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20주차
임신 확인을 하고 임신한 사람들이 주로 설치해서 참고한다는 어플을 2개 깔아 참고하고 있다. 임신 주차에 따라 달라지는 몸 상태도 참고하기 좋고, 이 시기의 태아 크기는 사과씨 정도 크기라는 등 귀여운 표현으로 매주 커가는 아이의 상태를 가늠할 수 있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어플이다. 이 어플에 가입하면서 했던 정보 제공 동의로 이것저것 영업 전화를 받기도 했다. 어플에 제휴 스튜디오라고 연락을 준 곳은 만삭 사진, 신생아 사진, 100일 사진에 대한 설명을 했고. 제휴 보험 상담사라는 분은 보험 가입을 하면 받을 수 있는 사은품 목록을 설명하며 가입 생각 있으시면 꼭 연락 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다른 보험사와 비교를 해볼까 하는 마음에 내 연락이 늦어지니 살뜰하게 몸 상태는 괜찮으시냐며 챙기는 연락도 해왔다.
좀 더 조건이 좋고 많은 항목을 보장해 주는 다른 보험사와 고민을 하다가 고민해 봤자 결국 다 비슷비슷하겠지 이 기회에 사은품 많이 주는 곳에서 가입하자는 마음에 미루던 보험 가입 연락을 했다. 그분은 나의 연락을 반가워했다. 나도 안심이 되었다. 이곳으로 태아 보험을 가입하면 출산 전 어려운 결정 하나를 끝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반가운 인사말을 나눈 후 카지노 게임을 위한 정보를 물어오셨고 나는 단태아가 아니라 쌍태아라는 사실을 반갑게 전했다. 카지노 게임건수가 1건이 아니라 2배가 된다는 단순한 생각도 있었고, 나의 카지노 게임을 기다려준 이분이 더 반가워할 것 같기도 했다.
“아. 쌍둥이시군요. 다른 보험사의 상품도 비교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건조한 답변이 무척 쌀쌀맞게 느껴졌다.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입덧도 아직 지나지 않은 상태라 컨디션도 좋지 않아 그런지 그분의 말에 그러지 않아도 될 텐데 상처까지 받게 되었다. 생각지 못한 분위기의 대답에 나는 당황했고 말에 묻어있는 거절의 의사를 바로 알아챘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제야 쌍둥이 육아 카페에 검색어를 입력해 다른 분들의 후기를 찾아봤다. ‘쌍둥이 태아보험 가입’ ‘보험 가입 거절’ 등등 키워드를 간단하게 입력만 하니 수십 수백 개의 거절 후기를 읽어볼 수 있었다. 쌍둥이는 비교적 작게 태어나고, 조산의 위험이 커서 보험사에서 가입을 꺼린다. 가입 승인이 되더라도 비싸고 가입 절차가 복잡해서 관련 서류를 챙기다가 지쳐서 가입을 포기했다는 사례도 있었다. 쌍둥이 임신 중이라 몸이 힘든데 보험사에서 환영받지도 못하니 속이 상했다는 후기도.
글을 읽다 보니 내가 태아보험 가입을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하고 마음만 더 급해졌다. 검색창에 쌍둥이 보험 가입 후기를 뒤져보기 시작했고 보험 가입에 성공했다는 블로그의 글에 댓글을 남겨 설계사님을 소개받을 수 있는지 부탁드려 겨우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
다행히 쌍둥이 보험 가입을 전문적으로 해주시는 분이셨고 보험 가입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것에 미안해하면서 나의 마음을 내내 살펴주시는 분이셨다. 원하던 가입 상품으로는 진행이 어려웠지만 보험 상품의 빈틈을 꼼꼼하게 챙겨주시고 설명해 주시면서 눈치 보게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 자체에 너무 감사했다.
그래도 시험관 시술을 통해 임신한 쌍둥이라 시험관 시술 관련 진료기록지, 일반 산부인과를 다니면서 임신 중독증 예방을 위해 처방받은 아스피린에 대한 소명, 현재 아무 이상이 없고 태아와 산모가 건강하다는 정밀초음파 결과 등을 제출해야 했다. 졸업한 서울의 난임병원까지 꿀렁꿀렁 입덧을 달고 다녀와야 했다.
오랜만에 타는 서울 지하철을 그날 유독 꽉 차있었다. 평일 오후에 다들 어디를 그렇게 가는지. 내가 회사 사무실에 앉아 일할 때 바깥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답답한 지하철에 발을 내디뎠다. 훅 사람들의 채취가 코를 찔렀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냄새는 완전히 차단되지 않아 주머니에 넣어온 비닐봉지가 잘 있는지 토할 것 같으면 냉큼 꺼내서 봉지를 귀에 걸어야지. 생각했다.
임산부 배지를 차고 지하철에 들어서는 나를 보셨는지 중년의 여성분이 저 멀리에서 나에게 손짓을 하며 오신다. 그리고 나를 이미 누가 앉아있는 임산부 배려석 앞으로 데려간다.(아. 이래서 임산부 배려석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탔는데...) “앗.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몇 주 전 임산부 배려석을 양보받는 과정에서 “배가 얼마 나오지도 않았구먼.” 하면서 면박을 줬던 중년 여성분이 생각나 나는 자꾸 손을 내저었다. 자리를 안내해 주신 분은 머쓱해하시며 배려석에 앉아 눈을 꼭 감고 있는 여성을 괜히 째려보셨다. 나는 서둘러 저 멀리로 가려고 자리를 떴다. 몇 초나 지났을까 “아가씨. 아가씨. 아니다 아가씨는 아니지 호호. 여기 자리 났어요.” 하면서 나를 다시 끌어오신다. 그러면서 “이걸(임산부 배지) 앞으로 이렇게 내놓고 다녀야지.” 하면서 내 가방의 배지를 고쳐 매 준다. 사람들 눈에 잘 띄게. 그리고 나를 분홍색 임산부 배려석에 앉혀줬다. 그리고 뿌듯하게 웃었다.
우연히 마주치는 귀하고 예쁘고 고마운 여자들이 오늘도 나에게 다정을 준다.
그렇게 따뜻하게, 울렁거리게 난임병원에 도착해서 서류를 한 묶음 받았다. 읽어봤자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었지만, 그간의 과정이 이 종이들 안에 녹아있다 생각하니 괜히 뿌듯했다. 급하게 몇 장 찍어 증빙 서류로 설계사님에게 제출했다. “아이고. 벌써 병원에 가셨어요? 너무 고생하셨네요.”
그리고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원무과 선생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서류 많은데 다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친절하게 잘 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울먹거리는 바람에 말 끝이 흐려졌다. 선생님은 뜻밖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밝게 대답했다. “아이고. 제가 감사합니다. 순산하세요!” 이분이 밝고 크게 웃으면 이런 모습이구나 배가 괜히 뜨거워지고 가슴이 꿀렁 기분이 좋아졌다.
나에게 건너온 다정을 타인에게 건네주고 다시 돌려받고. 오늘은 그런 다정의 순환을 온몸으로 느낀 그런 날이었다.
이날 준비한 서류를 추가 제출하고 쌍태아 보험 가입은 순탄하게 마무리되었다.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쌍둥이 임신부는 신기하게 이쯤부터 토덧(구토를 하는 입덧)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