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 중반 학교 앞 문구점에는 8절지 크기의 종이 카지노 게임을 팔았다. 컬러풀한 두꺼운 도화지에는 귀엽고 예쁜 여자 아이 그림과 일상에서 소화하기 힘든 화려한 드레스부터 원피스와 멜빵바지, 구두와 각종 액세서리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화려한 색감과 어여쁨에 물욕이 없던 나조차 용돈을 모아 한 장씩 사던 놀잇감이다.
굵은 선으로 그려진 테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가위질을 하다 보면 손에 땀이 나고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며 나도 모르게 입이 점점 앞으로 튀어나왔다. 드레스의 주름은 어찌어찌 잘라도 작은 진주 목걸이나 뾰족한 구두를 자를 때면 그만 목걸이 중간이 똑 떨어지거나 구두 굽이 잘려 신상 목걸이와 구두는 폐기처분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속상한 마음에 투명 테이프로 이어 붙여 보지만 누가 봐도 중고 목걸이다. 그래도 가까스로 오려낸 종이옷을 번갈아 입히며 재미있는 인형 놀이를 했다. 어떨 땐 숲 속으로 소풍을 나온 공주가 되어보고 또 어떨 땐 가상의 왕자를 만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 속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드레스를 바꿔 입힐 때마다 대리 만족을 하며 기분마저 샤랄라 해졌다. 종이 카지노 게임은기분과 감정을 공유하는 분신 같은 존재였다.
무도회장에서 파티를 하기 위해 드레스를 갈아입히던 차에 그만 드레스의 옷걸이 부분이 찢어져 버렸다. 어깨 양쪽에 매달려 있는 손톱 크기만큼 작은 흰 여백을 접었다 폈다 하며 카지노 게임 둥근 어깨에 고정시키는 부분이 떨어진 것이다. 옷걸이가 망가지면 내 마음도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속상했다. 테이프로 다시 붙여도 두껍게 코팅된 종이와 같아져 접었다 펴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예쁜 드레스를 못 쓰게 될 때는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아쉽고 슬펐다.
카지노 게임 놀이를 즐겨하던 나도 우리 집의 종이 카지노 게임이었다. 카지노 게임처럼예뻐서가 아니라 몸이 비실비실 허약해서다. 테이프로 붙이지 않으면 금방 너덜너덜해지는 종이 카지노 게임처럼.
감각에 예민한 편이라 조금만 넘어지거나 무릎이 까져도 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우는 나였다. 아파서 울고 피가 난 무릎을 다시 보며 또 울었다. 그런 나를엄마는 엄살이 심하다며 타박했고 몸을 풀로 붙여 놓은 것 같다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약을 발라주고 괜찮다며 달래기에 지친 엄마의 핀잔이었다.
종이 카지노 게임은 환절기마다 감기도 걸리고 잔병치레도 잦았다. 기관지가 약해 늘 목부터 아팠고 콧물과 기침으로 한 사이클을 모두 돌아야 감기가 나았다. 내향적인 성격에 주목받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나에게 기침은 초등 생활의 복병이었다. 감출 수 없는 기침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의 존재감을 여기저기 알리는 사이렌 같았다. 언젠가 기침과 가난 그리고 사랑은 절대 감출 수 없다던 격언을 보며 나는 그 시절 기침을 참아보려 애쓰던 작은 몸을 떠올렸다.
줄곧 감기로 골골대며 기침이 심해질 정도가 되면 결석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내가 큰 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는지 학기 말 롤링페이퍼에 꼭 나으라는 메시지를 군데군데 적어 놓기도 했다. 약간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결석을 그리 자주 했나 싶어 시무룩해지기도 했다.
감기는 오랜 친구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랜만에 만나도 전혀 반갑지가 않다는 것이다. 잊을 만하면 찾아와 존재감을 확실하게 주지시키고 사라진다. 이번 겨울에도 감기 한 번 걸리지 말고 건강하게 보내보자며 스스로 다짐했었다.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늘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외출을 할 때도 꼭 마스크를 쓰고 목을 두툼하게 감쌌다.
자신만만하게 겨울을 보내던 중 결국 나는 감기에 발목이 잡혔다. 목이 아프고 퉁퉁 부어 어쩔 수 없이 이비인후과에 갔다. 이 동네에서만 20년째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니 괜스레 믿음이 갔다. 나이가 지긋한 장년의 의사는 설압자로 혀를 꾹꾹 누르며 입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픈 게 맞나요?”
의사는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왼쪽 턱 밑의 목을 누르며 아프다고 대답했더니 이번엔 내시경을 꺼내 든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의사는 멸균 거즈로 나의 혀끝을 잡고 내시경을 이용해 목구멍 안을 천천히 들여다봤다.
“찾았다.”
나는 지독한 감기에 걸린 게 아니었다. 다만 혀뿌리가 헐었을 뿐이었다. 목이 찢어지게 아파서 이번엔 제대로 목감기에 걸렸구나 싶었는데 말이다. 약국에서 의사가 처방해 준 소염진통제를 받아 들고 나오려는데 친절한 약사가한 마디 얹는다.
“녹황색 채소를 자주 드세요.”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곰도 있으니 종이인형도 채소를 매일 먹으면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찬 바람과 찬 음료로부터 몸을 방비하기 급급했어도 정작 몸을 건강하게 해 줄 음식에는 소홀했던 것 같다. 마늘도 먹고 쑥도 먹고 시금치도 먹고 양배추도 먹고 당근도 먹고 호박도 먹고 파프리카도 먹어야겠다.
종이 카지노 게임 꿈은 아름다운 공주가 아니라 잔병도 거뜬히 이겨내는 튼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