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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민 Mar 18. 2025

허그

다정함


이전 이야기 : 허그(포근함)


우리는 서로를 마주 안은 채 포근함으로 채워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방금 씻고 나온 그녀에게서 나는 싱그러운 향기, 촉촉한 머릿결, 손끝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피부의 감촉. 하얀 목덜미에 보이는 솜털, 그녀의 체온이 전해주는 따스함까지 모든 것이 좋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너무 좋다 해도 내 위에 얹혀진 그녀의 무게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엉덩이 아프니 내려가 줄래?'라는 말을 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로 내 뺨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가까이에서 귓속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움직이며 입술로 그녀의 귀를 찾는다. 긴 머리카락들이 내 코끝을 간지럽히기에 잠시 숨을 참았다가, 내 입술이 그녀의 오른쪽 귀에 닿았을 때 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 순간, 그 작은 숨결만으로도 그녀는 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는지 몸을 한껏 움츠리면서 귀를 어깨 위로 숨긴다.

"~ 간지러워~ "

잠시 후 한껏 움츠러들었던 그녀의 몸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그녀의 손길은 왜인지 내 가슴팍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녀는 조금씩 손가락들을 움직이며 나를 쓰다듬는다.


!?!?


'이러려고 그랬던 게 아닌데...'

나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다시 그녀의 뺨에 얼굴을 가져간다. 아까처럼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이번에도 간지러움이 몰려오는 듯 그녀의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으나 이번에는 내 입술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젖히며 귓볼을 더 가까이 가져다 댄다. 나는 입술에 닿은 그녀의 따뜻하고 붉은 귓볼을 피해 귀에다 조용히 속삭인다.

"이제 좀 내려가 줄래?”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한다.

“엉덩이랑 허벅지가 아파."

나는 내가 처해있는 어려운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본다. 곧 슬며시 웃으면서도, 부아가 치미는 표정을 지었다. 박하선 님의 표정이 언뜻 떠오른다. '또 당했네'라는 느낌의 약이 오른 표정이다.

나는 '씨익~' 하고 짓궂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번 '허얼'하고 웃더니, 부러 심술 난 표정을 짓고는 다시 나를 안으며 말한다.

"싫은데~ 계속 이렇게 있을 건데~"

전보다 더 세게 내 목을 안으며 꼭 달라붙는다.

다시금 엉덩이와 허벅지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하는 수 없이 새끼 코알라처럼 품에 안긴 그녀를 살짝 들어 올리고는 가부좌를 튼 다리의 위치를 바꾸고 다시 내려놓는다.

'한 5분쯤은 더 버틸 수 있으려나...?'


그녀는 내 오른쪽 어깨에 머리를 올리고 있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빠?"

"응?"

"나는 요즘, 그냥 사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름답다', '기특하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때가 있어. 그런 거 느낀 적 없어요?"

그녀는 달과 별, 구름이나 바다 같은 자연 그리고 고양이와 강아지, 꽃과 나무 같은 생명뿐 아니라 저기 보이는 식탁이나 티브이, 지금 눈앞에 있는 두루마리 휴지를 보고도 그런 느낌이 드는 때가 있다고 말했다.

'상희가 최근에 마음공부랑 명상을 하면서 많이 다정한 사람이 된 것일까?'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곱씹으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나는 얼마 전에 본 다큐멘터리에서 느꼈던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난 최근에 어떤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여러 가지 바다의 모습을 보여주는 다큐였거든. 거기서 나오는 바다의 모습들을 보는데 경이로움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감정이 들면서 속으로 계속 '우와~'하면서 본 적이 있었어. 깊은 바다에 사는 생물들은 거대하고 조용한 바다 밑에서 우리와는 다른 속도로 살고 있는 것 같더라고. 아무래도 그곳은 햇빛마저 비치지 않으니 해가 뜨고 지는 하루라는 개념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끊임없이 똑같은 순간이 계속되는 거지. 그들은 그렇게 수백 년인지 수천 년인지 어쩌면 수만 년을 지내온 거잖아. 깊은 바닷속, 어둠 가운데, 예전의 모습 그대로. 그 생명체들에게 삶이란 무엇일까? 시간이란 어떤 개념일까? 시간이라는 게 의미는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들면서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

"그리고 어느 바다에는 몇십 억 년 전 광합성인지 어떤 대사 활동인지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지구에 최초로 산소를 만들어주던 그 생물이 지금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거야. 그들은 지구 생명체의 역사와 함께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과연 그들은 지구가 이렇게 변한 것을 알고 있을까? 수많은 생물들이 존재하다가 멸종했고, 오늘도 태어나고, 죽고, 서로 사랑하고, 다투며 살고 있는,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지구를 알고 있을까? 어쩌면 지금의 지구를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수십 억년 전부터의 지구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옛날부터 그 자리에서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게 무언가 알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왔어."

이러한 감정은 무엇일까? 분노, 슬픔, 기쁨, 사랑.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는 감정과는 다른 부류의 것들이었다. 나는 비슷한 감정이 들었던 또 다른 기억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나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했던 적도 있어. 나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언젠가 죽고 없어질 텐데, 저 나무는, 저 바위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하겠구나. 역사를, 사건을, 사람과 사랑들을 예전부터 지켜봤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으며, 앞으로도 쭉 지켜볼 수 있겠구나. 왠지 그런 생각들이 가슴 한쪽을 뻐근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남아있어."

아마도 언젠가 사라지고 마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마도 내가 반드시 사라지고 마는 존재라는 것에 대한 불안감? 그런 마음 때문에 생기는 감정들 아니었을까?"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안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좀 다른 것 같아요."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건, 내 주위에 항상 존재하고 있던, 나와 함께 해주었던 존재들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미안함... 내가 혹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언제나, 어디서든 아무런 기척도 없이 꿋꿋하게 잘 버텨내고 있구나 하는 기특함...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다정함'

"상희야."

"응?"

"너 꽤나 다정해졌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존재를 보면서 눈물이 날 것 같다는 건, 네가 그만큼 다정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나에게 물어왔다.

"내가 정말 다정해졌나?"

나는 우리가 만나고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갔던 때를 떠올렸다. 그날, 그 밤에 우리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럼. 예전에 이야기했던 거 기억 안 나? 넌 이 세상 모든 걸 누려보고 싶다고 말했었잖아. 제일 좋은 것으로만 누리고 싶다고. 위스키를 마시고선 역시 나는 고급이랑 잘 어울린다고 말하던 게 눈에 선한데?”

“맞아, 그때는 그랬었지.”

“난 그때 네가 욕심이 많은 사람이구나 생각했었는데. 약간은 이기적인 면도 있고 말이야.”

그녀가 내 어깨 위에서 웃음 짓는 것이 느껴졌다.

“근데 네가 일을 관두고 마음공부를 하고, 또 명상꾸준히 하면서 많이 변한 거 같아. 운동도 꾸준히 해서 몸도 많이 좋아졌지만, 내면이 정말 많이 단단해졌어. 그런 게 느껴져.”

“그리고 너의 내면이 단단해지면서 아마 그전에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보이는가 봐. 새롭게 보이니, 새롭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겠지. 전에는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던 존재들에 대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면, 그건 다정함이지 않을까?”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라는 영화에서엉망진창, 뒤죽박죽인 상황 가운데 놓인 웨이먼드의대사가 생각났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발 다정함을 보여 줘. 특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야.”


그 말을 듣고 에블린은 깨닫는다.

강한 힘과 무력이 아니라내가잘 알지 못하고, 나에게 적대적인존재일지라도 '다정함'으로 바라보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그때 제3의 눈을 뜨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장면이정말 좋다.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이런 말도 한다.


“내가 나약하다 생각하지?

옛날에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아버님은 내가 순진해 빠졌다고 하셨어.


그 말씀이 맞았는지도 몰라.

당신이 그랬지.

세상은 잔인하고 우린 쳇바퀴 돌리듯 살 뿐이라고.


나도 알아.

당신만큼 이 세상에 오래 살았으니까.

내가 늘 세상을 밝게만 보는 건 순진해서가 아니야.


전략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지.

난 그런 방법으로 살아남았어.”


어쩌면수십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생명체는 다른 생명을 위해 산소를 내뿜는 '다정함'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지금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웨이먼드가 말한 것처럼...




이제 시간이 한 10분쯤 지났을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고 있긴 했으나, 내 몸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그녀의 무게를 온전히 버티어 내고 있는 내 오른쪽 복숭아뼈와 허벅지, 그리고 양쪽 엉덩이에 내 것이 아닌 감각이 가득하다.

나는 그녀를 힘주어 꼭 안고 잠시동안 가슴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심장과 목덜미에 전해지는 그녀의 숨결을 즐겼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왼손으로는 그녀의 어깨를 받친 뒤 몸을 앞으로 구부리며 그녀를 바닥에 '확' 눕혔다.

"어머~!"

그녀는 갑자기 내 위에서, 내 아래로 위치가 바뀌어진 상황에 조금 놀란 듯하더니 이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웃고 만다. 나의 눈앞에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그녀의 붉고 귀여운 입술 위에 나의 입술이, 나의 가슴에 그녀의 가슴이 닿은 채, 그녀의 무릎 사이에 나의 무릎이 놓인 상태로 우리는 포개어졌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내 다리와 엉덩이, 허리와 온몸에 꽉 찬 이 뻐근함을 빨리 해결해야만 한다. 나는 엎드린 자세를 유지한 채 먼저 목을 들어 쭈욱 스트레칭을 하고, 어깨를 한 바퀴 돌리고, 허리를 앞뒤좌우로 움직인 뒤 양다리를 번갈아가며 쭈욱 폈다. 온몸에 새로운 감각들이 피어나며 내 몸이 다시 나의 것이 되는 것이 조금씩 느껴진다. 다행이다.

그런데 내가 스트레칭하던 중 어딘가에서 그녀의 간지럼 포인트를 다시 건드렸나 보다. 어느 순간 그녀의 눈이 살짝 감기더니 짧은 날숨을 내쉬며 몸이 움찔한다. 나는 그대로 멈춰그녀를 덮고 있는 자세를 유지한 채 쌍꺼풀이 새겨진 눈꺼풀, 까맣고 진한 양쪽 눈썹 그리고 반들거리며 빛나고 있는 이마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그녀가 살짝 감고 있던 눈을 뜨니 촉촉이 젖어있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바라봐주고 있다.

어느 여름의 무더웠던 밤 내 팔짱을 낀 채 나와 발맞춰서 걷고 있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바라봐주던 그 눈빛이다. 난 그때 그 눈빛이 너무 아름다워 그녀의 얼굴을 당겨 그녀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개었더랬다.

나는 그때처럼 지금 이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어 그날처럼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난 아직 다정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라는 생각이 들며 그녀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눈을 보며 말했다.

“고마워. 다정한 사람이 되어줘서.”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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