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두 이야기
완성된 선화와 주완의 이야기는 엄청난 분량이었지. 심사위원인 윌리엄, 조지, 가브리엘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읽어야 했어. 윌리엄은일전에 약속한 대로 공정한 판정을 위해 심사에 심사를 거듭했지. 감탄사를 연신 쏟아내면서 말이야.
"오! 단 하나의 사랑, 일생의 그리움, 둘은 나의 은인이요."
나는 심사가끝날때까지 선화와 주완에게 저승 곳곳을 소개해 주었어. 주완이 내게 질문했지.
"깜두, 환생센터는 부서가 참 많은 것 같아요. 지옥 부서나 천국 부서도 있는 거죠?"
"그럼요. 부서가 아주 많죠. 제가 근무하는 축생 부서만 해도 지구상의 동물의 종류만큼 하위 부서가 또 있는걸요."
"저희는 축생 부서에 온 거니 오디션 결과에 따라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겠네요. 어떤 동물로 환생할지 알 수 없나요?"
이번에는 선화가 질문했지.
"네. 결정은 심사위원들이 해요. 바로 이전에 있던 영은 오디션에서 만장일치 합격은 못했지만, 전생에 선행을 인정받아 자신의 선택대로환생할 수 있었어요."
"정말요? 혹시 저희도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뭐로 환생할지 고민해 봐야겠어요. 전 주완이랑 같이 가게 된다면 그 무엇이라도 좋지만요."
"조언을 좀 드리자면 축생 부서에서 최상의 환생은 주인의 사랑을 받는 애완동물의 삶이에요. 전생에서 쌓은 선행이 어마어마해야 가능하지만요."
둘의 질문은 끝이 없었고 그 뒤로도 한동안 우리는 저승 곳곳을 다니며 길어지는 심사를 기다렸지. 심사가 늦어진다는 건 심사위원들의 고심이 깊다는 거지. 윌리엄의 충격적인 귓속말에 따르면 둘은 당연히 만장일치 합격일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었어. 결국 기다리다 못해 내가 직접 창작 교실로 윌리엄을 찾아갔다니까.
"윌리엄, 심사 결과 발표가 너무 늦어지는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집필실에서 나온 윌리엄은 못 본 사이 수척해져 있었어.
"오~ 내 친구 깜두, 안 그래도 이제 막 결과를 알려줄 생각이었소. 내 고민이 너무도 깊었소. 아주 중요한 심판이 될 거라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는 것만 알아주시오. 그리고 선화와 주완에게 깜두 당신의 정체를 밝힐 준비를 해주시오."
"결국 마음을 바꾸지 않았군요. 윌리엄, 내게도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지요."
이번 오디션의 심사는 축생 부서뿐만 아니라 저승에서 아주중요한 일이 되었지. 카지노 게임은 오래전부터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이야. 특히 관리직이 매우 부족하지. 카지노 게임에는 열 명의 왕이 있는데 죽은 이들을 심판하는 판관의 역할을 해. 현재 고위 관리직인 왕조차도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야. 이건 비밀인데 윌리엄은 창작 교실을 운영하면서 카지노 게임의 제2 왕 판관직을 겸하고 있어. 저승 왕들의 우두머리인 염라대왕은 한사코 거절하는 윌리엄에게 원하는 시점에 한 가지 소원을 꼭 들어주겠노라 약속하고, 겨우 판관직을 맡겼어. 그리고 윌리엄은 얼마 전 그 소원을 말했지. 염라대왕은 약속대로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게 되었고 말이야.
선화와 주완의 심사 발표가 있는 날이야. 환생센터 축생 부서에 있는 가장 큰 무대에서 발표한다고 했지. 카지노 게임의 모든 왕과 각 부서의 부서장까지 관리직은 전원 참석하도록 했어. 축생 부서에서 중대 발표를 한다고 공지했거든. 무대에 오른 윌리엄은 긴장한 모습이었지.
"안녕하십니까. 이번 오디션의 심사를 맡은 윌리엄입니다. 드디어 축생 부서에서 만장일치 합격자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두 명이나 말입니다. 합격자 두 영을 이 자리에서 소개하고 심사 과정을소상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또한 중대 발표가 이어지니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나는 무대 뒤에서 선화와 주완을 데리고 나갔어.
"축하해요. 둘은 축생 부서 역사상 최초의 합격자예요. 어서 무대 앞으로 나가 기쁨을 누리세요."
둘은 무대 위에 섰고 서로를 보며 함박웃음을 머금었지. 나는 무대에서 내려와 관중석에 앉았어.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웠어. 무대 한편에 서 있던 윌리엄의 심사 결과 발표가 이어졌어.
"축생 부서는 저승에서도 악도에 속하는 만큼 오디션에서 만장일치 합격을 얻어내기가 매우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축생률 100%라는 결과가 그 악명을 증명하고 있죠. 최초의 합격자인 두 영은 전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입니다. 인간이 나고 죽는 일은 하늘의 뜻으로 자살은 악행이 자명합니다. 그럼에도고심 끝에 만장일치 합격을 결정한 연유는, 이들에게서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자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승에서일생 내내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카지노 게임은 자비를 행할 고위직이 부족합니다. 염라대왕께서 카지노 게임의마지막 오디션 정책을 펼치신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또한이번 두 영의 작품을 모든 관리직에 배포하여 자비의 마음을 거듭 일깨우라 명하셨습니다."
윌리엄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심판을 이어갔지.
"카지노 게임의 제2왕 판관인 나 윌리엄은 지금부터 두 영에게 명한다. 두 영은 심사위원의 공정한 심사 결과에 따라 만장일치 합격을 얻은 바,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의 고리를 끊어더 이상의 환생은 윤허하지 않겠다. 그러나 하늘의 뜻을 어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죗값은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게 카지노 게임의 법도, 이에 따라 주완에게 내 뒤를 이어카지노 게임의 제2 왕 판관직을 명하며 인간의 영, 삼만 삼천삼백의 심판을 맡기노라. 다음으로 선화…."
무대 아래 관중석에 앉아 있던 내가 윌리엄에게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지. 나는 이승에서 주워온깜장 선글라스 끼고 무대 위로 걸어갔어.무대 위에 서서 가장 멋진 포즈를 "짜잔"하고 취했어. 순간 무대 조명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나를 비췄지. 아주 만족스러운 등장이었어.
"후훗, 드디어 나의 정체를 밝힐 시간이 왔군!"
"꺄아악~ 깜두, 엄청 귀여워요."
선화였어. 나를 보곤소리를지르며 난리였지. 이 모습으론 뭘 해도 귀여운 거야. 팔다리가 유독짧아서 더욱 그렇지. 나는 선화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어.
"아하하하하~ 나는 카지노 게임의 우두머리 염. 마. 라. 사!"
모두 입을 쩍 벌렸고관중석에는정적이 흘렀어.
내 원래 이름은 염마라사, 인간들에겐 염라대왕이라고 알려져 있지. 나는 카지노 게임 왕들의 우두머리이자 제5 왕 판관직을 맡고 있어. 고요하고 뻘쭘한 분위기에서 난 멋진 포즈를 취한 채 그대로 얼음이 되었지. 나를 구해준 건 내 친구 윌리엄이었어.
"염라대왕이 고양이라니, 믿기지 않을 겁니다. 사실 염라대왕께서 얼마 전부터 축생 부서의 저승사자로 파견 근무 중이셨습니다. 고양이모습으로 변한 것은 인간 친화 정책의 일환입니다. 자신의 권위와 위엄을 모두 내려놓고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가신거죠."
윌리엄의 말이 끝나자 관중석에서 하나둘 일어나 박수를 보내며 환호성을 질렀지.
"염라대왕, 만세! 만세! 만만세!"
나는 깜장 선글라스를 벗고 모두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어. 두 발로 서서 짧은 한 발을 배에 대고 허리를 굽혔지. 비록모습은고양이였지만 목소리만큼은평소처럼 진지하고 위엄 있게 가다듬었어.
"다들자리에 앉으라. 내 모두를 부른것은 중대 발표를 하기 위함이라. 나의 임기가 끝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카지노 게임은 자신의 자리를 대체할 영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직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나는 이번 오디션에서 인간 영의 가장 위대한 본질을 보았다. 우리 카지노 게임의 관리직은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영을 대해야 한다. 자비의 바탕은사랑이다. 환생센터에 머물며 영들은 자신의 천성을 되찾게 되며, 천성에 사랑이 가득한 이들이야말로 카지노 게임에꼭 필요한 인재다. 두 영은 전생 내내 사랑을 지켜내었다. 서로를 볼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오랜 세월에도사랑의 마음은 변함없이 한결같았다. 두 영과 함께 하며 고심한 바, 선화에게 내 뒤를 이을 카지노 게임의 우두머리염마라사, 제5 왕 판관직을 명하겠다. 주완과 함께인간의 영 삼만 삼천삼백의 심판을 맡기노라."
나는 마음이 깃털만큼 가벼워졌어. 저승에서 제5 왕 판관직을 명 받은 지 그 언제던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해. 이미 오래전 임기를 마쳤음에도 나를 대신할 영이 없었지. 고민 끝에 나는 직접 그 영을 찾아 나서기로 했어. 저승사자가 되어 이승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기 시작했지. 내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천상 부서였어. 이곳으로 오는 인간들은 선함 그 자체니까. 그들은 전생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선행을 베풀고 와. 그렇기에 저승에는 천상 부서 출신 관리직 비중이 제일 높지.
문제는 천상 부서의 부서장이 바뀌면서 일어났어. 부서장은 너희도 알고 있는 '바이올렛'. 바이올렛은 나의 친구이자 철천지원수이기도 해. 부서장을 맡자마자 천상에 오는 영들의 소원을 한 가지씩 무조건 들어주었다고! 그리고 영들의 소원은 놀랍게도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어. 고통 없이 기쁨만 가득한 천상을 마다하고 수많은 영이 굳이 다시 인간이 되어 이승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고. 이는 저승 인력난의 원인이 되었어. 천상 부서에서 관리직이 넘어오지 못하자 타 부서에서 그 많은 인력을 채워야만 했지. 카지노 게임은 일대 혼란에 휩싸였어.
카지노 게임 관리직의 제1 원칙,
반드시 자비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저승에 오는 영들을 심판하는 판관들은 자비의 마음을 지닌 영을 눈에 불을 켜고 찾기 시작했지. 임기가 끝나고도 자신의 직을 내려놓지 못하는 고위직들의 불만은 나날이 쌓여만 갔어. 나는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어. 저승 왕들의 우두머리니까. 그래서 제일 먼저 모든 부서에 마지막 오디션을 실시하라 명했어. 심사위원 만장일치 합격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지만 말이야. 합격자에겐 특전으로 저승 고위직 보장을 약속했지. 자비로운 인간들이 고위직으로 넘어오길 바라면서.
나는 또 극심한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겸직을 허용했어. 윌리엄은 그 정책의 피해자 중 하나였지. 저승 열 명의 왕들은 다들 비밀리에 카지노 게임사자도 겸하고 있어. 직접 자신의 자리를 대체할 영을 찾아 이승을 누비고 있지. 찾지 못하면 영원히 판관직을 수행해야만 하니까.
세상에 가장 큰 형벌이 있다면 그건 같은 일을 영원히 반복하는 거야. 천상 부서에 오는 영들이 그토록 원하던 행복을 내려놓는 것도 바로 계속되는 반복에 있어. 영원히 행복한 것, 영원히 즐거운 것, 이처럼 무료한 건 없어.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지.
산다는 건행복과 불행이 연속되는 도미노 같은 거야. 행복이 계속되면 언젠가 그 행복은 다음 도미노를 쓰러트리지 못해. 불행도 계속되면 그 불행은 다음 도미노를 넘어트릴 힘을 잃고 말지. 불행의 끝에서 찾아오는 행복, 행복의 끝에서 찾아오는 불행. 행복과 불행은 서로를 넘어트릴 도미노이자 서로의 이면이지. 둘은 함께 할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고. 나도 이제 이 무료한 행복을 뒤로하고 생생한 불행을 맛보러 돌아갈 거야.
"야호! 드디어 해방이다."
아뿔싸, 나는 그만 마음속에 있던 말을 내뱉고 말았지. 선화에게는 아주 조금 미안하지만, 누구보다 카지노 게임의 우두머리인 제5 왕 판관직을 잘 해내리라 믿어. 선화는 사랑 그 자체인 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