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희곡-<여우사냥
<여우사냥은 1994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발표된 이문열 작가의 희곡이다.
비극적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다룬 <여우사냥은 이문열 작가가 문단에 데뷔한 지 17년 만에 처음으로 썼다.
1995년, <여우사냥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 100주년을 맞아 뮤지컬로 공연되었다.
<여우사냥이란 제목은 시해 사건을 일으킨 일본 낭인들의 암호명이었다.
희곡은 을미사변 이후 1894년, 사건의 주범이었던 미우라(삼포오루)의 석방으로부터 시작된다.
힘없는 조선이 청나라, 일본의 간섭으로 무너져가고 있는 시기에 명성황후와 대원군은 쇄국과 문호개방이라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국가의 기강을 세우려 노력한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기존의 관념을 깨고 고종을 사려 깊고 현명한 군주로, 명성황후와 대원군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신뢰하는 모양새로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여우사냥을 통해 “명성황후와 대원군, 고종 등 구한말 역사를 주도했던 인물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이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흥선대원군은 일부러 아버지가 없는 가문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였다. 세도정치라면 이가 득득 갈렸기 때문이었다.
흔히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부르는데 이는 왕비를 후궁으로 하대하는 잘못된 명칭이다. 명성황후는 죽고 난 뒤 고종이 황제에 오른 후 명성황후가 되었으므로 살아생전에는 왕후, 또는 왕비가 맞는 말이다.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1851년 11월 17일 여주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여흥민 씨로 아버지는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6대손인 민치록(閔致祿)이다. 민치록의 전 부인 오 씨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그녀의 생모는 한산 이 씨로 1남 3녀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 남았다.
할아버지 민기현은 예조참판과 개성부유수를 지냈다. 아버지는 정 3품 사도사첨정이었으며 죽기 전 고향 여주에서 선영을 돌보았다. 카지노 가입 쿠폰의 아버지는 아들이 없자 대를 잇기 위해 11촌 아저씨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들였다.
민승호는 흥선대원군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 씨의 친동생이다.
이처럼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인현왕후의 먼 친정으로 가문은 좋았으나 집안은 빈곤했고 묘지를 돌보는 아버지로 인해 여주 산골 민유중의 묘지 근처에서 살았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어릴 때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녀는 <소학(小學), <효경(孝經), <여훈(女訓) 등을 즐겨 읽었는데 특히 역사를 좋아했다고 한다.
9살 때 아버지가 죽었는데 염습(斂襲)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는 아버지가 병으로 누웠을 때 정성껏 간호하는 효녀로 그려졌다.
아버지가 죽은 뒤 가계가 더 어려워진 그녀는 인현왕후의 사가인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살았다. 그러다가 고종의 비로 간택되었다. 그녀가 간택된 것은 아버지가 일찍 죽은 탓에 정치에 참견할 어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866년 고종보다 한 살 위인 16세의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왕비 간택에 참여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안동 김 씨 김병학의 딸이나 김병문의 딸 중에서 배필을 정하기로 비밀 묵계를 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 일로 흥선대원군을 지지했던 일부 안동 김 씨 세력마저 등을 돌리게 된다.
삼간택에서 왕비로 뽑힌 그녀는 3월 21일 운현궁에서 혼례를 치르고 고종의 뒤를 따라 창덕궁으로 들어왔다.
민 카지노 가입 쿠폰가 고종의 정비로 혼례를 치른 첫날밤, 고종은 카지노 가입 쿠폰의 방으로 가지 않고 귀인 이 씨의 처소에 들었다.
당시 15세의 고종은 이미 후궁이 있었고 그녀를 총애했다.
후궁 귀인 이 씨는 고종보다 9살 많은 상궁이었다. 그녀는 궁궐 생활에 답답해하는 어린 고종의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고종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세월을 보낸 지 2년이 지나자 이 씨가 먼저 아들 완화군(完和君)을 낳았다. 고종은 곧 완화군을 원자에 책봉하려 했으나 대원군이 반대했다.
오랜만에 태어난 왕자로 인해 왕실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대원군 역시 첫 손주 완화군을 예뻐하고 이 씨에게 호의적이었다.
한편, 민 카지노 가입 쿠폰도 1871년 꿈에도 그리던 첫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항문이 막힌 채 태어난 왕자는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다. 항문이 막혔으니 뚫어야 살 텐데 신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흥선대원군은 왕자의 몸에 칼을 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대했다.
반면 신문물을 일부 받아들였던 카지노 가입 쿠폰는 강력히 수술할 것을 간청했으나 흥선대원군은 한약을 지어 보낼 뿐 며느리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보낸 한약은 인삼을 달인 것이었다. 먹고 나올 구멍이 없는데 열이 많은 인삼을 먹은 왕자는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하루아침에 아들을 잃은 카지노 가입 쿠폰는 시아버지가 보낸 탕약을 의심했고, 수술을 하지 못해 아들을 잃었다고 생각해 이때부터 흥선대원군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1873년 카지노 가입 쿠폰는 다시 아기를 낳았으나 곧 세상을 떠났고 곧바로 세 번째 임신하여 낳은 왕자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다.
첫째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정에서 고종과 사이가 좋아진 카지노 가입 쿠폰는 시아버지를 몰아내고 고종이 친정해야 한다고 부추기며 민 씨 일가들을 모았다.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자신의 오빠(아버지가 양자로 삼은) 민승호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흥선대원군 집권에 공을 세웠으나 축출당했던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형 흥인군 이최응(李最應)도 끌어들였고 서원 철폐 과정에서 등을 돌리게 된 유학자 세력과도 교류하여 최익현 등을 포섭했다.
최익현은 1873년 10월, 고종 임금이 장성했는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해임당했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최익현의 뒤를 지원하였고 최익현은 곧 당상관인 정 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에 올랐다.
흥선대원군은 더는 버틸 명분이 없자 섭정에서 밀려났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대궐에 마음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운현궁에서 궁으로 바로 통하는 경근문을 막아버렸다.
1873년,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드디어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대원군의 강경한 정책들이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경복궁 중건 등 여러 개혁 정책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고종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고, 자신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여 대원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카지노 가입 쿠폰를 중심으로 한 대원군의 정적들이 고종에게 대원군의 정책 실패와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지적하면서, 고종이 직접 통치해야 한다는 압박을 가한 것도 큰 이유였다. 고종은 대원군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친정을 통해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민 씨 척족이 기승을 부리는 세도정치가 부활했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고종을 뒷받침할 세력으로 민 씨 일족들을 대거 추천했고 고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어느새 260여 명의 민 씨 일가가 중앙요직부터 지방관직까지 모두 차지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산 관리는 다스리는 마을로 내려가 본전을 뽑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다. 이래저래 백성들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했다.
1874년, 폭탄테러로 민 왕후의 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왕후의 친어머니가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일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자 카지노 가입 쿠폰는 이를 갈며 보복의 기회를 노렸다.
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배제한 고종과 카지노 가입 쿠폰는 개화파를 대거 등용했다. 대외적으로 개방 이론을 포용하여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1995년 명성황후 시해 100주년을 기념하는 뮤지컬 <명성황후가 공연을 시작했다. 공연을 시작한 지 30년째가 되는 2025년, 제작사 에이콤은 뮤지컬 <명성황후가 한국 창작 뮤지컬 사상 최초로 국내 누적 관객 2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명성황후는 명성왕후 시해 사건을 중심으로 고종, 대원군 등이 등장해 19세기말 조선 왕실과 국제 정세를 다뤘다.
1997년에는 뮤지컬 본고장인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도 공연했고, 로스앤젤레스, 런던, 토론토 등 해외에서도 선보이며 해외 누적 관객 18만여 명이 관람했다.
원작은 위에서 다룬 이문열 작가의 작품 <여우사냥이다.
명성황후를 본 관객들은 일본인이 우리나라 황후를 시해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아마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절규하는 명성황후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물론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의 정식 군인도 아니고 낭인들 칼에 맞아 죽음을 당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차라리 죽더라도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임오군란 당시 조선인의 손으로 처단했어야 옳았다.
이 글을 쓰면서 사실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역사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문열 작가가 명성황후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쓰려고 노력했다면, 나는 명성황후의 불편한 민낯에 대해 쓰려고 한다. 혹시 읽기 불편한 독자가 있다면 여기서 글을 그만 읽는 것을 권한다.
자료를 조사하고 글을 쓰면서 차라리 쓰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물론 내가 명성황후의 민낯을 밝힌다 한들 그리 큰 반향은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글을 쓰면서 나는 가급적 명성황후의 좋은 면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자료를 읽어보면 볼수록 좋은 면보다는 '정말 이랬다고?' 하며 놀랄 부분이 더 많았다. 그래도 가급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노력했다는 점을 읽는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사실 뮤지컬 <명성황후가 상영되어 흥행하면서 명성황후는 나라를 말아먹은 국모라는 지난날의 오명을 많이 벗었다.그러나 명성황후의 민낯을 아는 사람들은 연극과 연속극 등 대중매체의 왜곡된 진실로 인해 명성황후가 지나치게 미화되었다고 항의성 발언을 하고 있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40세가 넘는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이사벨라 비숍)
“산호와 진주, 그밖에 보석들을 박은 기다랗고 정교한 황금 머리핀이 한두 개 꽂혀있었다. 또 결코 차본 일이 없는 멋진 시계를 여럿 갖고 있었다.”
민 왕후와 자주 교류했던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부인이 쓴 <조선 견문록에는 왕후의 기록은 소박함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쓰였다.
민 왕후에 관한 서양인의 평가는 후한 편이다. 특히 그녀와 4번이나 식사했던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왕후가 시베리아와 일본 철도의 건설비, 청일전쟁에 대한 일본의 시각 등에 대해 질문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바람과는 반대로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정치에 야망이 있는 며느리였다. 그런데 그 야망은 어쩌면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오직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종은 집권 내내 상당 부분을 누군가에 의지했다. 12살에는 대왕대비 신정카지노 가입 쿠폰가 수렴첨정했고 이후 흥선대원군이 섭정했다.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이후에는 제대로 된 정치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섭정에서 벗어난 고종이 기댄 것은 민 카지노 가입 쿠폰였다.
민 씨 척족에 의한 정치는 1874년부터 1894년까지 이어졌다.
민 카지노 가입 쿠폰의 조력자는 바로 그녀의 오빠인민승호였다. 그는 병조판서를 지내며 국정주도권을 장악했다. 그가 한 일은 흥선대원군이 발탁한 사람들이나 남인, 북인들을 파직하고 사직시키는 일이었다.
카지노 가입 쿠폰가 정치에 개입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치는 개항의 흐름으로 갈아탔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창설도 그 무렵이었다.
민 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던 선혜청(宣慧廳)의 당상관 민겸호는 구식 군인들에게 지급해야 할 급여를 빼돌렸다. 가뜩이나 신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 이후 푸대접을 받고 있던 구식 군인들은 무려 13개월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훈련도감이나 특별한 소속이 있는 군인들은 제때 월급을 받았으나 별기군 창설 이후 구식 군인은 특별한 소속 없이 방치되었고 그들은 왕십리에서 채소를 재배해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자 그들을 달래기 위해 1개월 치 급료가 지불되었다. 그런데 지불된 쌀은 겨와 모래가 섞인,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썩은 쌀이 대부분이었다. 분노한 군인들이 몰려가서 항의하자 관리는 썩 꺼지라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군인들은 큰소리치는 관리에게 달려들어 죽도록 두들겨 팼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고종은 말했다.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않고도 규율을 지킨 것이 가상하다. 나라에서 월급을 못 준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니 잘 타이르라.”
그러나 민 씨 일가의 수장인 민겸호는 왕의 명령을 가볍게 무시하고 주모자를 강제 연행하여 감금했다.
구식 군인들 사이에는 소문이 돌았다.
“민겸호가 잡아간 군인들을 죽일 것이다.”
이에 폭발한 군인들은 민겸호,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해 원성을 받고 있던 고관대작들을 보이는 즉시 죽였고, 일본군 훈련 교관들과 일본인 민간인도 무참히 살해했다.
조선 일본 공사 요시모토 하나부사(義質花房)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고 겁에 질린 고종은 허겁지겁 흥선대원군을 모셔와 군인들을 달래 달라고 요청하며 다시 전권을 내주었다.
군인들은 대궐에 나타난 흥선대원군을 보고 열광하고 환호했다.몰려든 군인들은 중전을 폐위시켜 내어 줄 것을 흥선대원군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중전은 이미 승하하셨으니 안심하고 물러나라.”
흥선대원군은 군인들을 안심시킨 뒤 해산시키고 실제로 민 카지노 가입 쿠폰의 장례식을 치렀다.
이후 임오군란의 큰 원인 제공을 한 단체였던 별기군을 해체하였으며 강화도조약을 비롯한 일본과의 모든 통상 조약의 파기를 일방적, 독단적으로 선언했다.
후일 임오군란을 잠재운 뒤 민 씨 집안 창고를 보니 구식 군인들의 밀린 월급을 다 주고도 남을 쌀이 가득 있었다고 한다.
한편 궁녀 복장으로 야반도주에 성공한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충주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도망갔다.
금반지까지 빼서 가마 밖으로 던져 겨우 강을 건넌 후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나면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그때 한 노파가 다가와 말했다.
“중전이 음란해 이 난리가 났으니 낭자가 여기까지 피난 오게 되었네요.”
훗날 환궁한 카지노 가입 쿠폰는 당시 이 말을 한 노인을 벌주기 위해 찾아오라 했지만 노인을 찾지 못하자 그 마을을 통째로 쑥대밭을 만들었다고 한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후 들려오는 소식은 모두 비통했다. 민겸호는 구식 군인에게 잡혀 죽었고 자신은 죽었다고 장례까지 치른 마당이었다.
몸을 납작 엎드리고 있던 그 시절,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신통방통한 한 여인을 만났다.
후일 ‘진령군’이라 불린 이 여인은 피난 생활을 하던 카지노 가입 쿠폰에게 그해 8월 보름에는 환궁할 것이라는 예언을 해주었다.
왕후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예언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임오군란이 정리되고 얼마 후 청나라는 흥선대원군에게 임오군란의 책임을 물어 청나라로 압송해 갔다.
‘진령군’이 말했던 날짜보다는 보름이 늦었으나 어쨌든 카지노 가입 쿠폰는 환궁에 성공했다.
이 일을 계기로 충주 무당이었던 그녀는 벼락 출세길에 올랐다.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평소 무속과 점술을 좋아해서 이 여인을 궁에서 끼고 살았다. 스스로 관운장의 딸이라 말하는 이 무속인에게 고종은 ‘진령군’이라는 호까지 하사했다.
진령군은 사람들의 눈총에 궁에 살기가 부담스러웠는지, 이듬해인 1883년 궁의 북쪽으로 관우의 사당을 만들어 나갔다. 사당의 자리는 조선을 쥐락펴락했던 송시열의 집터였다.
이 사당은 북묘라 불렀다. 사당을 만들게 된 경위는 중앙박물관 동쪽 마당에 있는 비석에 적혀 있다.
고종과 카지노 가입 쿠폰의 꿈에 관운장이 나타나 나라를 살렸기에 사당을 짓는다.북묘가 완성되자 고종과 세자가 함께 가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다.
북묘 건립 이듬해 1884년 갑신년에 또 한 번의 난이 일어났다. 갑신정변 때 고종과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북묘로 피신해서 목숨을 건졌다. 민 왕후의 목숨을 진령군이 두 번이나 구해준 은인이 된 것이다.
당시 고종과 왕후가 궁으로 돌아간 후 북묘에는 벼슬과 돈을 노리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
진령군은 왕후를 부추겨 세자의 건강을 위해 굿을 하고 나라의 평안을 위해 금강산 일만 이천봉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을 바치라고 했고 카지노 가입 쿠폰는 그 말을 따랐다. 일만 이천 봉우리마다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을 바치고 굿을 했으니 얼마의 돈이 들어갔는지 계산하기도 벅차다.
윤치호의 일기에는 당시 지석영 선생이 올린 상소 내용이 있다.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이 세상 사람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한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과 안효제도 ‘북묘의 요망한 계집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상소를 올린 이들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오히려 안효제를 섬으로 유배 보냈다. 이 상소문을 올린 시기가 임오군란 12년 후인 1894년이다. 그렇다면 12년 이상 진령군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뜻이다.
당시 무속 행사는 왕비의 직무였고 무속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사치의 근거는 아니었다. 그러나 카지노 가입 쿠폰가 즉위한 이후 명례궁의 예산이 크게 늘어난 것은 무당과 승려를 통해 행해지는 고사와 차례가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진령군의 입김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카지노 가입 쿠폰는 아버지 민치록의 무덤을 네 번이나 이장했다. 지금도 이장하려면 꽤 많은 돈이 드는데 왕비의 아버지 묘를 이장했다면 일반인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조선은 군인들 월급도 못 줄 정도로 궁핍하던 시절이었다는 점이다.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어마어마한 사치와 낭비로 흥선대원군이 10여 년에 걸쳐 쌓아 놓았던 국고를 1년 만에 모두 탕진했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특히 외교관이자 의사였던 알렌을 신봉했다. 왕후가 앓고 있던 병을 알렌이 치료해 주자 90m가 넘는 비단 한 필과 황금빛 비단 두루마기를 하사했다.
그 외에도 일가 민영익을 치료해 준 사례로 10만 냥을 받았다는 알렌의 기록도 있다. 당시 1냥의 가치는 현재 3~5만 원 정도로 환산된다.
가장 애석한 것은 알렌에게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넘긴 일이다. 운산금광은 일본과 미국이 모두 노리던 광산이었다.
“지난 10년간 조선을 위해 봉사한 알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운산금광을 하사하라.”
카지노 가입 쿠폰의 한 마디로 금강 채굴권은 단돈 2,700원에 미국으로 넘어갔다. 이후 미국은 약 40년간 900만 톤의 금을 채굴해 갔다.
기록에 운산금광의 채산성은 약 4,000만 원 정도였다. 후일 우리나라가 국채보상운동으로 갚으려고 했던 빚은 1,300만 원이었으니 참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국고는 텅텅 비었고 조대비가 승하하자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어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둬겨우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표범 48마리 가죽을 연결한 카펫을 가지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외국에서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하지만 정식적인 외교 절차나 궁정 행사로 받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실록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실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카지노 가입 쿠폰가 사사로이 카펫을 마련했다고 여겨진다. 이 카펫의 가치는 현재 2만 5천 달러에서 10만 달러 정도
로 추산되는데 여러 가지로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현재의 누구와 비슷한 면이 많다.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한 나라를 패망으로 이끌던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결국 우리 민중의 손이 아닌 일본의 사무라이(낭인)에게 칼을 맞아 죽는 비운을 맞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부터 10년 동안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외척들은 민 카지노 가입 쿠폰를 믿고 방자한 짓을 일삼고 탐욕과 사치를 부렸다.
연일 큰 잔치가 벌어졌고 밤새 시작한 연회는 날이 새도록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허비된 비용은 수만금이었다.
정부에 돈을 바치고 관직을 얻었고 그 돈을 백성들에게 수탈했으니 탈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민영주는 유생 시절부터 서울의 부자들과 서울 근교의 주요 나루인 한강, 서강, 마포나루 등에서 거상(巨商)의 재물을 약탈했다.
민영준은 평안감사로 일하면서 평안도 백성들을 얼마나 쥐어짰는지 후일 그가 휘문학교를 세웠을 때 평안도 출신은 학교에 아예 발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수탈한 재물을 불려서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의 최고 부자로 살았다. 후일 이름을 민영휘로 개명했는데 광복 이후 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하자 그의 후손들이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했다.
민영휘와 다섯 번째 측실인 안유풍(풍문여고 설립) 사이에 아들 민대식과 민천식이 있었는데 민대식의 아들인 민병도(남이섬 설립자, 제일은행 한국은행총재)가 민천식의 양자로 입적되어 낳은 아들이 민웅기이다. 민웅기는 현재 남이섬의 주인이기도 하다.
민두호는 강원도 유수로 부임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강원도 백성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뿔뿔이 흩어졌다.
민형식은 국가 한해 세입 480만 냥 중 15%에 해당하는 70만 냥을 횡령했다. 그는 훗날 ‘영남 도적’으로 불렸다.
아무튼 민 씨 일가는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헐값에 팔아넘기면서 돈을 착복했다. 근대화에 써야 할 돈은 민 씨들이 사유화하면서 나라 경제는 휘청였다.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민 카지노 가입 쿠폰를‘국고를 탕진한 여자’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민 카지노 가입 쿠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기도 했다.
“기민하고 모든 일을 임기응변으로 일관하며 정치 20년 만에 나라를 말아먹은 인물이다.”
<매천야록은 구한말 학자이자 재야 문인인 매천 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쓴 기록물로 총 6권, 7책으로 되어 있다.
<매천야록은 1차 사료로서 역사 자료가 되기는 하나 역사서는 아니며 당대에 풍문으로 떠도는 소문 등을 위주로 쓴 일기에 더 가깝다.
그러나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1955년에 한국 사료 총서의 제1집으로 <매천야록을 간행하면서 그 서문에 ‘우리나라 최근세사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하였다,
또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은 말했다.
“우리의 왕비는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더 나쁩니다.”
민 왕후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인 이유는 그녀가 외국인들에게 유독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조선을 위한 정책인지 아니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인지는 알 수 없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등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건청궁 곤녕합 일대에서 민 카지노 가입 쿠폰를 칼로 찔러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에 태운 사건이다.
당시 명성황후는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이 세 나라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보전하려고 했다. 자신의 권력 보전에 도움이 되는 나라에는 조선의 자원을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는 권리를 거의 공짜로 넘겨주었다.
결국 러시아에게 손을 내밀자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한 적이 있던 일본은 민 카지노 가입 쿠폰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일본은 민 왕후 시해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흥선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로 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광화문 앞에서 새벽 1시에 만날 것을 약조했다. 흥선대원군이 나타나면 의심 없이 광화문을 열어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일본인의 부탁을 받은 흥선대원군을 입궐을 꺼렸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나타난 것은 새벽 5시였다.
흥선대원군이 오지 않으면 손자 이준용을 해친다는 위협 때문이었다.
민 카지노 가입 쿠폰 시해 사건에 참가했던 일본 낭인들이 사용했던 칼집을 살펴보면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라고 쓰여 있다.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뜻이다. 이는 민 왕후의 시해 암호명이 ‘여우사냥’이기 때문에 이런 글자를 새긴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늦게 나타나자 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일본인들은 새벽 4시 30분경 작전을 개시했다. 먼저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이 큰 소리로 광화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광화문은 열리지 않았다. 광화문을 지키던 경비병과 순검들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총격전이 벌어졌다.
새벽 5시 무렵 흥선대원군 일행이 광화문 앞에 이르렀을 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 제3중대는 이미 사다리로 담을 넘어 빗장을 푼 뒤였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과 조선인 근위대 병력이 소리를 지르며 경복궁을 향해 돌진했다. 일본 낭인들 역시 광화문을 넘어 경복궁 앞에 이르렀다.
담을 넘은 일본 폭도들이 궁궐 경비병을 향해 발포하자, 경비병은 무기와 군복을 벗어던져고 달아났다. 광화문, 춘생문, 추성문 등 사방의 문 앞에서 기다리던 병력이 모두 경복궁을 향해 달려갔다.
경복궁 입구에는 미국인 지휘관 윌리엄 다이가 지휘하는 조선인 경비대 500여 명이 지키고 있었으나, 일본인 낭인들과 조선인 병력은 쉽게 경비대를 격퇴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다이는 경비대를 이끌고 도망쳤고, 낭인들과 조선인의 길 안내를 맡았던 이들은 쉽게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은 근정전을 지나 왕의 침소인 건청궁까지 진입했다.
당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 사바틴은 궁궐 안에서 수비하던 도중 폭도와 환관(宦官), 벼슬아치, 궁노(宮奴) 등에게 떠밀려 다니다가 일본인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호위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건을 목격하다가 명성황후 시해 직전 두들겨 맞고 현장에서 쫓겨났다. 사바틴은 후일 일본인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는 증언을 하게 된다.
고종은 명성황후를 뒷문으로 피신시키고 시간을 끌기 위해 낭인들이 잘 보이는 문 앞에 나와 서 있었다.
흉도들은 칼날을 휘두르며 고종의 어깨와 팔을 잡아끌고 다니기도 하고, 궁녀들에게 권총을 마구 쏘았다. 고종이 무단 침입을 꾸짖자 무례하게 어깨에 손을 얹어 주저앉히기까지 했다.
다른 방에서 붙잡힌 태자는 머리채를 잡혀 휘둘려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을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3백~4백여 시위대가 연대장 현흥택과 교관 다이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총격전을 벌였으나, 갑오경장 때 우수한 무기를 빼앗겨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민 카지노 가입 쿠폰가 기거하던 건청궁까지 다가온 흉도들은 대오를 지어 사방을 포위했다. 자객들은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흉도들은 닥치는 대로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명성황후의 처소를 대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궁녀들은 두들겨 맞고 내던져져도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건청궁 동쪽 곤녕합 옥호루에서 드디어 민 카지노 가입 쿠폰를 찾아냈는데,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두 팔을 벌려 황후 앞을 가로막고 나서다가 권총을 맞고 쓰러졌다. 이들은 다시 이경직의 두 팔을 베어버리고 그래도 버둥대며 방해하자 이경직의 허리를 베어 죽였다.
곤녕합에 진입한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은 궁녀와 상궁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누가 카지노 가입 쿠폰인지 색출하는데 그중에서 갑자기 한 여인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낭인들은 궁녀들 사이에 숨었다가 도망치는 민 카지노 가입 쿠폰를 쫓아가 그녀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려 내동댕이친 뒤 발로 밟고 일본군 4명이 칼로 찔렀다.
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이자 조선 주재 특파원인 프레더릭 매켄지에 의하면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방 한구석에 숨은 여인을 발견하고 머리채를 붙잡아 카지노 가입 쿠폰가 아니냐고 묻자, 민 카지노 가입 쿠폰가 아니라고 대답했고 몸을 피해 마루 아래로 달아나려는 순간 일격을 가했다고 한다.
일본인 낭인과 조선인 앞잡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쳤다는 기록과는 달리 암살 직전 카지노 가입 쿠폰는 목숨을 구걸했다. 낭인들은 왕비의 정체를 확인하자 “살려달라”라고 애걸하는 그녀를 가차 없이 칼로 내리쳤다.
민 카지노 가입 쿠폰가 절명한 시각은 사바틴이 현장을 떠난 지 20~30분 뒤인 새벽 5시 50분에서 아침 6시 직전이었다.
그녀가 죽은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방 안에서 민 왕후의 시신을 보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또한 낭인들은 왕후를 죽인 뒤에도 그들이 죽인 사람이 왕후임을 확신하지 못해 용모가 비슷한 궁녀를 세 명 더 살해했다.
흉도 가운데 왕후를 죽인 사람으로 지목되는 사람은 데라자키 다이키치(寺崎泰吉)다.
낭인들은 그들이 살해한 네 여인 가운데 누가 카지노 가입 쿠폰인지를 확인했다. 궁녀와 태자를 불러 확인했다는 설도 있고 카지노 가입 쿠폰의 얼굴을 잘 아는 고무라의 딸을 불러 확인했다는 설도 있다.
또 민 카지노 가입 쿠폰의 얼굴에 있는 마마 자국을
보고 확인했다는 설과 처음부터 초상화를 들고 다녔다는 설 등이 있는데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평소 민 카지노 가입 쿠폰는 살해될 것이 두려워 사진을 찍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사진도 모두 없앴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여러 종류의 사진이 민 왕후라고 여기저기 게재되어 있으나 정작 민 왕후의 사진인지 확인된 것은 없다.
당시 낭인들은 남의 나라 국모를 무참하게 죽이는 일에 가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일본을 위해 충성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건 이후 민 왕후가 명성황후로 복권되면서 조선인 가담자인 박선, 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우범선은 뒤에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었다. 진위야 어떻든 간에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에 관여된 것을 알게 된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그렇게 찾아도 가지 않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이 없는 나라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국모를 살해한 것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일제는 이 사실을 숨기려고 언론 플레이를 벌였으나 현장에 있던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 사바틴의 증언으로 전 세계로 알려져 지탄받았다.
일본 당국에 시해 사건이 전달된 것은 8일 오전 6시 32분, 일본 육군참모부에 전보를 보낸 즈음이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고 적혀 있었다. 이는 일본 정부의 공식 명령을 받아 ‘여우사냥’이라는 암호명의 왕후 살해 작전이 성공했음을 알린 첫 보고였다.
미우라는 민 카지노 가입 쿠폰의 시신을 직접 확인한 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오기하라에게 급히 화장하라고 지시했다.
흉도들은 민 카지노 가입 쿠폰의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 숲 속으로 가져가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날이 밝은 뒤 타다 남은 유골은 궁궐을 순시하던 우범선이 우연히 발견하여 연못 향원정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가 혹시 카지노 가입 쿠폰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
사건 직후 미우라는 카지노 가입 쿠폰 시해 사건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분주했다. 사건 다음 날에는 목격자 사바틴의 입을 막기 위해 그에게 내무부 고문직을 제의했으나 사바틴은 거절했다.
이 사건은 민 왕후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고 일본 세력을 물리치는 정책을 취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민 카지노 가입 쿠폰를 제거하여 일본세를 다시 회복하려고 했던 것과는 달리, 국제적 비난과 압력은 물론 조선의 반일운동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 카지노 가입 쿠폰의 죽음 이후 조선은 끝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의 왕비가 살해당한 것은 너무 치욕스럽고 분노할 일이다. 이래저래 마음이 산란하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