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텔 블루스

2025-04-17T23:51:46Z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아직 이삿짐을 다 풀지 못해 어수선하다. 75리터 쓰레기봉투에 짐을 담아 왔는데 열 엄두가 안 난다. 방이 쓰레기장처럼 보여도 어쩔 수가 없다. 저걸 다 열면 여기 정착할 것 같은데, 난 보증금 천에 월세 65짜리인 이 방이 아직 내 것 같지 않나 보다. 눈을 굴려보니 낯선 것만 가득이다. 아직은 낯선 침구류와 공기 그리고 차양이

외로움 발언권 보장

2025-04-09T20:11:13Z

저는 독서모임을 오래 운영하다 보니 줄곧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마주합니다. 독서든 영화든 글쓰기든 뭐든지 간에 상관없어요. 외로움은 늘 지천이고 저는 모임을 만드는 사람이라서 외로움을 잘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임이 외로움을 자연스럽게 표출할 수 있는 자리이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고독이라는 정서를 어떻게 다루지 못해

소설처럼

2025-04-08T05:49:37Z

평소 '소설처럼'과 같은 표현은 잘 쓰지 않습니다. 제게 소설小說은 뭔가 극적인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말하는 설 앞에 붙은 작을 소가 제게는 검박하고 담백한 느낌으로 여겨집니다. 작은 이야기에는 과장이 붙지 않는 법이죠. 그런데 잘 따지고 보니까 가끔 제게도 개연성이 무척 떨어지는 소설과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삶의 한복판, 하루가 뻔히 흘러

나는 달리기로 용서한다

2025-03-14T21:35:14Z

이번 글쓰기 주제는 용서입니다. 저는 막상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려고 하니 떠오르는 게 별로 없네요. 시간이 지나니 다들 그립고 미안하기만 합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도 귀여운 구석 하나쯤은 있잖아요. 가끔 시간에는 확실히 온기가 있다고 느껴요. 시간이 지나도 증오가 더 치솟는다든지, 도무지 생각해도 용서되지 않는다고 얘기할 것은 없어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

패션

2025-03-12T23:06:13Z

재작년 이맘때를 떠올려보면 막바지에 이른 탈고로 진이 다 빠졌었다. 내 글이 별로라는 편집자에게 이런저런 훈수를 듣다 보니 자존감은 다 무너졌다. 수정한 원고를 보내도 번번이 신통치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난 대형출판사 테레랑 편집자의 목소리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아직 출간하기 전 유일한 독자이기도 한 편집자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나보다 더 많은 성

나의 유년에게

2025-03-11T04:07:48Z

내게 친구라고 여길 만한 친구가 있었던가. 어느 시절에나 자주 만나고 친밀했던 사이는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지금 와서 그들을 친구라 부르는 게 망설여진다. 왜 그렇지? 다 진짜였는데. 이에 대해 친구는 지금 연락하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 때문에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야. 결혼식을 가지 않아 미안해져서 연락이 끊긴 친구, 그냥 내 상황이

이발

2025-03-20T06:33:09Z

난 이발을 좋아한다. 한 달에 두세 번은 다니는데 귀찮지 않다. 어쩐지 내심 기다려지기까지 하니 이건 취미인가 싶다. 앱으로 이쁘다 헤어를 검색하고 나를 늘 밀어주시는 지윤 님을 선택한다. 네이버 앱이 이발 시간을 상기하도록 알림을 허용한다. 네이버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난 열흘이 지나면 머리를 밀고 싶어 근질댄다. 가만 보면 난 이발을 일종의 면도로 생

자판기 커피 풍경

2025-03-11T04:05:29Z

종범이는 입관이 끝난 뒤에 내가 떠날 채비를 하자 그냥 혼자 있는 게 무서웠는지 좀 더 있어 달랐고 말했다. 그런 놈이 아닌데 자꾸만 근처에서 차나 한 잔 하자고 해서 난 한숨을 크게 쉬고 녀석을 따라나섰다. 우린 장례식 장 1층의 간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다 녹지도 않은 설탕이 둥둥 떠다니는 자판기 커피를 두 개 뽑아놓고 우리는 피로함에 얼굴을 문질러

내가 사는 오피스텔 골목 안

2025-03-11T04:04:01Z

내가 사는 오피스텔 골목 안에는 한 아저씨가 산다. 몰래 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내 방 창문에서 보여 그를 관찰했다. 처음에는 그가 마루에 둔 카메라 여러 대와 식물들이 눈에 띄어 어디 스튜디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저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아저씨의 일상만 눈에 들어왔다. 내가 눈여겨본 것은 그의 루틴이었다. 화분을 돌보고 마당에서 책을

나는 요 며칠만 살아

2025-03-11T04:02:57Z

모임을 하다 보면 얘기가 삼천포로 빠질 때가 많다. 사실 삼천포로 가기 위해 모임이라는 형식을 두는 건지로 모른다. 그러다 가끔 왜 사는가,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처럼 한갓진 질문들이 나올 때가 있다. 켜켜이 쌓여가는 시간의 의미를 붙잡는 질문은 두드러진다. 일상의 고민들이 앞산과 팔공산 정도라면, 삶을 직시하는 질문은 피레네와 알프스처럼 감도 잡히지 않는

아무튼 일과

2025-03-11T04:01:17Z

삶은 이런저런 할 일의 연속이다. 내가 살면서 얻어낸 책무와 끝내야 하는 원고, 잊으면 안 될 일정의 연속이 되었다. 난 일로 정신이 없다. 내 삶은 그렇게 일이 치인다는 것이 곧 성공을 알리는 징표이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아 이거 해야 해'라고 중얼거린다. 내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헬스장을 위한 시간뿐이다. 무언가를 응시하고 사색할

다시 한번

2025-03-11T04:00:21Z

'다시 한번' 1.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를 그냥 내버려 둬. 2. 다시 한번 생각해도 화가 난다. 3. 다시 한번만 기회가 있다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4. 나는 재미없는 건 다시 한번 더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5. 고요하게 있을 수 있다면 다시 한번 더 에어팟 노이즈 캔슬링을 켤 것이다. 6. 내가 다시 한번 더 찾는 카페는 대체로 책이

10년 뒤 나는

2025-03-11T03:59:39Z

1. 10년 뒤라고 크게 달라진 건 없다. 2. 그때도 책과 영화가 재밌다면 좋겠다. 3. 아마 그때가 되면 입맛이 좀 사라지지 않을까. 4. 열기가 식고 18도 정도로 느긋해질 것이다. 5. 그때가 되면 잠이 줄어들어 하루가 더 길어지지 않을까. 6. 아마 그때가 되면 자기 전에 아쉬움이 덜하지 않을까. 7. 내 십 년 전은 외출이 잦았는데 지금은 거의

닭의 가슴을 먹고사는 신세

2023-11-30T12:47:31Z

‘뭘 먹어야 하나.’ 냉동실을 보니 마니커 닭가슴살과 참치통조림 따위만 잔뜩 쌓여있었다. 늘 먹던 닭 냄새가 지긋지긋해서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섬유질이 가득한 야채를 씹고 싶었다. 요즘 장을 볼 때 고기는 되도록 줄이고 대신 두부와 버섯을 바구니에 담는다. 고기로 편중된 식습관을 개선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건 몇 달 전에 냉장고를 열었더니 순 소

낯선 도시에 정착하는 방법

2023-11-26T06:37:20Z

최근에 여자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십 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으니까. 낯선 도시 정착 노하우 같은 걸 써보는 게 어때?" 그런 경험이 희귀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글로 쓰면 관심을 받을만하다는 말이었다. 그런가? 다들 옮겨 다니며 살지 않나. 최근 EBS 다큐멘터리를 하도 봐서 그런지 국민 대다수가 이 동네 저 동네 옮겨 살

슬램덩크를 보며 짓는 한숨

2024-11-13T13:59:04Z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시간이 많아졌다.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실 겸 얻은 작은 방에서 보냈다. 습관이 생겼고 그걸 계속 반복하는 일상을 지속했다. 커피, 글 쓰고, 독서, 헬스장, 닭가슴, 샤워. 어 벌써 하루 끝? 이불을 배에 덮고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내일도 또 이렇게 살겠구나. 출근을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한 해 목표와 계획을 미리 정

아주 오래되고 막연한 바람

2023-11-24T10:54:14Z

올해 초 가족 식사자리. 사전 예고 없이 퇴사한 막내아들 등장. 강남 논현의 한 호텔 뷔페에서 모처럼 모인 가족들이 늦게 등장한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다. "너 퇴사한 거 맞지? 지금 그래서 무슨 일을 한다고?" "본업은 작가고 독서모임이랑 글쓰기 모임 운영 하면서 용돈 버는 거예요. 내 1인분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아요." 막내아들은 누가

다이어트 실패 없는 식단 만들기

2023-11-27T09:19:48Z

식단이 운동보다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다. 나도 그중 하나다. 마음껏 먹더라도 운동만 즐겁게 하면 별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대 도시 폼페이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만들어낸 화산재에 삼켜진 것처럼 내 멋진 몸도 살덩이에 묻혀 사라졌다. 그래서 식단을 하면 지방을 걷어내고 근육을 도드라지기 위해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하게 마련이다

책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서평 - 모리가 화요일에 다하지 못한 마지막 이야기

2023-11-26T21:39:24Z

우리는 멘토를 추앙한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더 그렇다. 1998년 IMF 시대에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금융 위기를 겪은 사람들의 지친 가슴에 큰 힘을 주었다. “스승이 지닌 능력의 비밀은 인간을 변모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다.”라는 미국 시인 에머슨의 말처럼 진정한 스승이 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힘들면 뭐라도 붙잡고 싶

모임 중독자의 간헐적 친구들

2023-12-08T14:40:03Z

난 모임 중독자로 살았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별 모임을 다했다. 독서모임 진행자, 영화모임 호스트, 글쓰기 모임 리더, 러닝크루 모임장까지. 난 진행에 익숙했다. 인간관계의 대부분이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난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에 열광했다. 말 그대로 열광이었다. 밍밍한 삶에 맵고 뜨겁고 짠 기운이 들어찼다. 달력을 펴보면 회

박민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