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 졸업철을 한참 앞두고 든 생각

2025-04-14T13:55:05Z

같은 아파트 단지에 유일한 한국인 가정이 조만간 귀국을 한단다. 가끔 마트도 가고 빵도 구워다 주며 고향의 정을 나누었지만 막상 한국에 집을 알아보고 왔다는 소식에 더없이 애틋해진다. 가기 전에 더 자주 보자는 마음에 두 부부가 시간을 맞춘 저녁이다. 호스를 청결하게 관리하여 맥주맛이 탁월하다는 생맥주 집에 들어선 우리에게 이웃 부부는 늘 마시던 맥주를 시

도시인의 탈출구 - 崇明岛(숭명도, 총밍다오)에서 어쩌다 마주친 정원(逅院)

2025-04-14T15:35:37Z

계획도 없이 지나는 중에 어쩌다 마주친 곳이 있는데, 그곳을 너무나 만끽하고 싶은 마음에 약간 울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면? 상하이 푸동에서 차로 약 한 시간 거리에 널찍한 섬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평온한 분위기, 자연 친화적이고 풍족한 먹거리, 너른 곡창지대로 쌀농사가 성업하는 기본 프로필일랑 굳이 언급하지 않으련다. 섬으로 이어지는

별을 그리워하는 한 소녀가 - 사하라의 별빛

2025-04-15T08:38:16Z

등단조차 하지 않은 오상룡이라는 한 시인의 유고작 첫 페이지를 점자처럼 더듬는다. 별을 본 적이 언제인가. 별은 잘 있는가. 달은 잘 있던데, 별, 너는 잘 있는가. 문득 별이 그리운 밤, 이 시를 읽었다. <별을 그리워하는 한 소년이> - 오상룡 별이 보이지 않아요. 별이 보이지 않아요. 별이... 별이... 언젠가 그 어릴 적 보았던 나

개의 방식 - 닥쳐올 기쁨만 바라볼 수 있다면

2025-04-12T11:26:31Z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개와의 인연이 있다. 사람도 아닌 것을 사람의 방식으로 교육시키고 있지만 이게 맞는지는 늘 고민스럽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사람의 방식뿐이라 우리가 아름다운 동거를 하기 위해서 개는 순종을 당연하게 강요받았다. 밥 주는 의무를 특권인양 들고 선 주인 앞에 달콤한 사료 몇 알과 수많은 명령어를 연결하는 개의 눈동자가 뻑뻑해진다

잘 가꾸어진 숲 냄새 - 아는 냄새의 구체화

2025-04-08T03:12:39Z

당신의 책장에 오랫동안 꽂혀 있는 책들이 있다면, 한 권 집어 책장을 후루룩 넘기면서 일어나는 작은 바람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자. 이 냄새는 중고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도 맡아볼 수 있다. 도서관처럼 큰 공간에서 풍기는 오래된 책의 냄새는 마치 잘 가꾸어진 숲 냄새 같다. <주드 스튜어트, 코끝의 언어> 온종일 가라앉은 무색무취의 공기 안에 차갑고 생경

눈이 아닌 마음으로 - 한때 소중했던 것들

2025-03-18T09:38:43Z

내가 보낸 짧은 문장에서 모음과 자음이 만나는 부분을,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백을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해석하시려는 게 분명하다. <이기주, 한때 소중했던 것들, p.115> 나는 이제 막 글밭에서 걸음마를 시작했지만 강원국 작가의 글과 자식의 비유가 참 적절한 것 정도는 느낄 수 있다. 끌어안아 매만지고 다듬은 글이 자식의 운명을 입고 날아가는 일은 작

비정상이 정상이기도

2025-03-13T12:03:48Z

의사는 짧게 볼수록 기쁘다. 결과지에 적힌 '이상 없음'을 의사 입을 통해 다시 듣는 일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이상이 발견되면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병원 비즈니스에 콧방귀를 날리며 돌아서는 통쾌한 기분이란 게 있다. 건강한 자는 병원에서 '갑'이다. 이상 없음은 해당 수치가 정상임을 말한다. 수치를 말하려고 하니, 난 참 수치에 많이 울고 웃었다. 결과지를

꼬리치기

2025-03-04T02:05:29Z

뒷자리에 딸아이가 너무 조용하여 룸미러로 뒤편을 바라보다 운전 중 내 얼굴을 마주쳤다. 상당히 낯이 익으면서 동시에 좀 생경한 그런 인상. 어디서 봤더라. 운전 중 내 얼굴은 아빠의 얼굴을 똑같이 닮았다. 웃음기 없이 작게 뜬 눈, 살짝 쳐진 입꼬리가 노화와 팔자주름으로 더 내려앉은 모양, 반쪽 눈썹 그리고 윤기 없고 노란 피부가 그것이다. 딸은 크면 엄

새로운 눈 - 마르셀 프루스트

2025-04-05T23:29:32Z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휴대폰이 울렸다. 하늘을 찌르며 가시만 남은 볼품없는 겨울나무 사진. 뜬금없는 사진과 함께 언니는 메시지 한 줄을 달았다. 나무가 눈물 나게 아름답다고. 인생의 굴곡을 늪지의 물풀마냥 한걸음 걷고, 한 줌 걷어냈다.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이미 뻘인지 신발인지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 언어의 온도

2025-03-14T02:11:12Z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면 남보다 재빨리 알아챈다.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그리고 아파 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p.19> 화학 치료는 각가지의 부작용을 가지고 왔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약의 작용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했다. 빨리 낫기를 위한

기내식에 관한 이야기 - 그나저나 고마웠어요.

2025-03-01T11:17:52Z

먼저 말씀드릴게요. 기내식을 먹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글은 온전히 제 태도에 대한 고찰이자 근원이고 반추입니다. 기내식의 마지막 한 톨까지 쓸어먹으며 꼭꼭 씹은 생각입니다. 아직도 명치 언저리에서 내려가지 않는 생각. 물을 마셔도. 탄산수를 마셔도 요지부동인 음식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을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감나무의 흔적 - 아낌없이 주는 나무

2025-02-22T08:44:03Z

크지 않던 집과는 어울리지 않은 집채만 한 감나무가 있던 화단을 기억한다. 마른 멸치의 등을 벌려 까맣고 딱딱한 그것을 엄마는 그 밑에 앉아 분리하곤 했다. 그런 일은 엄마 혼자 하기도 했고, 동네 여인들과도 하기도 했다. 아낙들 입을 부지런히 오가는 인생 넋두리를 감나무 그늘은 묵묵히 들어줬다. 그러다 이따금 풋풋한 땡감 하나 그들 머리 위에 떨어뜨리는

믿기지 않는 일을 믿는 일

2025-02-13T23:49:05Z

잔인한 소식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입으로 올리기 무서운 일이 어린이들의 학교에서 일어난 건 참혹했다. 세상의 떠들썩한 소리 안에 나는 다시 고요히 침잠해 들어갔다. 몸의 구석구석이 불편했다. 아픈 곳은 있는데 찾을 수는 없는 그런 종류의 아픔. 인류 역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더라도 매번 다른 얼굴의 충격은 지진과 여진을

박싱과 언박싱 - 택배 왔어!

2025-02-18T21:47:20Z

어디론가 신이 나서 달려가는 모습은 종종 "택배 왔어!"라는 문구를 달고 유머 게시판의 단골 소재가 되어 퍼졌다. 10-20년 전 온라인 쇼핑족들이 늘어나며 집에서 택배만 기다리고 있던 마음이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역병이 돌아도 택배 관련업은 매년 역대 최대폭의 활황을 갱신했다. 택배업은 실업자들과 투잡러들을 넉넉히 포용했다. 일이

언어를 대하는 태도 - 무정형의 삶

2025-02-13T00:02:18Z

500일 듀오링고로 얻은 점은 유창한 회화 실력이 아니라 해보려고 하는 마음 한 단어라도 듣고 추측해 보려는 마음 즉, 태도, 그 언어를 대하는 태도였다. <김민철, 무정형의 삶> 한 때 불문학도였던 나는 불어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든 세상을 불평하며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전공은 결코 전문적인 수준으로 올라올 수 없었다. <마담 보바리>를 원문으로 읽는 것

다시 글을 쓰고 있죠. - 예술하는 습관

2025-02-28T02:26:31Z

이 글을 쓰면서 적어도 열두 번은 글쓰기를 중단했어요. 한 번은 생선장수한테서 생선을 사려고, 또 한 번은 출판업자를 만나려고, 그다음에는 아이를 돌보려고 글쓰기를 멈췄어요. 그러고는 저녁식사로 차우더 수프를 끓이려고 부엌에 들어갔어요. 지금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다시 글을 쓰고 있죠. 그런 결심 덕분에 항상 글을 쓸 수 있어요. 이건 마치 물결을 거슬러

네 손 말고 내 손에 주도권이 있을 때 - 숙제는 더 이상 숙제가 아니다.

2025-02-28T02:31:39Z

딸이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이로써 나는 개학이 시작되었다. 어릴 적 나와 동생의 방학이 끝나면 얼굴이 환해지시던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한다. 우리의 방학이 부모님에게도 방학일 수 없는 일은 내 세대에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어른에게든 아이에게든 방학은 좋은 것이다. 아무리 학교가 좋아도 방학은 여전히 좋은 것이다. 방학 숙제를 한 아름 안고 돌아온 아이의

선택을 옳은 선택으로 만드는 것 - 나를 움직인 문장

2025-01-30T11:00:20Z

자신이 지나온 모든 선택은 또 다른 기회를 만드는 디딤돌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할 일은 옳은 선택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했던 선택을 옳은 선택으로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하림, 나를 움직인 문장들> 새벽 4시. 이 시간 깨어있기로 선택한다. 찌르는 듯한 자명종 소리에 무거운 몸을 구부리며 억지로 억지로 침대 밑으로 발을 디디던 시간은

한 농부의 언어 - 계산하지 않는 사랑의 경지

2025-01-10T09:52:44Z

농경시대에는 자식을 많이 낳았다. 그 당시 자식은 노동력이었고, 노동력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출산은 결혼과 함께 당연한 것이 되기도 했다. 먹고살기 위해 낳은 자식들은 사회라는 더 큰 공동체를 이끄는 씨앗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농부과 가족의 고리를 통해 바라본 농부의 역할은 부모의 역할과 꽤나 닮아있다. 농부는 메마른 곳에 물을 대고, 벼가 누우면

중국음식이 아직 두렵기만 하다면 - 乐忻皇朝(PARADISE DYNASTY)

2025-02-22T23:41:17Z

사람 중에는 어느 부류와도 잘 섞여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고고한 지식층들과 어울릴 때는 그에 맞는 격식과 매너를 장착하고, 재래시장에서 시금치를 담는 손의 주름에 엄마를 연상하는 찌릿한 가슴을 가진 사람. 어느 곳에든 잘 어울리는 사람. 어느 곳에든 환영받는 사람. 그런 사람과 나는 몇 프로의 싱크로율을 가지고 있을까. 2012년 상하이로 이주하고 줄

새벽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