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해도 괜찮아요. 부끄러워해도 괜찮아요.
세상 모든 것은 유한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사라졌다 하더라도 기억이 다시 살아나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들을 우리는 마치 사라진 것처럼 안 보고 안 들으며 살기도 한다. 참 모호하다. 사라진 것 같다가도 되살아나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점점 잊힌다. 참 얄궂다.
기남에겐 딸이 둘 있다. 첫째 진경은 남편의 딸이었고 진경이 5살 때 진경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3년 후 우경이 태어났다. 기남은 홍콩에 살고 있는 둘째 딸 우경을 보러 간다. 우경은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쭉 미국에서 살다가 지금은 가족들과 홍콩에 살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5년 만에 딸을 보러 타국까지 왔지만 기남에게 우경과의 거리는 여전히 멀기만 하다. 다정하고픈 엄마와 무정한 딸 우경. 기남은 그 낯선 땅에서 자꾸 피하고 싶은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딸도 사위도 기남에겐 한없이 불편하지만, 손자 마이클은 다정함으로 기남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처음 읽었을 땐 기남의 인생이 불쌍하다고만 생각했다. 원가족은 9살 기남을 식모로 팔아넘겼고, 권사장네에선 온갖 생색을 내며 기남을 집안에서 공장에서 부려먹었다. 그래도 그들의 가족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기남에게 결국 돌아오는 건 비난뿐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커서 만난 생모는 여전히 기남에게 차갑기만 했고, 공장에서 만난 남편은 진실한 척 다정한 척 기남에게 다가갔지만, 애써 내보인 기남의 상처를 평생의 약점으로 삼았단다. 떠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너무 다정했던 어린 진경을 두고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런 진경은 지금 알코올 중독이 되었고, 우경은 거리도 마음도 멀어진 채 타국에서 살아간다.
정말 아프고 고단한 인생이지 않은가. 저 중에 하나만 있어도 큰 상처가 될 텐데 다 가지고 있으니. 하지만 기남은 그 비극을 담담하게 살아 내고 있다. 과거 기억과 현재 상황에, 외로움과 자책으로 때때로 몹시 힘들어 하지만 기남은 도망가지 않는다. 다 끌어안고 자신의 아픈 감정까지 들여다보며 묵묵하게 그 자리에서 살고 있다. 진경, 우경, 남편이 차례대로 집을 떠나고 이제 홀로 남았지만, 기남은 탁구를 치며 자신을 돌보기도 하고 딸 진경도 간간히 들여다본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기남이 아닐까. 수동적인 자신을 본인은 미워할 수 있겠지만 수동적이라고 반드시 약한 건 아니니깐. 다정하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기남. 나에게 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렇다.
우경은 언제나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P.282)
우경은 왜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았을까? 자신을 아꼈던 아빠를 장례식조차 오지 않을 만큼 싫어한 이유는 무엇일까? 헌신적이고 다정한 엄마는 왜 싫었을까? 다정함이 왜 나쁘지? 엄마에 대한 마음은 뭘까? 언니를 향한 미움은 단순히 알코올중독 때문일까? 혹시 부채감인가? 무정함으로 뭔가를 감추려고 하나? 그래도 자신이 사는 곳으로 엄마를 초대하고 좋은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엄마에게 잘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책을 읽고 우경이가 많이 궁금했다. 한번 더 읽으면서 우경의 마음에 집중을 해보았다.
아빠는 자신을 좋아하긴 했지만 엄마 기남과 언니 진경에겐 함부로 대하는 사람. 무척 싫었을 것이다. 다정한 엄마는 아빠에게 제대로 화 한번 못 내는 연약한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고. 아빠에게 늘 차별당하던 언니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집에서 쫓겨나가다시피 한다. 아빠에 대한 원망, 약자인 엄마를 생각하면 따라오는 불편함과 무기력함, 언니를 향한 부채감 등.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싫어서, 혹은 감당하기 버거워서 멀리 도망가지 않았을까. 나는 왜 자꾸만 우경을 이해하고 싶어 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무정함”이라는 한 단어로 단정할 수 없는 숱한 감정들이 우경의 마음에게도 쌓여 있겠지.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
(... 중략...)
"마이클은 다정하구나."
"맞아요. 엄마가 그랬어요. 마이클은 너무 다정해. 한국 할머니처럼."
"정말?"
"근데 너무 다정하면 안 된대요" 마이클이 잠시 기남을 보다 말을 이었다.
"너무 다정한 건 나쁜 거래요."
따뜻한 통증이 기남의 등과 배에 퍼져나갔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 마이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은 자신을 몰랐고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애가 오히려 자신보다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무슨 이유였을까. 부끄러워도 돼요. 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 (P.319)
카지노 게임 사이트 우경과 마이클과 쌀국수를 먹다가 서둘러 방으로 들어왔다. 우경과의 대화에서 오래 묵은 감정이 올라와 불편했기 때문이다. 곧 방으로 뒤따라 온 마이클이 할머니에게 물었다. "부끄러워요?" 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렇게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그 감정은 바로 부끄러움이라는 걸. 카지노 게임 사이트 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늘 부끄러웠다. 우경이 한국을 떠난 것도, 진경이 알코올 중독이 된 것도 자기 탓인 양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한 번도 맞서지 못했던 삶도, 부모에게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던 존재였던 것도 너무나 부끄러웠다.
할머니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준 마이클은 부끄러워해도 된다고 할머니를 위로한다. 부끄러움은 오히려 귀여운 거라는 말과 함께. 할머니의 부끄러움도 알고 보면 별게 아니라는 듯 자신의 여자친구 에밀리에 대해, 바다거북의 산란지인 카보베르데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이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카지노 게임 사이트 이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위로를 받았다.
기남의 마음에는 사라지지 않는 방들이 있었다. 언제든 그 문을 열면 기남은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생생했다. (... 중략...) 기남은 살면서 수시로 그 문을 열었다. 문을 열 때마다 기억의 세부는 조금씩 사라져 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을 열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여전히. (P.306)
기남의 마음에 있는 사라지지 않는 방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사라지지는 않는 아픈 순간들이다. 잊고 싶지만 너무 생생하게 남아있는 기억들. 기남은 낯선 땅 홍콩에서 자꾸 그때의 감정과 조우하게 된다.
우경의 헬퍼 제인의 창고 방을 보고 카지노 게임 사이트 9살 식모살이를 할 때 살았던 권사장네 부엌 옆방으로 간다. 한겨울 난방도 없이 몹시 추웠던 그 방으로. 그리고 홍콩의 해변에서 홀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다가 40년 전 생모와 원래 가족을 만났던 그날을 떠올린다. 기남에겐 차갑디 차가웠던 호텔 중식당의 룸. 반기지 않은 가족과의 식사 자리.
기남이 방문을 열면 그 카지노 게임 사이트졌던 순간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진 게 아닌 게 된다. 세부 상황과 감정의 색은 점점 바랠지 몰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차갑고 단단하고 무거운 무언가'로 다시 아플 수 밖에 없는 방. 그래도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기남이 나는 참 대단하다. 나라면 방문을 열 엄두조차 안 날 거 같으니까. 어쩌면 우경도 그런 게 아닐까. 너무 아프고 두려워서 차마 엄마와 언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차가운 방들이 마음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 없다면, 기남의 마음에 다른 방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자주 열고 들어가서 오래 앉아있을 수 있는 따뜻한 아랫목 같은 방들이.
낯선 곳에서 당황한 기남에게 친절히 다가왔던 빨간 모자 아가씨가 있는 홍콩 공항의 방. 말도 안 통하는 홍콩 아줌마들과 탁구게임을 하면서 한껏 웃었던, 따뜻하게 서로를 안아주었던 이름 모를 건물의 방. 어깨동무를 하고 우경의 온기를 느끼며 셋이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던 그 불상 앞의 방. 마이클과 함께 이불을 덮고 거북이에 대해 친구에 대해 그리고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했던 작고 연약하지만 한없이 포근했던 마이클의 방.
기남이 이 따뜻한 방들을 기억하고 자주 찾아가기를. 그리고 오래오래 머무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