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중학교 입학식 날 자퇴를 하고 싶다 했다

2025-04-17T13:44:22Z

자퇴, 정원 외 관리 대상, 미인정 유예, 검정고시, 학교 밖 청소년, 서울형 대안 학교, 의무 교육, 학업 중단 숙려제, 대안 교육 위탁 교육 기관……. 이들 단어 간 유사도가 짝을 이루며 가까웠다 멀어지는 날이 계속됐다. 중학교 입학식 날, 어둡고 긴장한 표정의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자퇴를 말했다. 잘 지내 보고 싶었던 만큼 아이의 좌

불현듯 그림자극

2025-03-05T13:42:30Z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간. 그림자극이 펼쳐진다. 적정 거리 유지. 적정 거리 유지. 머리만큼 큰 왕관을 쓴 신데렐라와 두 걸음쯤 간격을 띄우고 선 왕자 사이엔 하트가 둥실. 공주의 앉은키만 한 호박 마차는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릴 것을 대비해 저만치 당도해 있다. 창밖 철제 난간이 이들의 무대인 양 절묘하다. 매해, 매 계절 조금씩 시간을 달리해

조용한 옹이

2025-03-04T05:04:48Z

회백색 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잡아 끈다. 여기저기 파인 구멍이 오른쪽에 유독 많다. 위아래로 이제 막 자라나는 잔가지처럼 한때 하늘을 향해 팔 벌렸을 옹이의 아득한 과거가 줄기에 움푹움푹 패어 있다. 죽은옹이는 안다. 모든 가지가 다 살아남진 못한다는 것을. 허나 말이 없다. 어디까지 뻗을는지. 어느쯤에 떼질는지. 얼마만큼 다칠는지. 언제쯤에 나을는지

흔들리는 엄마를 위한

2025-04-11T07:47:11Z

작년 말 한 출판사와 미팅이 있었다. 성인 문해력 증진을 위한 쉬우면서도 전문성이 녹아 있는 에세이 출간을 제의받았다. 이후 가목차와 두어 편의 글을 편집장님께 보내고 두 달이 조금 못 되어 다시 만났다. 전체적인 피드백이 있은 후 서로 다른 색깔의 기획안 소개가 세 개쯤 이어졌다. 그중에는 그간 딸애를 키우며 올린 브런치 글을 보고 구상했다는 에

2월 같은 날들

2025-03-03T12:57:07Z

2월이 훌쩍 지나는 동안 몸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중요한 일을 자꾸만 놓쳤고 그때마다 핑계를 댔다. 그런 내가 싫다가 곧 익숙해졌다. 저쪽은 가물가물하고 이쪽은 선명했다. 고개를 숙여 저쪽과 이쪽이 함께한 시기를 언급하며 저쪽에게 이쪽을 소개하는 날이 주마다 이어졌다. 연찬회, 학술 대회, 월례 발표회에서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렸지만 위축된 마음은

또 반해 버렸잖아

2025-02-14T01:35:21Z

딸애가 설에 받은 세뱃돈으로 이것저것 쇼핑을 하고 담을 데를 마땅찮아하길래 싸고 튼튼해 보이는 천 가방을 하나 골라 줬다. 물건을 담기는 했는데 지퍼가 없어 내용물이 보이는 게 아쉬웠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똑딱이 단추 하나 달았음 좋겠는데 수선 맡기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겠지. 그냥 들어야겠다.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 그러고 곧 가방의 존재를

번역기를 돌렸어요

2025-02-17T06:53:32Z

-요즘도 비슷하세요? -네. 좀 무기력하달까요. 크게 기쁘지도 막 슬프지도 않은 상태. 곧 3월인데 아이가 중학교 가서 힘들다고 작년처럼 그럼 어떡하나. 지금이 나은 건가. 한 번씩 답답하고 그래요. -못 갈 수도 있어. 가 주면 생큐지.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내려놓으셔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요. -네. 알고 있는데 어려워요. 아이가 불

이제 정답은 알아맞혀 볼까요

2025-02-03T12:22:49Z

어느 것이 맞을까요, 알아맞춰 보세요. 딩동댕, 척척박사님. 어린 시절,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노래하듯 말했다. 그때는 ‘알아맞춰’가 틀리고 ‘알아맞혀’가 맞다는 것을 몰랐다. 주변에 “알아맞혀 보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알아맞춰'가 틀린 말이라고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내 심리 어휘부(menta

겨울 오후 네 시의 빛

2025-02-02T23:34:16Z

너무 짧게 머물다 가는 빛 인생을 찰나의 행복을 닮은 겨울 오후 네 시의 빛 #겨울#오후#네시#거실로들어온빛한줄기가처연하다#시라이름할수있다면

괜찮아

2025-04-11T08:26:44Z

-엄마. 중학교 생활 잘 못할까 봐 걱정돼. -잘하고 싶구나. 잘 못해도 돼. -걱정이 너무 무거워서 힘들어. 풍덩 빠져서 가라앉을까 봐 무서워. -가라앉다 보면 언젠가 걱정이 녹아 없어질 거야. -정말? -그러엄. 다 녹아서 가벼워지면 그때 헤엄쳐 나오면 되지. -와. 정말 그럼 되겠다. #쇠소깍검은모래해변#화산송이도#현무암도#깎이고깎여곱고곱게#너의걱

눈이 내리면 생각나는 사람

2025-03-17T17:29:11Z

잔눈발로 사방이 뿌옇다. 순식간에 눈이 쌓인다. 저 눈을 다 어찌 치우시려나. 행여 미끄러져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아파트 단지를 내려다보는 눈은 어느새 두 분이 계시는 서산을 향한다. 설날 연휴, 서해안엔 폭설이 내렸다. 우리가 서울로 올라간 후로 30cm도 넘는 눈이 더 왔다고 했다. 우리 딸 전화했었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만 내놓고 지

그 따위는 이 따위가 아니에요

2025-01-27T09:23:05Z

‘따위’가 주는 어감 때문에 제 나름의 쓰임을 부정당하는 예가 있다. ‘너 따위가 뭘 알아.’의 ‘따위’와 ‘추석을 앞두고 마트에 사과, 배 따위가 나와 있다.’의 용법 중 후자가 그렇다. ‘너 따위’의 ‘따위’가 주는 부정적 어감이 너무 센 까닭에 사람들은 ‘사과, 배 따위’의 ‘따위’조차 ‘너 따위’의 ‘따위’와 같은 것으로 인식해 버린다. 실은 후

꽃이 안 피어도 시들어도

2025-01-28T13:56:06Z

지난 12월 크리스마스 리스 만들기 원데이 클래스를 시작으로 총 다섯 차례, 아이의 꽃꽂이 수업이 있었다.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긴 했지만 아이가 몰두하며 편안해하는 것을 본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두 번의 센터피스와 두 번의 핸드 타이드(꽃다발)가 아이 손에서 완성되는 동안, 나는 조용히 옆에서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고 선생님들과 담소를 나눴다.

괄호 열고 괄호 닫고

2025-01-20T21:41:01Z

남이 나에게 궁금한 것을 묻는다. 그때마다 대답은 짧고 그만큼의 생략된 말들이 괄호 속에 숨는다. 입밖으로 나온 대답은 거짓이 아니지만 진실이라 하기에도 뭐하다. 남이 나에게 대단하다고 여기는 면이 나는 미련하고 부끄럽다. 남이 내가 잘할 거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해 창피하다. 남이 내가 잘 알 거라 믿는 것이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아

너의 졸업

2025-01-13T21:40:28Z

식이 끝나고 담임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예전 제자들로 보이는 중학생 또래의 남자아이 둘이 선생님과 담소 중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두 아이가 몸을 돌려 내 쪽으로 향하자 그제야 선생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예원이 엄마예요. -아, 안녕하세요 어머니. -.......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도

내 속엔 사과 농장도 있지만 딴것도 많아

2025-01-21T15:58:20Z

-엄마. 내 속엔 사과 농장이 있어. 그런데 사과를 애벌레가 자꾸만 갉아 먹어. 사과가 애벌레에게 반쯤 갉아 먹히다가도 좋은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면 행복해져서 사과가 멀쩡해. 그런데 밤이 되면 애벌레가 다시 나타나. 잘하고 싶은데 아무에게도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아서 슬퍼. 좋은 음악이나 영화는 사소하지만 인생을 닮아 있어. 듣고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2025-01-11T03:57:51Z

-그러나 어떡해요. 어머니만이 줄 수 있는데. 엄마를 너무 사랑하지만 온전히 가져 본 경험이 없어서 아픈 건데요. -충분히 주세요. 사랑. 학교 가는 게 목표가 아니라 학교 갈 수 있는 마음을 길러 주는 게 목표가 돼야 해요. -학교가 맞지 않는 아이도 있어요. 정말 안 맞는다면 그땐 엄마가 홈스쿨링 알아볼게 하면 돼요. 어떤 경우라도 아이에게

동짓날

2024-12-25T11:27:03Z

밤이 가장 길며 낮이 가장 짧은 날. 낮이 가장 짧지만 앞으로 점점 길어지는 날. 밤이 제일 길며 음의 기운이 가장 성한 날. 낮이 제일 짧지만 양의 기운이 점점 세어지는 날.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새 달력을 나누고 앞날을 그려 보는 날. 저마다의 태양이 다시 뜨길 꿈꾸며 삿된 것을 깨뜨리고 바른 것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너의 시간을 찾아 줄게

2024-12-21T19:46:14Z

-따님은 언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나요? -가족들과 여행 갔을 때요? 일단 엄마가 친절해지고 뭐든 다 응 그래, 하니까 아기가 되죠. -세 살 땐가 둘이 KTX 타고 부산으로 1박 2일 여행을 간 적이 있었어요. 시티 투어 버스로 구경 다녔고, 볕이 뜨거워 우산으로 가려 주고. 추파춥스 하나 입에 물려 주고. 바다를 처음 보고 무서워하길래

삶의 연료

2024-11-30T05:15:26Z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의 결말은 늘 싱거웠다. 사실은 그다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작가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니까. 장르적 특성이 그러하니까. 아이들에게까지 세상이 냉혹하다는 것을 알려 줄 필요는 없으니까. 모두가 짠 듯한 결말에 아마 그래서일 거라고 믿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다음이 궁금했고 세계

어슴푸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