더 볼 수 있을는지...
노래방까지는 못 가더라도.
https://youtu.be/hHZhpRYzWpY?si=q08KOI5R2q_g8g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