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태어나는 말들을 출간한 뒤로, 2025년 2월 현재까지 줄곧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 작업에 몰두해 왔다. 사람들은 내가 에세이를 쓰는 작가로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카지노 게임? 나조차도 빨리 다음 작품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쫓겨 스스로 질문해보지 않았다.
‘나는 왜 카지노 게임을 쓰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이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일까?’
이 작품은 2023년 11월부터 쓰기 시작하여, 20번의 수정 작업을 거쳐 10개월이 지난 시점인 2024년 9월에 완성했다. 곧바로 어떤 연극단체의 공모전에 보냈으나, 2개월 뒤 결과는 ‘낙방’이었다. 스무 차례나 수정했다는 것은 치열하게 썼다는 뜻도 되고, 엄청나게 헤매며 썼다는 뜻도 된다. 심적으로 지치고 소진된 상태에서 낙방 소식까지 들으니 그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 짓을 왜 했나?’부터 시작하여 ‘역시 난 안 되는구나’, ‘니까짓 게 무슨 카지노 게임이야’ 등등 자책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가장 무서운 건, 이 작품을 다시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라는 강력한 두려움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나는 <태어나는 말들을 책으로 내는 과정에서 수개월간의 인내심과 극기 훈련을 거친 상태여서 예전과 다른 나 자신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곧바로 이 카지노 게임 작품은 폐기되는 수순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실패한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버리고 새로운 걸 쓰는 수순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게 가보자는 생각이 불쑥 치솟기 시작했다. 만약에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회피한 채 다른 작품으로 넘어간다면, 나는 같은 문제를 반복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또한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더 근본적인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러니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작품의 첫 장을 다시 열어볼 수밖에.
2024년 12월, 다시 기운을 냈다. 내가 운영하는 글쓰기 커뮤니티인 ‘자기 해방의 글쓰기 교실’로 돌아갔다. ‘돌아가서 일단 이 작품을 보여주기나 해 보자’ 이런 마음을 먹었다. 여기까지 오기도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치부를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치부도 드러내기를 거리끼지 않는 게 나의 글쓰기 스타일이기도 했다. 이 작품을 동료들에게 읽히고 그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그들과 이 작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서 감정적으로 우울해할 게 아니라, 어떤 부분이 문제이고 어떤 부분이 가능성을 보이는지,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시간을 보냈다.
왜 카지노 게임을 쓰게 되었는지를 짚어보려면 처음 이 작품을 쓰게 된 시점을 되돌아봐야 한다. 이 작품은 아주 가벼운 동기로 시작되었다. 즉, <태어나는 말들이 브런치 당선 통보를 받기 전 시기였기에, 글쓰기의 다음 행보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탐색하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제주 김녕의 작은 책방 ‘일희일비’에서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 워크숍이 열렸다. 거기서 아주 짧은 단막극을 쓰기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호기심과 재미로 짧은 분량만 쓰고 그만둘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성격상 ‘끝을 봐야’ 하는 집요한 데가 있었다. 즉 ‘쓰다 마는’ 것을 아주 질색하는 스타일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번 시작하면 방점을 찍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워크숍이 끝난 뒤에도 혼자서 중후반부를 계속 이어서 썼다. 그 작업이 10개월간 이어졌다.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고민되는 지점은, 이것이 ‘과연 무대 현실화가 가능한가?’였다. 연극에 대해 경험과 지식이 무지한 상태에서 함부로 뛰어든 것은 아닌가, 하는 뒤늦은 후회와 갈급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연극은 2022년 서울에서 본 ‘리처드 3세’가 전부였다. 아, 아니구나, 제주에 와서 2023년에 본 연극 한 편이 더 있었다. 그렇다 쳐도 1년에 한 번 꼴로 연극을 본 셈이니, 매우 적게 본 셈이다. 카지노 게임 대본도 셰익스피어, 안톤 체호프, 뷔히너, 그리스 비극 등 고전 위주로 읽은 게 전부였다. 한국 작품은 <날 보러 와요, <이 같은 영화 원작인 작품이나, 가장 최근에는 배삼식 카지노 게임집을 읽은 게 전부였다. 실제로 현재 한국에서 활발히 공연되고 있는 현대 작품을 충분하고도 심도 있게 들여다본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2017년에는 ‘연극과 인간’이라는 아주 작은 출판사에서 일했었다. 이때 <연극 평론이라는 잡지를 편집하면서 이 시기에 동시대의 한국 연극을 관람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카지노 게임자가 아닌 편집자로서의 경험에 불과할 뿐, 실제 카지노 게임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학생 때 밀양연극축제나 춘천마임축제에 다녔던 경험이나 연극동아리 친구들을 쫓아다니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경험은 더욱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세월을 거듭하여 연극과의 인연은 띄엄띄엄 있었으나, 이런 것들이 실제 카지노 게임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게 문제였다. 왜 도움이 안 되는가 하면, 이때의 경험은 관객과 편집자로서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을뿐더러 지속적인 관심도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거의 경험을 모두 잊고 완전히 리셋된 상태에서 맨땅에 헤딩하기식의 카지노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한창 작업하고 있는 중에는 인물들이 나의 의도와 다르게 자기주장과 자기 흐름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끌려가듯이 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결과물은 일종의 ‘미스터리’ 형식을 띠게 되었다. 막상 동료들에게 이 작품을 보여준 결과 이러한 장르적 성격도 그들에게는 그저 모호하게 다가갔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실험극도 추리물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매우 복잡하고도 혼란스러운 서사를 만들어낸 수준에 그치게 되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왜 카지노 게임을 쓰게 되었나?”에 대한 답은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에세이를 써서 작가로 데뷔했지만, 하나의 장르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갈망이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자기 삶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폐부와 상처를 적나라하게 해부하는 작업에 상당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러한 나의 글쓰기 스타일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핑퐁을 치듯이, 논픽션과 픽션을 오고 가면서 완급 조절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의 에세이는 자기 자신에게 철저해지는 과정이었으며, 카지노 게임 쓰기는 완고함에서 벗어나 자유와 유연함을 부여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또 에세이가 내가 당면한 현실을 직시하고 해석하는 과정이라면, 카지노 게임 쓰기는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고 도약하는 과정이었다.
카지노 게임을 쓰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내가 아닌, ‘살아 있는 타인들’이 몸과 목소리를 가지고 약동하는 과정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에세이는 나의 시각과 관점을 정교하게 다듬고 논리를 구축해 가는 과정이라면, 카지노 게임은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타인들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으로 빙의되는 ‘놀이’와 같아서, 나는 나 자신에게서 해방되는 또 다른 출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에세이 쓰기에서 받은 긴장과 스트레스가 카지노 게임 쓰기에 와서 즐거운 놀이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흐트러뜨리기, 죽은 자와 산 자가 대화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이 작품의 카지노 게임 과정은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맛보게 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에세이와 카지노 게임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유를 찾아 떠나는 일이었다. 철저한 해부와 즐거운 놀이의 방식으로.
나는 실패에 익숙한 사람이지만, 이제는 안다. 실패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며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이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의 시간을 ‘실패’라는 말로 규정짓지 않기로 했다. 글쓰기는 언제나 나를 다른 자리, 다른 위치에 서 있게 하기 때문이다. 장르에 갇히지 않는 글쓰기, 실패의 부단한 경험이 쌓인 후에 나는 또 어떤 자리에 서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