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울건너 Feb 05. 2025

사랑해 예쁘다 고마워

설날 아침이다.


민준(큰아들) 내외가 도착한다는 시간이 가까워 오는데 나는 해야 할 일 하나를 아직 못하고 있다.

지난주에 문구점에서 사다가 세뱃돈을 넣고 서랍에 넣어둔 봉투에 써줄 덕담이다.

잡채를 급히 버무리는데 그제 서야 세 쌍둥이 한 단어가 와르르 가슴에 와서 붙는다. ‘사랑해사랑해사랑해.’


손을 급히 씻어 수건에 닦고 문갑 서랍을 열어 봉투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펜을 들었다.

지난주에 봉투를 살 때만 해도 덕담을 종이에 따로 써서 봉투 안에 넣어주려고 했으나 이젠 시간이 없다. 봉투 겉에다, 그것도 빨리 써야 한다.



민준!

예빈과 예쁘게 사는 모습 보기 좋다. 건강관리 잘하고 새해에도 파이팅 하자. 해피 뉴 이어. 사랑해.



예빈!

예빈이가 우리 가족이 되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어.

친정어머니 갖다 드리라고 준 참기름 병이 담긴 종이 쇼핑백 아래를 기름병 빠질까 봐 한 손으로 얼마나 조심히 정성스레 받치고 서있던지, 그 예쁜 옆모습을 못 볼 뻔했잖아.

손으로 하는 걸 잘 못한다고 이제 해보려 한다며 어설피 과일을 깎는, 잔히 예쁜 그 마음을 못 느낄 뻔했잖아.

좋으신 부모님 밑에서 잘 자라 우리 가족이 돼줘서 고맙구나.

새해에도 무탈했으면 좋겠다. 무탈함이 기적이니까.

해피 뉴 이어 사랑해!



서준!

일찌감치 독립해 자기 관리 빈틈없이 하며 잘 살아가는 내 작은 아들, 많이 고마워. 사랑해.

해피 뉴 이어.


다 쓰고 나서 봉투를 뒤집어 보니 예빈이 봉투에 기름이 묻어있다. 젖은 행주로 식탁을 닦고 마른 타월을 깔고 다시 꺼내온 새 봉투를 그 위에 놓고 다시 썼다.

세 매의 봉투를 남편이 늘 쓰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남편이 안방 장롱 위에 포개져있는 정사각 상 두 개를 까치발로 내리려 하자 서준이 쫓아가 내렸다. 남편이뒤로 물러나이거 내리는 것도 이젠 힘들다고 말했다.



서준이 남편과 함께 상을 하나씩 거실로 옮겨 편 상 두 개를 붙였다. 내가 젖은 행주를 가지고 가서 상에 놓았고 남편이 그 행주로 상을 닦았다.



나는 식탁 위에 놓고 서서 마저 버무린 잡채를 접시에 담아 그 상위로 옮겨 놓았고 나머지 음식들도 담아 그리로 옮겼다. 몇 가지는 서준이 받아 옮겨놓았다.


민준과 예빈이 도착했다.


사 년 전 이맘때 첫인사를 와서 민준이와 어머니가 많이 닮았다며 끼르르 웃던 그녀 , 자리를 옮긴 한정식집식사 자리에서 “민준이 제가 데려가겠습니다.”결혼 허락 청이 아닌결혼선언쐐기를 박힌나와 남편의 혼을 쏙 빼놓던 그녀, 그날 그녀를 보내한 겨울 농장 매화나무에서 움트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남편에게 말했었다.

“우리 어딘가에홀렸다 나온 거 같지 않어?”



나는 아직도 그녀가 어렵다.

당찬 것 같지만 그녀 역시 나를 어려워하는 하는 느낌을 받는다. 명절날 집에그렇다.



평소엔 말없는 남편이 예빈이만 등장하면 바로 수다쟁이가 된다.

남편은 자기가 전을 다 부쳤다고 자랑했다. 나는 우리 집 전 담당은 아버지라고 말했다.


제 시아버지가 마시는 커피를 떨어지지 않게 챙기는 예빈이가 이번에도 몇 통의 커피를 가져왔고 황금향과 함께 농장에 가서 구워 드시라고 몇 팩의 소고기도 내놓았다.



내가 만두를 먼저 그릇에 담기 시작하자 민준이가 예빈이 그릇엔 만두 다섯 개 넣어 달라고 했다.엄마 만두가 매워서 좋다고 한다고. 떡국떡은 예빈이가 좋아하지 으니까그것도 다섯개만 넣어달라고 했다.


예빈이 그릇에 만두 다섯개를 넣고 국자로 떡국떡을 살짝 뜨자 한 번에 다섯개가 담겼다. 한 번에 딱 다섯개 떴다며 민준이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다른 식구들 그릇엔 만두 두 개씩 넣고 떡을 많이 넣었다.



식탁으로 옮겨 놓은 떡만두국 그릇에 미리 흰자 노른자 갈라 부쳐 가늘게 썰어 접시에 놓아둔 계란채를 민준이 얹었고 그 옆에 예빈이가 서서 김을 가위로 썰어 계란 옆에 얹었다.


고명으로 한층 치장한 떡만국 그릇을 민준이 쟁반에 담아 거실에 놓은 상으로 옮겼다.



서준이 밥솥을 열고 밥을 두 공기에 조금씩 담으며, 난 어제 와서 전이랑 만두는 미리 먹었는데 엄마가 갈비찜은 형네 오면 같이 먹자고 해서 아직 못 먹었다고 말했고 민준이와 예빈이가 아 그랬느냐며 웃었다.

서준이가 또 말했다. 형수님 부모님이 보내주신 대게 찜도 형네 오면 같이 먹자 해서 아직 안 먹고 있다고.

예빈과 민준이 또 웃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 대게가 담긴 스티로폼을 박스를 보며 이것도 지금 상에 놓을까? 민준이 묻자 예빈이가 지금은 먹을 게 많으니 그건 식사 후에 과일과 같이 먹자고 했다.



긴 사각이 된 거실 상에 남편이 주인공 자리에 앉았고 네 명은 옆으로 길게 앉았다.

아침 일찍 내가 옷걸이에서 골라준 자주색 긴 티셔츠 위로 연둣빛 카디건인 남편의 옷차림이 밝아 내 기분이 더 좋아졌다.


가족사진은 가족의 기록이기에 소담지게 놓인 설날 상과 밝게 옷을 입은 남편을 정면으로 해서 찍고 싶었지만 사진 찍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 예빈이 맘에 쓰여 찍지 않았다.


남편이 자 이제 먹자고 했다.

남편이 따라준 술잔을 들고 건강하자우리는 건배를 외쳤다.


남편이 서준이 옆 자리도 어서 채우자고, 둘째 며느리도 들어오면 예빈이와 똑같이 예뻐해 줄 거라고 말했다.


예빈이 갈비찜을 집 양념으로만 하셨느냐고 물었다. 실은 마트에서 사 온 양념을 섞었는데 집 양념으로만 했다고 거짓말했다.

아마도 나는 MSG는 조금도 안 쓰는 사람이라고 넌지시 알리며 잘난 체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런 요망한 구석이 있는 내가 나도 맘에 안 든다.


갈비찜을 압력솥에 끓였더니 너무 물렀다고 내가 말하자 고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아니라고, 푹 익어 더 맛있다고 말했다.



대게가 이름값 하느라고 커서 큰 쟁반에 담았다. 껍질 담을 그릇도 커야 해서 분홍색 큰 바가지를 갖다가 옆에 놓았다.

예빈이가 게 다리 하나를 뜯어 민준에게 주니 민준이 다리 아래쪽을 가위로 양 옆을 조금씩 틈을 내서 다리 맨 아래를 잡고 뺐다. 살이 죽 빠져나왔다. 그렇게 해서 계속 접시에 나란히 놓아주었다.

큰 접시에 게 다리 살이 예쁘게 쌓여갔다.

내가 놓지만 말고 너희들도 어서 먹으라고 하니 그들은 이렇게 하면서 먹고 있다고 어서 드시라고 말했다.


내가 안 하고 있으면 누군가는 하게 마련이다.

남편이기록으로 꼭 보관하고 싶었던지 내가 안 찍는 이유를 알면서도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몇 컷 찍었다.

예빈이 게 다리를 들고 으며 즈를 취해주었다.



나도 가위를 들고 민준이를 따라 해 보았다. 잘 되지 않아 바로 포기했다.

서준이도 가위를 들었다. 역시 어려워했다. 그는 잘 안되니까 다리의 한쪽 가장자리를 길이로 길게 잘라놓고는요지를 가져와 살을 빼내느라 고생하고 있다

예빈이가 그렇게 뭉개놓지 말고 형이 해놓은 거 그냥 잡고 먹으라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서준이가 뭉개놓은 게살을 젓가락으로 집어먹었다.



나는 딸기 한 개를 포크로 찍어 여전히 게 다리를 뜯어 민준에게 주고 있는 예빈에게 건네주었다. 그녀가 감사합니다 하며 한 손으로 딸기를 빼서 입에 넣었다.




남편이 아, 참! 하며 나와 함께 지난달에 연명치료 거부의향서에 사인하고 왔다고 말했다. 나는 휴대폰 지갑에 넣어둔 사전연명의향서 등록증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민준은 엄마 아버지가 평소에 그 말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부모가 말로 자주 했어도 이렇게 직접 서명해놓지 않은 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자식들이 부모가 했던 말대로 결정하기는 쉽지 않은 거라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큰 숙제 하나 해결했다고 말하며 깊은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가슴에서 가득히 막혀있던 뭉치가 빠져나가는 느낌으로 시원해졌다.



예빈이 그건 어디에 가서 하는 거냐고 물었다. 친정 부모에게도 일러주려나 보다. 예빈의 친정집 맞은편 건물 팔 층에 있다고 일러주었다.

서준은 엄마 아버지 먹고 있는 약 잘 챙겨 드시라고 말했다.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민준이가 남편 직장에 제출할 연말정산을 해준다고 남편의 휴대폰과 내 휴대폰을 가지고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십 대 일본 여가수가 부르는 한국 가요를 티브이로 보았다. 남편은 일본 아이가 우리 가요를 어떻게 저렇게 잘 부르는지 신기하다고 했다.



예빈이가 친정어머니는 임영웅을 좋아한다고 했고 남편이 자기는 장윤정이 좋더라고 말했다.


갑자기 남편이 상을 찡그리며 왼쪽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주무르기 시작했다.

예빈이가 놀라며 아버님이 바닥에 한 자세로 오래 앉아있어서 다리가 저린가 보다고 우선 이 상을 치우자며 행주를 가져다 급히 상을 닦았다.

남편이 작년에 병원에 입원했던 이후 가끔 나타나는 증상이다.



예빈이가 다리가 저리냐고 또 물었고 남편은 그런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고 표현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가 소파로 올라앉아서 계속 주물렀다. 이럴 때 그가 그의 다리에 나도 손대는 걸 싫어해서 나는 그의 곁으로 옮겨 앉아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주무르고 나더니 그가 이제 괜찮아졌다며 혈액순환이 안 돼서 그랬나 보다고 했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또 이런다며 주체를 못 하겠다던 한쪽 다리를 내리고 몇 번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가 작년에 입원했다가 나온 이후 그의 이런 증세에 나는 속으로 자꾸 놀란다.

그가 내 곁을 떠나는 시간이 달려오는 것 같아 두렵다. 나에게 재주라곤 어른 노릇 제대로 하고 크고 작은 일에 매듭을 확실히 지어내는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재주밖에 없으니까.


서준이 이젠 전기 안마의자가 필요할 때라고, 주문해야겠다고 말했다.


연말정산을 끝내고 남편의 사무실 메일로 보내기까지 마치고 나온 민준에게 예빈이 이제 세배하자고 말했다. 소파에 앉아있던 나와 남편은 거실 바닥으로 옮겨 앉았다.



“새해 복 마안이 받으세요..” 큰 소리와 함께 세 아이가 몸을 구부리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예전에 어른들이 자식 앞에서 눈물을 훔치던 행동을 지금 내가 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눈물에 나도 당황했다.


모두들 건강하고 새해엔 이루고자 하는 일 다 이루길 바란다고 남편이 말했다. 세 아이들은 네 하고 대답했다.

‘어머 어떡해.’ 티슈를 뽑아 나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눈물을 닦았다.


남편이 탁자 위에 있는 봉투 세 개를 들어 이름을 보며 하나씩 주었다.

예빈이가 활짝 웃으며 받아 봉투 겉에 쓰여 있는 덕담을 읽고 울먹, 하는 그녀의 표정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양쪽에서 역시 봉투에 쓰여 있는 글을 보고 있는 민준 서준의 봉투로 양쪽으로 고개를 돌려가며 기울이며 보았다. 그러는 그녀의 모습이 예뻤다.



만두를 싸가라고 롤 비닐봉지를 통째로 내줬다. 민준이 베란다로 나가서 비닐에 만두를 담았고 예빈은 거실과 베란다의 경계에 서서 민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들 주려고 만든 거니까 많이 가져가라고 남편이 말했다.

이만하면 됐다며 몸을 펴는 민준에게 예빈이 두 봉지 더 담자고 말했다.



둘이 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예빈이 현금 봉투를 내밀었다.

그녀가 말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용돈을 늘 예쁜 봉투에 넣어주셔서 우리도 어제 문구점에 나가서 봉투를 골랐다고.

‘제가’ 아니고 ‘우리’로 표현하는 그녀가 예쁘다.



이제 친정으로 가야겠다며 그들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 코트를 입고 나왔다.

소파에 앉아있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더니 외치듯 말했다.

“아! 내가 너희들한테 꼬옥 할 말이 있어. 새해에는 너희들이 깊이 바라는 모든 소원이 꼬옥 이루어지길 바란다. 아버지도 기도하마.”


덕담의 내용은 좀 전 세배받고 나서와 다르지 않은데 목소리의 크기가 달랐다.

‘깊이’ ‘꼬옥’ 부사가 첨가된 점도 달랐다. 아, 간절함깊이달랐다. 기도하겠다는 말이 첨가되었다.


남편이 그들에게로 가서 양 팔로 그들의 몸 뒤를 감았다. 그리곤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잘 살아줘서 고맙다.”

나는 카메라를 켜놓고 있다가 그 순간을 뒤에서 얼른 사진 찍었으면 좋았겠다고 조금 지나서야 생각했다.

어제 마트에 나가서 사다 놓은 배 한 상자를 처갓집에 갖다 드리라며 민준 손에 들려주었다.


현관문을 나서는 그들에게 서준이 저는 안 나갈게요 인사했고 남편과 나는 나오시지 말라는 예빈의 말에 응 그래, 하면서 그들의 뒤를 따라 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와 문이 열리고 그들이 탔다.


말보다 행동이, 표정이 더 다가올 때가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있는 잠깐의 순간에 예빈이 만두가 잔뜩 들어있는 쇼핑백을 한 손은 아래를 받치고 쇼핑백 손잡이를 잡고 있는 한 손은 위로 들어 올리며 웃었다. 잘 먹겠다고, 감사하다는 몸짓과 표정이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 지난주 예빈 생일에 케이크를 자르고 축하금 봉투를 주어 보낼 때도 엘리베이터에서 그녀는 봉투를 넣은 복주머니 모양의 까만 어깨 가방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곤 이렇게 웃었었다.


나는 그녀가 예쁘다.




설 지난 지가 여러 날이 됐는데도 국세청에서 ‘사랑해, 예쁘다, 고마워’라는 말을 했으니 세금 내라는 고지서가 날아오지 않는다.

새해에는 ‘사랑해, 예쁘다, 고마워’ 말을 더 많이 해도 괜찮겠다.

카지노 게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