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기라서 그런지 아침부터 뜨거운 공기가 몸을 감쌌다. 지난 21일은 아이들 학교에서 열리는 인터내셔널데이였다. 이곳에서는 매년 열리는 행사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여전히 새롭고도 낯선 경험이다.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날. 각자의 문화를 뽐내고, 공유하고, 즐기는 날이다. 하지만 행사 준비를 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마냥 들뜨지만은 않았다. “엄마, 한복 입기에 너무 더워.” 첫째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한복을 입고 가면 좋겠지만, 길고 두꺼운 옷감이 건기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는 고역일 터였다. 결국 태권도복을 선택했다. 한복보다는 활동하기 편하지만, 학교에 도착하니 그마저도 벗어버렸다. 처음에는 아쉬웠지만, 조금씩 나는 이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선택을 이해하게 됐다.
학교에 도착하니, 운동장에는 이미 나라별로 줄을 선 아이들이 행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각국의 국기를 든 아이들이 하나둘씩 입장했고, 학부모들은 그 모습을 보며 환호했다. 중국 부스는 단연 돋보였다. 붉은색 문을 세워놓고, 전통적인 장식까지 준비해 방문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옆의 에티오피아 부스 역시 강렬한 색감과 화려한 포스터로 시선을 끌었다. 그런데 한국 부스는 조금 아쉬웠다. 태극기는 멀찍이 걸려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특별한 장식도 없었고, 다른 나라 부스에 비해 존재감이 약한 듯했다. 하지만 한국 전통 놀이 체험 코너는 분위기를 바꿨다. 팽이 돌리기, 제기차기, 윷놀이, 투호 같은 놀이가 준비되어 있었고, 많은 아이가 관심을 보이며 참여했다. 어른들도 호기심을 갖고 다가와 함께해 보려 했다. 나는 투호 담당이었는데, 쉴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건 한국의 전통 놀이예요. 화살을 던져 저기 나무통에 넣으면 돼요!” 설명할 때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해 보았지만, 그들이 과연 한국 문화를 얼마나 마음에 담고 갔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재미있는 놀이로만 기억할 수도 있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순간만큼은 한국의 놀이가 이곳에서 살아 움직였다는 점이다.
각 나라 부스를 다니며 음식을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투호를 진행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한참 후에야 행사장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아이들은 다양한 나라의 전통 음식을 맛보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우리 아이는 행사 후에 황소 타는 놀이기구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어떤 나라 부스에서 체험한 것인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엄마, 나 그거 또 타고 싶어!”라고 말했다. 웃음이 나면서도, 아이들의 세계가 내가 기대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아이들은 지금 다문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자리 잡기가 어렵다. 친구들 사이에서 두드러지지 않으려 하고, 자신을 숨기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때때로 나는 고민에 빠진다. ‘아이들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할까? 아니면 단지 주변 문화에 더 익숙해지고 싶은 걸까?’ 어릴 때는 단순히 재미있는 행사였겠지만, 자라면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이다. 부모로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해주어야 할지 자문하게 된다. 학교를 나서며, 오늘 하루가 아이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궁금해졌다. 언젠가 이날을 떠올리며, 다양한 문화를 접했던 경험이 자신을 넓은 세상으로 이끌어주었다고 말할 날이 올까? 아니면, 그저 황소 타던 날로만 기억될까? 어떤 방식이든, 그날의 하루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의미 있는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행사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이들에게 “오늘 가장 재미있었던 순간이 뭐였어?”라고 물었다. 역시 첫째는 황소 타는 놀이기구를 또 이야기했고, 둘째는 친구들과 우정 팔지를 만든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나는 다시금 실감했다. 어른들에게는 문화적 의미와 교육적 가치를 중시하는 이런 행사도, 아이들에게는 단순한 ‘즐거운 날’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언젠가는 아이들이 이 경험을 되새길 날이 올 것이다. 스스로가 여러 문화를 체험하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말이다. 이런 작은 경험이 쌓여, 언젠가 그들에게 넓은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이해심으로 다가오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이 투호를 던지던 그 순간처럼, 언젠가 한국의 문화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작은 파동이 되어 퍼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