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이 책은 꼭 모든 것을 소화해 내고 가겠다는 책이 몇 권 있다.
소개하자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와 '오디세이아', 단테의 '신곡',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그리고 허먼 멜빈의 '모비 딕'이다. 그저 단순히 글을 읽고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신화적, 신(神) 학적, 철학적, 문학적, 인류학적 등등의 배경지식을 가지고 위에서 음식물을 영양분으로 몸으로 흡수하듯 내 영혼에 새기고 싶은 책들이다. 물론 이 모든 실물의 책을 이미 집에 다 모셔두긴 했다. 하지만 영혼에 아로새길 용기 또는 자질에 대한 엄두가 나질 않아 10년이 넘게 묵혀왔던 책들이 되겠다.
요즘 그중 첫 번째로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읽기를 갑자기 시작하게 되었다.
모르는 내용은 하나하나 위키백과나 나무위키를 찾아가며 읽으면 되고, 다행히 철학 책을 많이 읽고 17세기에서 18세기 그리고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근. 현대 역사도 나름공부했기에 무리 없이 읽고 있었다.
사실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의 사이트가 등장하고, 유튜브의 권위 있는 전문가들의 친절한 강의(무료) 등은 나 같은 비전문가 독서광들에게 한없이 관대한 세상이 도래된 것 같아 마음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진행 중인 '모비 딕' 읽기. 역시나 대중의 열열의 지지는 받지 못했어도 살아생전 '주홍 글씨'의 너새니얼 호손의 극찬과 더불어 사후 위대한 작가들이 18세기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인류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비추어볼 때 과연 명작은 명작 이구나 싶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초반 최인호 작가의 '고래사냥' 소설이 꾀나 관심을 받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시리즈까지 나올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여기서 고래사냥은 상징적 의미였다. 절대 고래 잡는 포경 선박과 선원의 이야기는 전혀 없다-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 인간들에게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동물인 고래의 존재는 그 자체로 경이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 고래를 잡는다는 상징적 알레고리만으로도 문학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건만, 허먼 멜빌은 진짜 고래 잡는 이야기로 당대 모든 사회문제와 인간 실존이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까지 아울렀다. 그야말로 인류 역사의 최고의 문장을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다 보면 19세기 이후 위대한 철학자나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모티브가 이 부분에서 왔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위대한 작품을 낳은 무료 카지노 게임 멜빌.
그가 살아생전 작가로서 '대중과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렸는가?'에 대한 답은 비슷한 시기 상징주의 문학에 선구자로 활동했던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나 프랑스의 샤를 보들레르와 같은 처지로 작가로서의 성공에 대한 열망은 강했으나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잊혀져 가는 존재였다.
한마디로 가지고 있던 재능과 열정에 부합하는 이상 실현과는 거리가 먼 불행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고 할 것이다.
그럼 간단하게 작가 무료 카지노 게임 멜빌의 삶에 대하여 알아보자.
허먼 멜빌은 1819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의 조부들이 모두 명문가 출신으로 미국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아버지도 직물 수입업을 주업으로 하는 무역상으로 유년 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1830년 파산을 하고 두 해 뒤에 사망함으로써 가세가 기울어 허먼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거친 일들을 해야 했고 그 경험으로 해상 모험소설을 쓰고 인기를 얻으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이윽고 서른한 살에 야심 차게 '모비 딕'을 발표하였으나 그가 가장 친했던 문인인 너새니얼 호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로했듯이 자신은 이제 문학계에서 박멸되기로 작정한 상태라고 이 책의 대중적 인기몰이에 실패하자 자포자기했다. 불과 3,000여 권도 못 팔고 만 지금 말로 하면 그야말로 '폭망'의 작품이었다. 그 후 몇 편의 작품을 더 발표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던 그가 죽어서 신문에 난 부고에도 작가로 소개되지 못하였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1921년 컬럼비아대학의 교수이자 작가이며 특히, 평론가로 명망 높았던 레이몬드 위버가 쓴 '허먼 멜빌- 뱃사람 그리고 신비주의자'가 발표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멜빌 저작집(전 16권)이 출판되고, 모비딕이 영화화되고 서머셋 몸, 토마스 만, 알베르 카뮈, 어니스트 헤밍웨이, D.H 로렌스, 버지니아 울프 등 이루 다 언급하기 쉽지 않을 만큼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류 역사의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특히, 그의 삶에서 작가로서의 지위를 안겨준 해양모험소설과 지금 소개하고 있는 '모비 딕'을 집필하게 되는 경험적 계기가 되는 20대 초반의 선원 생활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1837년 경제공황 이후에 일자리를 찾지 못했던 허먼은 1839년 스무 살의 나이에 상선 세인트로렌스호를 타고 영국의 리버풀로 항해하며 선원으로 최초의 경험을 쌓았다. 그 후 1841년 소설 속에서도 출항지로 등장하는 뉴베트포드에서 남태평양에서 포경을 하는 애쉬쿠넷 호에 선원으로 승선하게 된다.
이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지는데, 삼여 연간 남태평양의 섬으로 탈주하여 원주민들과 생활하는가 하면 호주의 포경선 루씨앤호에 승선하여 타히티로 갔다 복무 거부로 투옥, 그리고 탈옥하여 에이미로 섬의 해안가에서 2주간 부랑자 생활을 하기도 하고 낸터킷의 포경선인 찰즈 앤드 헨리 호에 승선하여 라하이나 섬으로 가고 하와이에 몇 달간 체류한 후 미국 군함 유나이티드 스테이츠호를 타고 1년간의 항해 끝에 1844년 10월 보스턴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모험 가득한 스펙터클 항해기였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모비 딕'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학동네 판으로 1,000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기에 1권과 2권으로 해서 출판되었다.
그러기에 책에 대한 내용은 모비딕 1.2로 두 번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모비 딕'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은 소설 카테고리로 도서관에 보관되어 소개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더 넓게 따져도 문학 부분으로 분류되지 못하고 수산업에 관련된 책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모든 것과 이후 관련된 전문서적(당시의 전문서적뿐만 아니라 전인류의 신화에 등장하는 고래이야기-리바이어던-까지 모두를 살펴보았다)을 통달하여 그야말로 고래에 관한 전부가 적혀있을 정도다. 고래의 분류부터 시작하여, 서식지, 포경업의 역사와 현재, 향유고래의 습성과 골격 그리고 해부학적 지식까지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1840년대 포경업에 관련하여 종사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고 일단 읽고 나면 고래에 관한한 준전문가는 따놓은 당상이다.
하지만 '모비 딕'은 현재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소설로 읽히고 있다.
그러니 줄거리 또한 당연히 있지 않겠는가? 간단히 '모비딕' 1권의 줄거리를 소개해 보겠다.
소설에서 화자로 나오는 '이슈미얼', 우리가 구약을 통해서 아는 이스마엘이란 이름을 쓰는 그는 원래 상선의 선원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즈음하여 포경선에 타고 싶다는 이유로 미국 서북부 뉴베트포드로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여관비를 아끼고자 한방에 두 명을 쓰는 합방(?)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만난이가 포경선의 작살잡이를 하고 있는 지금의 뉴질랜드 원주민 출신인 마오리족 퀴퀘크이다.
퀴퀘크는 식인 풍습이 있는 원주민으로 그에 대한 선입견으로 그를 꺼려 하던 이슈미얼은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오히려 순박한 성격에 이끌려 친해지더니 같은 포경선을 타기로 하고 낸터킷항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출항을 준비 중인 피쿼드호를 알게 되고 둘은 함께 그 포경선을 타기로 한다.
출항 하루 전부터 일라이자라는 부랑자 같은 행색을 한 이가 피쿼드호에 타지 말 것을 종용하는데 무언가 파멸을 암시하는 그의 말을 광인의 일탈로 여기며 배에 승선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피쿼드호의 선장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다리 하나가 없는 몸으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다리는 거대한 놈이라 불리는 '모비 딕'이라는 흰 향유고래를 사냥하다 잃은 것으로 선장인 에이헤브는 기필코 놈을 잡아 복수하겠다는 신념에 사로잡힌 인물이라고 한다.
크리스마스 날 3년 정도를 기한으로 드디어 출항을 하게 되는데 앞서 말한 이슈미얼과 퀴퀘크는 물론이오 선장 에이헤브 외 1등 항해사 스타벅, 2등 항해사 스터브, 3등 항해사 플래스크와 그들의 돌격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작살잡이 폴리네시아 원주인 퀴퀘크, 인디언 타시테고, 흑인 다구를 비롯해 주방장, 대장장이, 목수 외 시종 역할을 하는 핍 등등 많은 인원이 타고 있다.
이들의 목적은 향유고래를 잡아 질 좋은 경뇌유를 얻기 위함으로 당시 밤을 밝히는 등잔에 이용하는 최고급 유로 고가로 거래되는 사치품과도 같은 것이었다.
배가 대서양을 지나 희망봉을 거쳐 인도양으로 접어들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항로를 지나갈 즈음 선장 에이헤브는 이번 항해의 진정한 목적은 '모비 딕'을 잡아 없애는 것으로 밝히면서 그에 공을 세운 자에게는 금화를 상으로 내린다고 하며 배 선장실 앞에 금화를 박아 놓는다. 배의 구성원 가운데 가장 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스타벅은 마음속으로 불만이 가득하나 물욕에 휩싸인 선원들은 그 자리에서 환호하며 결의를 다진다. 하지만 에이헤브는 알고 있다. 이것은 그냥 분위기에 휩싸여 열광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무언가 금전적 만족을 바로 느낄 수 있는 일도 함께해야(향유고래를 잡아 고래기름을 저장창고에 넣는 일) 선상 반란 같은 자신의 목적의 가장 큰 적(敵)을 수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이다. 책에 나오는 에이헤브 선장의 독백을 읽어 보자.
에이헤브가 생각하기에,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영원히 처해있는 상태는 바로 비열함이다. 흰고래가 이 야만적인 선원들의 마음을 완전히 자극해서 그들의 야만성 가운데 편력 기사와 같은 태로를 잔뜩 불어넣는다 할지라도, 그래서 오직 그것을 위해 모비 딕을 추격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에게는 그보다 평범한 날마다의 의욕을 채워줄 음식이 필요하다.
모딕 비 1 中 문학동네
그렇게 배는 '모비 딕'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는 적도 부근의 태평양으로 향해가고 중간중간 고래사냥도 하며 일은 에이헤브 선장의 계획대로 진행되게 된다. 이상이 '모비 딕 1'의 줄거리이다.
비교적 간단한 줄거리에 어떻게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나오느냐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당시의 포경산업 전반에 대한 소개와 고래잡이의 세세한 과정 그리고 고래 분류라든지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모든 고래이야기를 총망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담론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철학적 통찰까지 더 해져 그 내용이 상당히 방대하여 한 장 한 장 소화시키기가 그리 쉬은 일이 아닌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일이다. 그러기에 전체적인 해석에 대한 부분은 '모비 딕 2'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장에서 따로 다루기로 하고 '모비 딕 1'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철학적 텍스트 두 가지를 소개하며 마무리 짓는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많은 부분들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은 두려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딕 비 1 中 문학동네
우연은 그 행동반경이 숙명의 직선 내로 제한되고 옆으로의 움직임은 자유의지의 명령에 따르지만, 이처럼 그 둘의 지시를 받을지라도 우연 또한 차례로 숙명과 자유의지를 지배하며 결과에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는 역할을 한다.
모딕 비 1 中 문학동네
2권의 내용은 1권보다는 소설에 가까운 형식을 띄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2권에서는 해양학 또는 포경에 대한 백과 사전식의 설명이 전혀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나올 만큼 나온다가 맞을 것이다.
중간중간 참고래와 향유고래의 생물학적, 인간적 의미에서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비교. 고래 해체작업, 포경업의 명예와 영광, 향유고래 무리에 대한 친절한 해설, 용연향, 정유 작업장, 고래 뼈대 치수 등의 소설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사실적인 지식들의 나열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 이런 백과 사전식의 정리가 독자들의 흥미를 잃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소설을 좀 더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려면 반드시 필요한 지식이기는 하지만 그저 소설적 재미를 추구했던 사람들이라면 혀를 내두를만한 내용과 분량이다-
미국 서북부 뉴베트포드에서 출항한 피쿼드호는 대서양 가로질러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지나 지금의 동남아시아 해역을 거쳐 마침내 일본열도의 북태평양에 당도한다.
그리고 항로를 남쪽으로 잡고 모비 딕을 향해 항해해 나간다.
막간에는 그간 잡은 고래를 끄집어내어 정유 작업도 하고 지나가는 배들을 만나 교류하지만 선장 에이헤브의 '모비 딕'에 대한 집착은 커져만 간다.
배에 승선한 인물 중 가장 이성적인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모비 딕'을 잡으러 간다는 것은 삶의 파멸 즉,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일임을 알고 처자식을 떠올리며 선장 에이헤브에게 회유하여 보지만 그럴수록 그의 잘못된 신념과 아집만 더해짐을 알고는 순간적으로 자고 있는 에이헤브와 총알이 장전된 머스킷 총을 보고 살해 욕이 일지만 참고 만다. 하지만 그도 이제 파멸이 멀지 않음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안타까워할 뿐이다.
점점 더 광기에 휩싸인 에이헤브는 폭풍 속에서도 오로지 모비딕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적도를 향해 나아갈 뿐이고 모비딕을 만나 두 아들을 잃은 '레이철'호의 선장의 간곡한 수색작업 요청도 거절한 채 모비딕에게 다가간다. 이제 모비딕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육감적으로 알아차린 에이헤브에게 이성은 없으며 오로지 비틀어진 신념과 망상으로 일그러진 모비딕을 죽이겠다는 욕망뿐이었다.
드디어 피쿼드 호의 에이헤브와 30명의 선원들은 하얀 리바이던인 모비딕을 다시금 조우하게 된다.
역시 모비딕은 보통 고래가 아니었다. 그 신비로운 색과 크기를 지닌 알비노 증후군의 향유고래를 소유하기 위한 인간들의 욕망에 무수히 많은 공격을 받아 이제는 인간들의 괴롭힘을 선제공격으로 방어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이 생명체는 먼저 피쿼드 호의 보트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 만남에서 에이헤브는 모비딕에게 잃은 다리 한쪽을 지탱하게 만들었던 의족이 지난 폭풍우에 부러져 새로 만들었지만 그마저도 다시금 잃어버리며 외다리 신세가 된다.
하지만 그의 복수심은 다리 하나쯤은 문제가 아니다. 오로지 모비딕을 잡고야 말겠다는 그 영혼의 표상으로 그의 육체는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이번 항해를 위해 다른 선원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몰래 승선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방인 항해사 파르시가 실종되고 말았다.
언젠가 고요한 밤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이 먼저 길잡이가 되어 모비딕을 잡고 영원한 영광의 길로 안내하겠다던 파르시. 무엇이건 간에 자신이 먼저 그 앞에 서겠다던 그의 실종은 그간 계속되었던 파멸의 징조 중에도 가장 확실한 징조였다.
모비딕과의 세 번째 만남. 그날은 저녁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첫날의 아침. 둘째 날의 점심 그리고 오늘의 저녁의 만남은 필시 누군가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전날 실종되었던 파르시는 피쿼드 호의 보트에서 날린 작살 끝에 뒤엉킨 밧줄에 몸이 반 토막 나서 모비딕에 묶여 있었다. 이제 에이헤브 선장의 운명도 정해진 듯하다. 파르시가 길잡이가 되어 먼저 가겠다고 했으니 그 죽음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모비딕은 이제 전투의 화신이 되어있었다. 인간과의 사투에 진저리가 난 듯 마치 요리하듯 보트와 모선을 공격하고 파괴시켰다. 에이헤브는 파르시와 똑같이 작살에 묶인 밧줄에 얽혀 몸이 두 동강이 나며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보트의 선원 모두가 물에 빠지자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모비딕에 가까이 접근한 모선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듯이 하는 필사의 공격에 피쿼드호는 마침내 침몰하고 만다.
마치 파멸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듯 마지막까지 아쉬움에 가라앉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굴다 사라지는 피쿼드호. 마침내 그 모습을 북태평양 한가운데 감추고 말자 주위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망망대해에 고요한 정적 만이 감돌 뿐이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화자 이슈미얼이 등장하여 자신이 유일하게 살게 된 이유를 적는다.
그의 친구 퀴퀘그가 열병에 걸렸을 때 자신의 시신을 담아 바다에 버리기로 한 관이 있었는데 퀴퀘그가 병에서 기적처럼 회복하자 필요 없어진 그 관을 부서진 구명부표로 사용하기로 하게 되는데 배가 침몰하면서 때마침 그 구명부표가 떠올랐던 것이다. 이에 의지하여 이틀을 버틴 이슈미얼에게 한 배가 다가와 구조해 주는데 그 배는 다름 아닌 모비딕에게 두 아들을 잃고 비정상적인 항로를 배회하던 레이철호였던 것이다.
죽음이 이슈미얼에게 삶을 선물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다양하게 해석되는 소설 '무료 카지노 게임 딕'.
기존의 전문가나 읽은 독자의 평보다는 주관적인 의미에서 과연 이 책이 어떠했느냐를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당연하게도 독서의 의미가 이것 아니겠는가? 기존의 서평으로 책을 평가하고 느끼기엔 나의 노고와 감정이 헛되이 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어쩌면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놓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모비딕에게 멀쩡한 다리 하나를 잃은 에이헤브 선장은 그 사건 이후 복수의 일념에 휩싸인 감정적인 인물이다. 반면 그 바로 다음의 직급인 항해사는 스타벅을 비롯해서 스터브, 플래스크는 이성적인 인물들이다.
모비딕을 상대하기엔 그들의 보트와 작살이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헤브의 광기(狂氣)가 모두의 파멸을 의미하며 그 비극을 생각하니 고향의 가족 생각에 에이헤브를 충동적으로 죽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이든 감성이든 모두가 사선(死線) 앞에 선 풍전등화였던 것이다.
넓게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죽는 존재이다.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 볼 수 있음에 거친 바다 선원일지라도 철학적으로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죽음의 각성 앞에서 본래적 존재로 삶을 개시하는 순간이 이들에게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비 딕'의 등장인물들은 에이헤브의 광기 앞에 함께 파멸의 길로 나아간다.
삶의 의미가 누군가의 죽음이었던 탓에 죽음을 불사하는 단 한 사람의 신념 앞에 그보다 못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나머지 29명 모두가 죽음 앞에 무력하게 내던져진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은 허무주의적이고 인간의 계급적 사회에 대한 회의주의적 태도를 지닌 우울한 책일 수도 있다.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내용. 살아남아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스마엘조차 그저 운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우연의 일치로 집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이 결말 앞에서 두고두고 생각해 보면 삶에 대한 희망.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직까지도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것도 사실이기에 가슴 아려온다.
이 책이 세상에 대한 어두운 성찰을 이야기한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닐까 하는 나름의 독창적인 생각을 해보며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대한 글을 마친다.
마지막으로 2권 중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텍스트 네 개를 소개하며 마무리 짓고자 한다.
각각의 이유도 함께 적어 본다.
경뇌유를 영원히 쥐어짤 수만 있다면! 나는 오래도록 반복된 수많은 경험을 통해 인간은 어떤 경우든 각자가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을 결국 낮추거나, 적어도 수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행복을 지성이나 상상력이 아니라 부인이나 연인, 침대, 테이블, 안장, 난롯가, 시골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처럼 나는 이 모든 사실을 깨달아버렸으니, '기름통'을 영원히 쥐어짜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련다. 밤의 환상 속에 빠져들었을 때, 나는 천국의 천사들이 길게 늘어선 채 각자 경뇌유 단지 속에 손을 담그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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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친구들이여, 이것이 사람 잡는 일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런 게 인생이다. 우리 인간들은 오랜 노역을 통해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고래 몸뚱이에서 적지만 귀한 경뇌유를 뽑아낸 후, 피곤한 와중에도 인내심을 발휘해 더러운 몸을 씹어내고 영혼의 임시 거처인 이 깨끗한 육신에서 살아가는 법을 깨닫자마자, 별안간 들려오는 '고래가 물을 뿜는다'라는 소리에 그만 넋을 잃은 채 또 다른 세계와 싸움을 벌이러 출항해야 하고, 젊은 시절과 똑같은 일상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오오! 윤회여! 오오! 피타고라스여, 이천 년 전의 찬란한 그리스에서 살다 간 그토록 훌륭했고 그토록 관대했던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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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텍스트는 마치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고 있는듯하다.
알베르 카뮈가 허먼 멜빌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위 내용을 보면 '시지포스의 신화'의 주요 내용인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갈 만한 이유에 대한 답이 나와 있는 듯하다.
신(神)들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고 그곳에서 하데스에게 산에 돌을 올려놓으라는 벌을 받은 시시포스.
돌을 올려놓으면 산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다시 올려놓으면 굴러떨어지는 상황.
그 힘든 노동을 아무 의미도 없이 영원히 수행해야 했던 시시포스.
알베르 카뮈는 그 '시시포스의 신화'를 가져와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우리 현대 인간의 삶을 이 신화에 비유했다. 시시포스는 힘든 노동형에 처해졌지만 내려오는 길에 바위가 없어 힘이 안 들었을 것에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며,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땀도 식히며 행복했을 것이다.
의미 없는 삶도 의미를 찾으면 나름 행복해질 수 있다. 이 논리를 허먼 멜빌의 위 텍스트에서 영감을 받은 듯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아래 텍스트는 인간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라는 우문에 현답을 제시하는 듯하다.
감상해 보자.
유아기, 소년기, 그리고 성년기와 '만약에'가 영원히 이어진다. 우리가 더는 닻을 올리지 않아도 될 마지막 항구는 대체 어디에 있느가? 가장 지친 사람도 더는 지치지 않을 세상은 어떤 황홀한 창공을 항행하는가? 버림받은 자식의 아버지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우리의 영혼은 출산 중에 죽어버린 미혼모에게서 난 고아와도 같다. 우리 아버지의 비밀은 어머니의 무덤에 함께 묻혀있으니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무덤으로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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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하여 그 누구도 정확한 답을 낸 자는 없다. 신(神)의 구원에 다가가는 것이 인간 삶의 본질인가? 해탈에 경지에 이르러 열반에 이르는 것이 인간 삶의 본질인가? 엄청난 부와 권력을 쌓고 미련을 가진 채 죽는 것이 인간 삶의 본질인가? 그 오래된 질문을 허먼 멜빌은 이렇게 아름답지만 어쩌면 가장 공포스러운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아래 텍스트는 이 힘들고 모진 인생 우리가 더 힘들게 사는 이유에 대해 아주 현명한 답을 내놓는 허먼 멜빌이다.
연인이 젊은 신부의 눈을 바라보며 느끼는, 그 바닥 모를 사랑스러움이여! 이빨이 줄지어 난 그대의 상어들, 먹이를 납치하는 그대의 식인종 같은 방식에 대해 내게 지껄이지 마라. 신념으로 하여금 사실을 몰아내고, 환상으로 하여금 기억을 몰아내게 하라. 나는 깊은 바닷속을 내려다보며 그럴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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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의 등장인물 중 가장 이성적이라고 하는 스타벅 조차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 삶의 원동력을 그저 헛된 '신념'과 '환상'일라고 한다. 사실과 기억을 망각한 해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에 그저 공감하게 됨에 씁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