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카지노 가입 쿠폰(알바 데 세스패데스)을 읽고
10년 일기장을 쓴 지 어느덧 4년째다. 이전에는 간헐적으로 일기를 쓰다 말다를 반복했지만, 이 일기장으로 바꾸고 나서는 꾸준히 쓰고 있다. 한 칸의 공간이 크지 않아 많은 글을 쓸 수는 없지만,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기록한다. 4년이라는 시간이 쌓이자 작년, 재작년, 재재작년의 같은 날 무엇을 했는지 돌아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 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패턴이 보이고, 사람 사는 게 참 별 거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일기장은 거실 중앙 책장에 꽂혀 있다. 나는 방도, 책상도 없고 크고 두꺼운 일기장을 딱히 둘 곳이 없어 둔 것이 제 자리가 됐다. 처음에는 혼자 있을 때만 일기를 썼다. 하지만 그렇게 조용한 순간을 기다리다 쓰지 못하고 넘어가는 날이 많아져서, 이제는 아이가 옆에 있든 남편이 있든 상관없이 그냥 쓴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꺼내 볼 수 있는 일기장인걸. 그날 있었던 일과 누가 보더라도 상관없는 안전한 감정만을 기록한다.
이 일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저 어느 지역에 여행을 갔는지, 어느 식당에 갔었는지를 나중에 추억하기 위한 일기인가. 일기를 매일 쓰지만 여전히 나에겐 대나무숲이 없고, 일기장을 덮는 마음이 공허하다.
신간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금지된 일기장』을 발견하고 바로 주문했다. 솔직한 마음을 일기에 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이탈리아, 문구류는 안되고 담배만 살 수 있는 일요일에 비밀스럽게일기장을 사서 가족들 모르게 일기를 쓰고 숨기는 발레리아의 이야기는 너무도 흥미진진했다. 단지 일기를 몇 줄 쓰는 행위가 이토록 서스펜스 넘치는 일이 될 수 있다니.
지나치게 내 생각에 몰입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한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 잠시 나를 잊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나치게 깊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예컨대 미렐라가 늘어놓는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기만 해도 심신이 한결 평온해질 것이다. 나를 사로잡은 이 불안감이 일기장을 산 날부터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갈수록 확고해진다. 일기장에 사악한 악령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일기장을 잊으려고 가방이나 옷장 속 깊숙이 처박아두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집안일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시간에 쫓기면 쫓길수록 더 절실하게 일기를 쓰고 싶었다. -202쪽
1950년대 여성의 일기에서 이토록 많은 공감대를 발견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일기를 쓰는 일조차 비밀로 해야 하는 그녀를 동정했지만, 생각보다 우리는(그래,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다. 43세라는 나이, 남편과 아이가 있는 유부녀이고, 일기를 쓰며, 새벽에 깨어 있고, 직장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공간이 없고, 때로는 회사가 더 편하다. 때로는 자식이 지겨울 때도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는 나만을 위한 서랍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11쪽
하지만 그녀는 나와 다르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일기에 쏟아내고 모든 비밀을 기록한다. 그 과정에서 그저 행복하고 단란하다고만 생각했던 가정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 자신도 몰랐던 욕망을 발견하고, 가족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은 힘이 세다.
그는 나를 보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는 아이들과 마리나와 칸토니와 평생토록 설거지한 산더미 같은 접시들과 남편이 사무실에서 보낸 시간과 내가 내 사무실에서 보낸 시간과 어젯밤처럼 냄비에서 나오는 김 때문에 보이지 않는 눈을 비벼가며 끓은 수프가 있었다. - 323쪽
읽을수록 이 사람은 감히 동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용기 있게 모든 것을 일기에 털어놓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고, 글로 쓰고, 욕망을 인정하고, 새로운 사람이 됐다. 가족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오늘 저녁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삶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모든 경험은 삶이란 결국 결론을 내리려는 절박한 노력과 실패의 반복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적어도 내 삶은 그랬다. 모든 것에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심지어는 유한함과 무한함까지도. 젊은이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 411쪽
일기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발레리아의 일기가 그랬듯, 진정한 일기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내면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일이다. 그래서 때로는 위험하다.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는 일은 두렵고, 그것을 글로 남긴다는 것은 더욱 두려운 일이니까. 발레리아를 보니 그 두려움을 견디고 나면 비로소 진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껏 안전한 일기를 써왔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거실 책장에 꽂힌 일기장처럼,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담아왔다. 하지만 어쩌면 진정한 일기란 그 반대여야 하는 게 아닐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때로는 나 자신조차 직시하기 힘든 진실을 마주하고 기록하는 것. 그래서 발레리아는 일기장을 사야 했고, 그것을 숨겨야 했고, 결국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시간이 흘러도 사람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다. 70여 년의 시간을 건너 발레리아의 일기를 읽으며,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일기장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은신처이자 자아를 발견하는 공간이다. 다만 그 공간을 어디에 두느냐가 달라졌을 뿐. 발레리아는 서랍 깊숙이 일기장을 숨겼지만 진심을 담았고, 나는 거실 한가운데 두었지만 그 속에 진심을 감추고 있다.
일기장을 불태우기로 결심한 후 발레리아는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하다. 정말로 일기장을 태웠을까. 일기를 쓰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나는 그녀가 끝내 일기장을 태우지 않았기를 바란다. 어쩌면 더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진짜를 담은 그 일기장처럼, 자신의 욕망도 온전히 간직한 채 살아갔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제는 거실 말고 다락방에 올라가 아무도 모르게 일기를 써볼까. 내 안에 어떤 욕망이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진짜 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