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게임과 중립이 위험한 이유
브런치에 글을 쓴 지 어느덧 6년째다. 초반에는 ‘무조건 나라는 사람(내가 쓴 글이나 카지노 게임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 차체에 문제가 있다는 식)이 잘못되었고 자기가 옳다고 맹비난’을 쏟는 악플이 꽤 많았다. 채널에 정체성이 생기면서 악플러들은 자기들의 억지가 더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순간 하나둘 사라졌다. 최근에는 순화한 악플이라고 해야 하나. 합리성의 가면을 쓴 새로운 형태의 악플이 등장했는데 이런 식이다.‘카지노 게임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다’, ‘상처받는 사람이 없도록 신경써 줬으면 좋겠다’ ‘중립을 지켜주길 바란다’– 처음에는 이러한 의견에 나 자신을 의심했는데, 이들의 속내는 ‘내 카지노 게임이 ‘자기’가 듣기에 불편하니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다.자기의 카지노 게임은 존중해 달라면서 정작 상대방은 표현하고 말할 권리를 제한하고 무시하는 것으로 카지노 게임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었다. 카지노 게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카지노 게임을 파괴하고 있었다.
어제 모처럼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자연스레 윤석열 대통령(이제는 전 대통령) 탄핵 심판 결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헌법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탄핵이 인용된 이 상식적인 결과에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같이 기뻐하고 한시름 놓았다고 공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축제 분위기가 조성되기 무섭게 ‘오늘은 민감한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말을 조심했으면 좋겠다’라는 의견이 등장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정말 당황했고 큰 충격을 받았다. 축제 분위기는 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어색한 침묵만이 이어지다 그 자리는 일찌감치 파하고 말았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불편할 수 있으니 말을 자제하길 바란다’는 그럴듯한 카지노 게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는 순화한 악플, 합리성의 가면을 쓴 억지에 다름 아니다.공정하고 중립적인 채 하지만 카지노 게임을 존중하길 바란다는 주장으로 오히려 또 다른 누군가가 말하고 표현할 자유를 박탈하며 카지노 게임을 파괴하고 있었다. 일순간 독재 국가로 전락할 뻔했던 나라의 일상에는 이미 독재인 줄도 모르는 독재 근성이 뿌리 깊게 스며들어 이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었다. 윤석열 씨가 대통령에 당선돼 독재 국가라는 망상을 꿈꿀 수 있었던 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말처럼 우리의 의식 수준이 반영된 결과였고, 우리 사회에서 생각보다 많은 이들은 여전히 이 영향에 놓여있으며 앞으로도 놓여있을 터였다.
카지노 게임을 주장할수록 카지노 게임이 무너지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내가 생각하는 카지노 게임의 존중이란 차별과 혐오를 멈추고 내 관점에서 벗어나 타자를 이해하려는 자세, 행동이다. 그런데 ‘그저 자기감정이 불편한 것을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내가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카지노 게임의 부족을 탓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느낀다.카지노 게임 존중한다는 의미를 잘못 이해해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생각의 차이 즉, 관점이 다른 것과 옳고, 그름을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과 상벌의 잣대를 적용해야 할 때 카지노 게임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잘못을 잘못이 아니라 다른 것이니 이해하고 인정해 달라는 정서가 확산하다 보니, 도덕적 해이가 팽배해져 법과 제도, 질서가 무너지는 혼란이 야기되고, 점점 양극단으로 치닫고 오히려 카지노 게임의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다수가 이 혼란에 놓여있다 보니 누군가가 카지노 게임, 중립, 존중과 이해를 억지 주장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내세우면 쉽사리 잘못을 잘못이라고 지적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것으로 갈등을 회피하며 자기도 모르게 카지노 게임의 가치를 훼손하는데 일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카지노 게임의 역설이자 악순환의 반복, 총체적 난국, 아노미 상태이다.
‘사과는 빨갛다’라는 카지노 게임에 아오리를 내밀며 ‘사과는 연두색이다’라는 의견은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버젓이 눈앞에 존재하는 사과를 두고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사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과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라는 사람과는 현실적으로 대화는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와 어머니, 전남편 등이 이런 부류의 사람이고, 혼란 속에서 오랫동안 분투하다 결국은 관계가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바라봐야 할 때 ‘(자기에게) 좋고 나쁘고’의 기준을 적용하는 이들은 대체로 가치관이 불분명해 타인에게 휩쓸리기 쉬우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의견을 수용하는데 미숙하고, 정에 약하면서도 권위적이거나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경험적으로 이러한 부류는 변화가 쉽지 않고, 설득하려고 해도 관계만 악화하며, 상처와 절망감만이 돌아온다고 잘 알고 있다.
이번 모임에서 카지노 게임의 존중을 근거로 도리어 표현의 자유를 막아버린 이들도 이 부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가치관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이들과 내 입장에서는 앞으로 잘 지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으로는 흔히 말하는 손절 리스트에 이미 올려놓고 있다. 그런데이들의 행동과 상식이 잘못된 것과는 별개로 궁금해졌다.국회에 군인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한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난 것을 기뻐하고 안도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중립을 카지노 게임하며 정치적인 이야기를 자제하자는 말이 폭력을 지지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섣불리 관계를 단절하기보다 내 관점이 아니라 그 사람의 관점에서 상상하며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회피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음에도 그 생각과 행동의 이유를 한번 즈음은 들어보고 싶어졌다.나 또한 카지노 게임의 존중을 말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실천하는 노력을 기울여보고 싶어졌다. 그 첫걸음은내 생각이 옳다고 카지노 게임하거나 나를 이해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는 침묵하고 상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경청하려는 자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무너진 법과 질서가 회복돼 옳고 그름의 잣대가 바로 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상에서는 나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무조건 배척하기보다 딱 한 번이라도 상관없으니 그들의 표면적인 주장이 아니라 그 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갈등을 봉합하는데 할 수 있는 실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지 않으면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 가능성은 없으니까 어렵지만 노력해보고 싶어졌다. 법과 제도, 의식으로써 옳고, 그름은 바로 서야 하지만 세상이나 인간관계는 또 옳고 그름으로만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국회는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하였어야 합니다.
피청구인 역시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협치의 대상으로 존중하였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청구인은 국회를 배제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는 민주정치의 전제를 허무는 것으로 민주주의와 조화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청구인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이 사건 계엄을 선포함으로써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를 재현하여 국민을 충격에 빠트리고, 사회․경제․정치․외교 전 분야에 혼란을 야기하였습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을 초월하여 사회공동체를 통합시켜야 할 책무를 위반하였습니다.
군경을 동원하여 국회 등 헌법기관의 권한을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함으로써 헌법수호의 책무를 저버리고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대한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하였습니다.
결국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반행위에 해당합니다.
_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