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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바람 Apr 14. 2025

당신의 2번째 카드 일곱 번째!

21그램

카지노 게임

개요범죄 미국 126분

개봉2004.10.23

감독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Alejandro Gonzalez Inarritu


데뷔작이 결코 행운과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당신의 2번째 카드에 대한 이야기



1. 21그램
-"상실이 다 불타버리면 녹색 옥수수가 다시 자라리라"

첫 번째 장편 <아모레스 페로스로 세기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냐리투 감독은 두 번째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만든다. 많은 이들이 이 소식을 듣고 그를 제2의 로버트 로드리게즈 혹은 또 다른 가이리치쯤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2003년 베니스 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21 그램은 이런 '기대(?)'를 철저히 외면 혹은 배반했다. 한 남자와 두 딸을 자동차로 쳐 사망케 한 잭, 희생자의 아내이자 어머니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의 남편이 죽기 직전 남긴 심장을 이식받아 생명을 연장하게 된 폴, 이 셋의 이야기를 내세운 이 작품은 <아모레스 페로스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영화라 할 수 있다.


2. ‘3’이라는 다수성의 의미
- 이냐리투의 세계관

영화 <21그램은 자동차사고로 가족을 잃는 비극에 처한 이들을 보여주는데 이들의 관계설정은 단순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적 관계가 아니다. 가해자(잭)-피해자(크리스티나)-수혜자(폴)로 구분할 수 있는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근대의 사고방식에 벗어난 도식을 보여준다. 이것은 동양적 철학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숫자 1은 동양철학에서 일원론이나 유일신 사상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숫자 2는 이원론이나 이분법에서 언급된다. 하지만 숫자 3은 다원론이나 삼라만상에서 이야기하는 ‘수없이 많음’을 의미한다. 잭과 크리스티나 그리고 폴, 이 세 사람은 스스로 영위할 수 없는 근대 자본주의 사람들을 대표하고 결국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야기된다는 연기설(緣起說)과 일맥상통한다. 우연한 사고일까 아니면 신의 계획일까? 수학교수인 폴은 “낯선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 정말 많은 우연들이 일어나야 한다”라고 크리스티나에게 희롱하듯 말한다. 이것은 동양적 철학관이다. 그리고 영화는 3명의 인물들의 시점으로 시간적 순서를 뒤섞어 보여준다. 이것 또한 현재라는 시간 안에 과거와 미래가 모두 들어있다는 동양철학적 시간개념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환멸과 고통을 거쳐, 등장인물들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어지고 삶은 계속된다. 이것은 대사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우리의 얼굴을 감싸고 머릿결을 쓰다듬는 바람에서 앞서 죽은 수많은 생명들의 숨결을 느끼듯이,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의 호흡도 대기 속으로 흩어지고 바람이 되어 누군가의 얼굴을 감싸고 머릿결을 쓰다듬으리란 걸 알게 되듯이.

이냐리투의 영화 <21그램에는 세 사람의 관계를 통해 동양철학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 각 등장인물의 세계관
- 상실과 붕괴 그리고 희망의 전조

던컨 맥두걸(Duncan MacDougall, 1866~1920)이라는 박사가 1907년 과학저널

(Scientific Journal)에 발표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실험 때문에 유명해진 무게가 바로 21그램이라고 한다. 이 실험은 "인간의 영혼 역시 하나의 물질"이란 가설에서 시작하는데, 초정밀 저울을 이용해 임종 환자 6인의 몸무게를 측정했더니 모두 사망과 동시에 몸무게가 줄었다고 한다. 그 무게가 바로 21그램이다. 하지만 이 물질적인 측정값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다. 즉, 육체의 반대적 의미로서 영혼(soul)이 아닌 삶의 의미로서 영혼(spirit)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소재이다.

이 삶의 의미는 세 등장인물에게 제각기 다른 것으로 상징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교통사고는 이 삶의 의미를 뒤바꾸어 버린다. 우선 (수술 전) 폴의 경우는 숫자로 대변되는 이성의 세계를 대변한다. 이것은 폴의 공간

(집, 병원)에서도 나타난다. 깔끔하게 정돈되고 대체로 흰색과 밝은 색으로 채색된 공간이다. 그리고 크리스티나와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는 그의 이성에 입각한 세계관을 직접 보여준다.

우리 삶 속엔 숫자가 숨겨져 있죠. 그 숫자들이 불가사의를 푸는 열쇠예요....... 만남이 있기까진 많은 일들이 일어나죠. 그 열쇠를 찾는 게 수학이에요.

수학교수인 그에게는 무질서해 보이는 삶이 실은 논리성과 정합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삶의 질서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이후에 이 세계관에 변화가 일어난다. 크리스티나라는 여성에 감정이 생기면서 이성의 세계가 흔들리는 것이다. 숫자처럼 논리 정연했던 그의 세계는 무질서함과 폭풍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된다. 여기서 영화의 첫 장면-침대 위에서 정사를 치르고 난 후의 폴과 크리스티나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읽힌다. 수술 이전의 폴은 부인과 정사가 불가능했으며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심장이식수술을 받고 나서 크리스티나와 만남으로서 비로소 남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관의 변화이자 정체성의 변화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변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곧 불행하게 끝마치게 된다.


폴이 이성의 세계에 속한다면 잭은 감성의 세계에 해당한다. 잭의 공간(교회, 감옥, 집)은 어지럽고 산만하다. 이러한 그의 삶을 지탱시키는 건 신앙의 힘이다. 그는 주님이 "머리카락 한 올의 떨림까지" 알고 있다고 믿으며, 딸과 아들의 다툼에까지 "왼팔을 맞았으며 오른팔도 대줘라"라며 지나칠 정도로 교리를 적용시킨다. 그러나 정신의 갱생을 누리던 그는 교통사고로 인해 세 식구를 죽인 살인범이 된다. 이는 곧 믿음에 대한 균열을 가져온다. 이것은 믿음이라는 큰 글씨가 밖에 쓰여 있는 그의 트럭이 변호사 비용으로 팔려나가고, 십자가 모양의 문신을 불태우는 것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절대적 믿음으로 자신의 정신을 치유하려 했던 그는 교통사고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진다.

폴과 잭의 세계가 이성과 감정의 세계로 확연히 구분된다면, 크리스티나는 이들과는 다른 상실의 영역이라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사고로 인해 남편과 두 딸을 잃은 이후 또다시 약물을 탐닉하게 되고 현실을 회피하려고 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제는 사라진 자신의 영역,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이것은 공간의 '틈새'로 암시된다. 사고가 일어난 후, 크리스티나는 두 딸들의 방을 제대로 열지 못한다. 열린 문틈으로 방안을 응시할 뿐이다. 이 틈새는 폴과의 정사 후, 그녀가 옷장 틈새로 보이는 남편의 넥타이를 보고 죄책감을 느낀다는 점에서도 증명된다. 문과 문의 틈, 이제는 부재하는 세계로의 회귀욕망. 이것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그녀가 임신한 몸으로 딸들의 방으로 들어가서 딸들의 장난감을 어루만지는 장면이다. 이것은 그녀가 이제는 부재하는 상실의 영역에 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불가해한 불행의 구렁텅이 놓인 인물들의 고통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고통 속에 자포자기하는 인물들을 관찰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바가 아니다. 영화는 그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기운과 전조를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폴이 가해자인 잭을 응징하지 않고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나(이것은 이 영화를 복수극이 아닌 등장인물들이 정체성을 상실하고 다시 찾는 여정을 보여주는 영화로 만든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잭을 껴안는 부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서정적 정서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고 있다. 이 한없는 어둠 속에서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끝이 보이지 않는 상실의 연속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등 존재적 실천이야말로 그의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여기서 21그램의 의미를 재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4.다시 제목의 의미

-21그램


21그램은 삶의 의미로서 영혼(spirit)이 아니라,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지점, 인간의 고귀함이 절망이라는 구렁텅이에서도 실체감을 가지는 무게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바로 21그램인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인간적이어서 당하는 불행, 양심으로 인한 고통의 무게가 바로 21그램인 것이다. 결국 21그램이란 양심의 무게이자, 인간성의 무게를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연인과 부부의 사랑, 가족과 친구의 관심도 삶과 양심이 지워준 고통의 무게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보여준다. <21그램은 철학적 깊이와 독특한 형식으로 인간과 인생의 본질을 설파한다고 볼 수 있다.



5. 감독과 세 편의 카지노 게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지금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 중 하나이다.<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그리고 <바벨까지 이어진 그의 영화적 색깔은 한결같다. 어떤 우연한 사건에서 출발한 영화는 나비효과처럼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며 때로는 지역과 시간을 가로지르며 촘촘히 얽힌 운명의 그물망 속에 걸린 사람들을 응시한다. 또한 이냐리투의 주인공들은 늘 미필적 고의의 죽음으로 서로 얽혀 있다. <아모레스 페로스에선 끔찍한 자동차 사고로 연결됐던 주인공들은 다시 <21그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죄다 잃는 운명의 그물에 걸렸다. 바벨에서는 셋째 아이를 잃고 실의에 빠져 모로코로 여행 왔던 미국인 부부 리처드와 수전이 갑자기 여행 중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총알에 맞아 관통상을 입는다. 물론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고 사는 인간들. 수전을 쏜 총알도, 총기의 주인도 모두 제각각의 이야기가 있다. 이렇듯 그의 영화는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거대한 운명의 힘에 의해 작동되는 비극의 에피소드들을 엮어서 보여주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는 어떤 이의 평처럼 불가지론을 설파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삶의 심연을 이해할 수 없고 그 까마득한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는 걸 그의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쉽게 바스러질 운명을 가진 슬픈 존재들이라는 걸 그의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물론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 지배하는 사건의 계열성을 이냐리투의 영화가 보여주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마치 그의 영화는 유리잔처럼 투명하면서도 연약한 삶의 신비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냐리투의 영화는 모두 우연적으로 촉발된 사건과 만남이 불러오는 비극을 전경화 한다. 비극의 원인은 인간들 사이에 놓여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다. 이냐리투의 세 번째 장편 영화 <바벨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사건이 빌미가 돼 시작된 도미노적 비극은 전 지구적 규모로 비화돼 간다. 복잡한 이야기를 특징으로 하는 이냐리투의 무대는 한 마을<아모레스 페로스혹은 도시<21그램에서 세계적인 규모로 커져간다.이처럼이 3편의 영화는 하나의 시리즈처럼 공통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당신의 2번째 카드 일곱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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