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다리
* 주간경향 ‘꼬다리’ 코너 글로, 2025년 3월21일 온라인에 송고됐습니다.
이 글은 뉴스 ‘A/S’다.
얼마 전 일본 최고재판소의 한 판결을 조명했다. 소설로 치면 주인공은 오는 21일 퇴직을 앞둔 구사노 고이치 재판관, 사건은 그가 최근 후쿠시마 원전 사고 판결에 대해 작성한 ‘보충의견’이다. 보충의견이란 재판부 결정 내용과 이유에 동의하면서도 결이 다른 주장 등을 덧붙여 둔 것이다. 지난 5일 최고재판소는 2011년 사고 당시 원전을 운영한 도쿄전력 옛 경영진들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구사노 재판관은 ‘유죄로 볼 수도 있었다’는 의견을 더했다.
https://m.khan.co.kr/article/202503080830001
처음엔 나름 잘 쓴 기사라고 생각했다. 문장이나 구성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일단 국내 다른 언론사가 안 다뤘기 때문이다. 타사의 주된 헤드라인은 ‘무죄···14년 만’이었다. 현지 언론을 봐도 보충의견 얘기는 부수적으로 짧게 담겼다. 특파원 제외 현지 정부 및 기관 발표와 외신 보도에 기대는 국제부 업무 특성상 한국과 연관성마저 없다면 기사화할 유인이 없기는 했다.
‘나홀로 기사’를 쓴 건 구사노 재판관 주장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피해자 측은 도쿄전력이 대형 쓰나미를 발생 약 3년 전 일찍이 예측했음에도 옛 경영진이 비용 부담 등을 이유로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아 사고를 키웠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쓰나미 예측 조사는 신뢰도가 낮아 사전 대비책을 마련할 수준이 못 됐고, 막상 사고가 터졌을 때엔 원전 중단 외 별 도리가 없었다고 봤다. 구사노 재판관도 그래서 피고인이 무죄라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다만 그는 도쿄전력의 ‘보고 의무 소홀’을 지적했다.
무죄 판결은 검찰이 이를 공소사실에 포함하지 않아서일 뿐, 기업 책임이 없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쓰나미 예측이 나왔을 때 도쿄전력이 재빨리 알렸다면 정부가 방호 조치를 미리 지시하든 카지노 쿠폰 발생시 원자로를 중단하라는 지침을 마련하든 했을 것이라고 그는 적었다. 경영진 상대 민사소송이 여전히 진행 중인 만큼 이후 영향이 클 수도 있는 논리였다. 기사에서 그를 특별히 추켜세우진 않았지만 기사화한 자체가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
며칠 뒤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구사노 재판관은 피해자 측에서 호평이 아닌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가 도쿄전력 및 계열사에 법률 자문을 제공해 온 ‘니시무라&아사히 법률사무소’ 대표를 역임한 바 있어서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자에 대한 국가 책임을 따진 2022년 재판에서 정부 책임을 부인하기도 했다. 이에 피해자 측은 그의 심리 배제를 요청해 왔다고 한다. 그의 보충의견도 정부 잘못은 없다는 ‘실드’였을까. 내심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밝은 면만 비출 계제는 아니었다. 하필 나홀로 기사라 구사노 재판관이 위인으로 남게 생겼다.
돌아간대도 다른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NHK 등 현지 언론도 “최고재판관이 공소사실에 포함되지 않은 내용을 거론해 범죄 성립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조명하는 데 그쳤다. 이런 식이면 수선할 기사가 한둘이겠나 냉소적인 마음도 든다. 그래도 부기해 둔다. 진실에 도달할 거란 이상을 믿어서가 아니라, 알고도 뭉개는 저열함은 갖기 싫어서. 흘러간 기사를 놓지 못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