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오래 달리기를 잘했다. 100미터는 아무리 달려도 꼴찌였지만 1200미터 오래 달리기는 버티는 맛이 있었다. 0.1초라도 더 빨리 뛰어나가겠다며서로 견제하지 않고, 출발선 근처에 모두가 뭉뚱그려 서 있는 것도 좋았다. 처음부터 어깨를 밀어내면서 빠른 속도로 앞서 나가는 아이들도 분명 있었다. 괜찮다. 앞으로 갈 길이 구만 리다. 끝까지 달리려면 느긋한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한 바퀴, 두 바퀴 운동장을 돌다 보면 아이들이 하나, 둘 뒤로 쳐진다. 자연스럽게 내가 조금씩 선두가 된다. 마지막 바퀴, 심장이 터질 듯 아프고 입이 바짝 마른다.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울려 퍼지는 명쾌한 소리."만점!"하아, 땅에 털썩 주저앉아 드러눕는다. 하늘이 파랗다.
오래 달리기의 관건은 페이스 조절이다. 처음부터 욕심껏 속도를 내면 제 풀에 지쳐 쓰러진다. 자신이 얼마나 버티며 달릴 수있는지 알아야 한다. 조금 느리더라도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말 그대로 '빨리' 말고 '오래' 달리는 게 요령이다. 치타처럼 순간 스퍼트를 내는 능력은 없어도 뭉근히 오래 버티며 조금씩 앞으로 앞으로 나가는 힘. 그 힘이 내게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살아가는 일은다양한능력을 요하지만크게 보면 순발력과 지구력이 양팔저울처럼 오르내리며 삶의 균형을 이룬다.소싯적 했던 기자일은 순발력이 생명이었다. 취재한 정보가 기삿거리가 되는지 판단하는 일도, 적절한 인물을 찾아 인터뷰를 하는 것도, 취재한 모든 것을 취사 선택해서 논리적으로 글로 풀어내는 것도 잽싸게 해야 한다. 이게 맞을까, 기사가 될까, 조금 더 취재해서 다음에 크게 양을 불려서 쓸까, 고민하다가는 기차가 떠난다. 아이스크림은 손에 쥐고 있으면 녹고, 기사는 묵히면 똥 된다고 선배들은 자주 말했다. 타고난 순발력이 없다면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인맥을 쌓고 맡은 분야에 전문지식을 쌓고 나면 없던 순발력도 '짬'이라는 이름으로 생긴다.
시간이 갈수록 인생의 정면 승부는 인내심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동도 오래오래, 글도 오래오래, 매일 조금씩 성실하게 하다 보면 차곡차곡힘이쌓인다.고소하고 달콤한 페스츄리의 얇고 섬세한 겹이 수십 장 쌓일 때 이뤄내는 폭신하고도 바삭한 맛. 내 인생의 맛은 그렇게 별 것 아닌 듯 얇게 이뤄내는 하루의 결과다. 그럼에도 내작은 날갯짓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아 자주 실망하고 좌절한다. 운동해도 뱃살은그대로이고, 책을 읽어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고, 만날 고만고만한 글만 생산하는 것 같다는 자괴감탓이다. 마트 바닥에 앉아 과자를 사달라고 떼쓰는 다섯 살 아이처럼 결과가 내 손에 쥐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며 손을 놓고 멍하니 앉아 혼자 툴툴거리기도 한다.
이승우 작가는 <고요한 읽기에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 계속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다른 사람이 기울인 노력과 얻은 성과를 저울질해서 자기와 비교할 때 불만과 원한이 생긴다." 자신의 계획대로, 할 수 있는 만큼 달리다가도 나보다 앞서가는 이를 발견하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인간이다. "칭송과 동정은 실제의 에너지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그것들을 피해야 한다.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보상이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시몬 베유의 말처럼 내 인생을 살아가는 건 남이 주는 칭찬과 동정이 아니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시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의힘을 아는 사람만이 뚜벅뚜벅 나아간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어서 잠시의 욕심과 애씀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암 투병 중인 지인은 하루를 읽고 쓰는 일로 채운다. 암세포가 뇌를 공격하기 시작한 후, 운전도 불가하고 운동도 힘들어졌다. 시신경이 공격을 받는 날이면 전등 꺼지듯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그때부터는 읽고 쓰는 일도 되지 않을거라고 한다. 언제까지 글을 쓰겠냐고, 언제까지 써야 좀 잘 쓸 수 있겠냐고, 글 쓰는 이들은 투정 부리듯 외친다. 언젠가는, 쓸 수 있을 마지막 그 언젠가는 지금보다 단순하고 간결하며깊어진 글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긴 카지노 가입 쿠폰 오래 달리기 하듯, 작가의 조언처럼 말이다. "언제까지 쓸 거라고 미리 결심할 필요가 있을까. 글을 쓸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