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대하여 - 완벽함이란, 그저 있는 그대로

2025-04-23T06:19:42Z

어릴 땐 요리사가 되고 싶었다. 밤새며 해도 그다음 날 행복했던 것은 요리가 유일했다. 재능도 있었다. 시 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내 꿈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러나 경상도에서 태어난 장녀는 공부라는 더 안전한 길, 아니 어른들이 더 원했던 길 앞에서 머뭇거렸다. 나중에 취미로 해도 되지 않겠냐는 그럴듯한 설득에 넘어가야만 했다. 그러면 그 안에서 무엇을

하찮음에 대하여 -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

2025-04-22T14:28:05Z

귀찮다. 해야만 하는 일들은 왜 이렇게 많은가. 아침부터 잠에 들 때까지 해야 할 일은 아마 100가지는 넘어갈 것이다. 누가 대신 해줬으면. 가장 먼저는 누가 내 화장 좀 지워줬으면. 아니 누가 클렌징워터를 화장솜에 묻혀준다면. 내 입에 칫솔을 물려 화장실 앞에 데려다주었으면. 매일 삼시세끼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조차도 일이다. 세상에는 귀찮은 일

지남에 대하여 - 피 묻은 기적

2025-04-16T12:01:37Z

화면에 메일함이 띄워진 채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처리해야 할 업무를 떠올리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언제 눌렀는지도 모를 한글파일이 켜져 있었다. 어디서 찾아낸 데이터인지 몰라 다시 메일함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 못 찾겠다. 그날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가슴에 누가 불을 붙여놓은 것 마냥 힘겨운 날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의지에 대하여 - 예쁜 컬러링북은 그만할래

2025-04-12T21:47:58Z

잘 다니던 학원을 때려치웠다. 원장님은 더 데리고 앉혀놓으려 했지만 돈으로 해결 안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느꼈다. 먼저는 강사, 선생이란 자격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내 인생도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데, 맡은 아이들의 성적, 그것이 만들어낼 아이의 인생이 무거웠다. 그리고 권태감이 나를 짓눌렀다. 대학교를 졸업유예를 해둔 상태였기에 생각도 대

증명에 대하여 - 스스로에게 바치는 찬가

2025-04-11T03:43:29Z

나는 누군가에게 늘 내 아픔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나에게 조차도. 이 글은 아픔 자체보다, 아플 자격을 논하며 삶을 버텨온 나에게 바치는 찬가다. 그날은 몸이 너무나 아픈 아침이었다. 눈을 뜨면 온 세상이 어지러웠다. 속이 울렁였다. 귓가에 울리는 작은 진동에 손을 뻗어 화면을 확인했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다 갈라져 갈래갈래 찢어진 소리가 흘러나와 공

소중함에 대하여 - 깨지 않는 꿈

2025-04-11T02:42:38Z

태초의 신이 흙덩이에 생기를 불어넣던 순간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모든 감각이 하나씩 깨어난다. 아직 눈은 뜨지 않았지만, 암막커튼 너머로 스며든 햇살이 왼쪽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간다. 새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입안은 텁텁하고, 허리는 뻐근하다.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는 신호 같았다.

고마움에 대하여 - 과메기의 미학

2025-04-09T20:45:09Z

금요일 퇴근 후,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귀가를 했다. 온기 가득한 햇살에 시나브로 온 봄을 한가득 담아내었다. 집으로 와 간단히 정리를 했다. 쓰레기를 한데 모으고 빨래를 돌렸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책상에 앉으니 곧 밀려오는 적적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여덟 식구 한 지붕아래 살던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이 적막함에 그때가 문득 그리워

기억에 대하여 - 엄마 아빠는 왜 손 안 잡아?

2025-04-08T05:40:28Z

광활한 대지,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곳. 바다도 호수도 보이지 않는 척박한 이곳에서 헤매고 있다. 비가 내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수천수만 가지 새싹들이 튀어 올라온다. 비현실적으로 자라난 생각들은 그 씨를 또 뿌려놓은 채 생을 다한다. 어떤 생각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지만 창피함과 맞서야 할 때가 더 많음에 오늘도 지쳐가고 있었다. 무의식의 대지 위로 어

당연함에 대하여 - 겨우 내가 되었다

2025-04-07T10:48:27Z

아침에 눈을 뜨니 마음에 가득한 솜은 물을 먹어 축축 늘어졌다. 한동안은 뽀송뽀송 한없이 가볍기만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고, 그냥 누워서 쉬고만 싶었다. 출근을 해서 시작될 업무들이 버거웠다. 출근길 생각나는 수많은 통통이는 생각들을 적고 공유하는 삶이 즐거웠지만, 최근 들어 그마저 쉽지가 않았다.그래 다시 감기에 걸려버렸

그리움에 대하여 - 잃어버린 주말

2025-04-06T13:23:01Z

그날은 따사로운 햇살이 그치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선선한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히던 그런 하루였다. 달그락거리며 엄마가 구워준 간고등어를 한 마리 해치우고 뜨끈한 된장찌개로 숟가락을 옮겼다. 몇 번을 졸여졌을지 모를 갈색 옷을 입은 두부를 가득 담아 호호 불어 입에 넣었다. 할머니가 담그신 콩잎장아찌에 새삼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온다는 것을 실감했다. 위에

좋아함에 대하여 - 엄마는 내가 왜 좋아?

2025-04-05T10:44:26Z

세상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참 많다. 왜 하루는 돌아 다시 나에게 새로운 하루를 선사하는지. 사람들은 그렇게 살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저렇게 열심히 다리를 놀려 저마다 목적지를 향하는지. 누군가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단다. 그중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나를 싫어할 이유는 너무

수줍음에 대하여 - 가을비와 그

2025-04-04T14:52:38Z

비가 내리는 오후 그리고 영상 15도, 내가 좋아하는 날씨, 살짝은 쌀쌀하다 느껴지는 오후 세 시에 카디건을 입고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셨다. 커피 한잔 마시기 딱 좋은 날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와 집안으로 흘러들어온 습기가 내 몸을 누르고 억지로라도 평온하게 만들었다. 비 오는 날은 커피 향이 더 가득히 집안엔 퍼져 숨을 깊이 마시고 들이쉬게 된다.

품김에 대하여 - 저 못하겠어요. 그래도 꼭 안아주실래요?

2025-04-04T05:45:20Z

"이 문제 풀 수 있지?" "혼자 있을 수 있지?" "먹을 수 있지?" "잘할 수 있지?" "약속 지킬 수 있지?" "네" '있지'로 끝나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한 소녀. 밝은 얼굴로 돌아선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로 두 번 애꿎은 바닥을 차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류의 질문을 하는 사람은 그 얼굴이 해맑았다. 기대에 찬

위태로움에 대하여 - 엠뷸란스와 3차선

2025-04-03T09:56:48Z

아침에 눈을 떴다. 오늘은 주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다고 퍼져있기엔 양심이 가슴을 콕콕 찔렀다. 입에 무언가를 넣어야만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미친듯이 당기는 식욕이 힘겨웠다. 약과 두 개를 먹고도 부족해, 딸기맛 막대사탕을 물었다. 그리고는 휴대전화를 들고 게임 네 판을 했다. 한 판을 이기고 삼연패를 하고 나니 더 기분이 우울

추억에 대하여 - 추억에는 뚜껑이 없다

2025-04-03T14:16:42Z

밤하늘을 유리하는 저 별들은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련 없이 반짝였다. 앞으로 남은 나날 중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보내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서 있었다. 오랜만에 내려온 고향이지만 존재가 환영받기에는 너무 초라한 몸뚱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엔 마음이 쓰라려 휴대전화와 이어폰을 가지고 슬그머니 나왔다. 마을을 정처 없이 걷다 멈춘 곳에

나에 대하여

2025-04-03T06:13:03Z

퇴근길. 회색빛 아스팔트로 덮인 도로, 그 옆을 지키고 선 수많은 건물은 마치 옛 마을을 지키고 선 장승처럼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과거 장승이 마을 입구에 서서 들어오는 악귀들을 막았던 것처럼 도시의 장승들은 도시를 무언가로부터 지키고 서 있었다. 그 시선들에 나는 이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그 무언가가 마치 내가 된 것

서로의 고통에 대하여 - 깨진 그릇 위에 핀 봄

2025-04-03T06:11:02Z

모두가 잠든 새벽 3시, 눈물 자국을 차마 지우지 못한 채 잠든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이가 있다. 낮에는 무슨 말만 해도 버럭거리는 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마음으로 울었던 터라 새근새근 잠이 든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음에 안도했다. 중간중간 무슨 꿈을 꾸는지 웃을 때면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높이 날아올라 반짝반짝 푸른빛을 내는 반딧불이들이

행복에 대하여 - 괜찮아, 웃을 수 있으니까

2025-04-03T06:16:06Z

글을 쓰다보면, 아니 어딘가에 내 이야기를 할 일이 생기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먼저는 화나고, 나를 아프게 했던 일들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희석되지 못한 아픔, 절망, 슬픔은 내 안을 파고 들어, 점점 덩치를 키워간다. 행복한 기억을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누가 봐도 참 곱게 자랐다는 말을 듣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다. 그때 이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

프롤로그 - 다시 나를 써내려 가는 밤

2025-04-03T06:17:37Z

경상도에서 20년을 살아온 촌사람이 서울역에 처음 도착했던 날, 나는 서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밝게 빛나는 네온사인과 발 디딜 틈 없는 인파 사이에서 처음 느낀 감정은 화려함과 삭막함, 그 두 가지였다. 스포이드로 색을 뺏긴 듯, 사람들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고, 나는 그런 얼굴들을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저렇게 될까 봐 무

오늘은 녀석의 생일입니다. - Happy birthday to you

2025-01-30T10:48:54Z

오늘은 내 생일이다. 가족들과 함께 생일을 축하하고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점점 기분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큰일이네, 그 녀석이 왔다. 우울감.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아 달라는 듯 엉겨 붙는 통에 하루 종일 답답함과 씨름을 해야 했다. 안아달라는 건지 밥을 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 진짜 속내를 드러낼 때까지는 숨죽여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엄마

윤슬yunse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