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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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월 Jan 2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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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도대체 뭐가 문제야?"


한글을 배우는 중인 외국인이라면 질문으로 보이겠지만,연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 말은 '내게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줬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나는그런 걸 문제삼고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와 같은 짜증이 담긴 말이라는 것을. 하지만 무슨 일이든지 아는 것보다,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게 어렵듯 나는 저 말의 의미를 알고도 넘어갈 만큼 감정 통제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당연히 기분 나쁠 만한 상황이잖아."

"내가 계속 말하잖아. 그 사람은 원래 생각 없는사람이라고. 그런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별생각 없이 뱉는 소리라니까?"

"그 사람이 어떤 의도를 담아 말했든 남자 친구랑 모텔 가봤을 것 같은데, 안 가본 척하냐는 말은 성적인 의도가 담긴 게 맞잖아. 성희롱이라고 그거."

"네가 그런 거만 생각하니까 그렇게 들리겠지. 그 인간 유부남이야. 와이프도 있는 사람이라고."

"아니그 새끼가 너한테 그딴 개 같은 소리를 한 게 문제라는 걸 왜 못 알아먹어? 넌 성희롱당하고 다니는 게 좋아? 그리고,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남자 친구인 내가 화가 안 날 거라 생각해?"


점점 감정이 격해지고, 말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진다. 통증은 항상 흥분이 끝나고 아드레날린이 가라앉고 난 다음에야 찾아오는 법이니 거친 말이 뱉어지며 내게도 남긴 상처는 분명 쓰라릴 것이다. 내가 그런 말을 뱉었다는 자괴감과 그 말로 너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은 언제나 내가 아픈 것보다 더 큰 괴로움을 가져오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당장의 상황에 이성이 차려지지 않는다. 나는 그 새끼를 당장이라도 헛소리는 물론 아무 말도 못 하게 후려 패고 싶은 마음인데, 그 인간을 보호하듯 나서는 네 모습이 이해가 안 되고 원망스럽다.


"그 새끼랑 뭐 있냐?"


결국, 뱉어선 안 될 말까지 튀어나왔다.정작 화낼 대상이 아니라너에게 불똥이 튀었다.


짜악


와. 얘가 손이 이렇게 매웠던가.

가녀린 팔과 손목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따귀.

점차 화끈거리는 볼의 감각과 분노로 잔뜩 달아올라 있던 머리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며 생긴 혼란에 정신이 멍해진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카지노 게임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게 만든 건 뺨을 맞은 나보다도 더 아픈 듯 어느 순간부터밑으로흐르고 있는 너의 눈물이었다.


"너. 따라오지 마."

쾅!


문을 부술 듯 닫고 나가고, 싸우는 분위기에 달궈지고 냉랭해졌던 공기마저 평소처럼 아무 일 없듯 가라앉았음에도 멍하니 그녀가 나간 문을 보고 있다. 아니, 문을 보고 있다기보단 그녀가 있었던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카지노 게임 뭘 잘못한 건지 불탈 듯이 달궈진 머리로 생각을 돌리고, 다시 되짚어 보아도 도저히 알 수 없다. 그저 아까 전 날 선 말들이 오가던 상황만이 머릿속에 계속해서 비쳤다.


나는 네가 상처받는 일이 싫었던 건데. 너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싫은 건데. 너를 지키고 싶었던 마음인데. 그 마음이 잘못되었던 건가.

조금씩, 생각이 가라앉으며 정리된다. 내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니고 옳은 일을 하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는 그 의도에 닿을 수 없고, 옳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아마 너는, 내가 아무리 그 인간에게 좋게 이야기하더라도 그 인간이 너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과 내가 너 대신 나서서 일을 해결하는 그 상황 자체를 원하지 않던 거겠지. 너는 늘 가능한 한 좋게 넘어가고, 해결하길 바랐으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해결을, 너만의 방식으로 견뎌내고 있는 너에게 강요했던 거다. 당장 뒤엎어버리고 따지고 싶은 내 생각과 달리, 따져봐야 일하기 더 불편해지기만 하는 상황이니 아직 그렇게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면서 나서기엔 섣부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디로 간 거지?'


생각이 정리되고, 내 잘못이 보이니 이제는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움직인다.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너를 붙잡고 싶었다.


벌컥!


"아 씨 놀래라."

"뭐야. 너 집으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

"표정 보니까 혼자 또 머리 싸매다 이제야 나왔나 보네. 너무 세게 때린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네가 하고 쏘아붙여대니 제대로 말도 못 꺼내서 화 더 내려고 돌아온 건데. 뺨이나 지금 꼴 보니 미안해서 그러지도 못하겠다."

"아냐, 내가 너무 화냈던 것 같아서 너 쫓아가려고 나온 건데..."

"잘못한 줄은 아나 봐. 내가 너한테 대신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그렇지. 평소처럼 그냥 들어달라고 이야기했을 텐데."


그새 밖에 있었다고 차갑게 식은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아까 맞은 볼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진다.


"멍청아. 내가 애도 아니고. 나도 알아서 내 앞가림할 수 있어. 네가 그따위 인간 때문에 시간 낭비하는 것도 싫고. 조져도 내가 조질 거야. 그리고 진짜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달라고 말하잖아."

"응. 그럴 거라 생각했어. 잘하겠지."

"... 아까 너무 세게 때렸네. 암만 그래도 때리면 안 됐는데. 미안해."


다시 너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지만, 아까의 눈물과는 전혀 다른 눈물이라는 게 느껴진다. 훨씬 따스한 느낌의 눈물에,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음에도 미소가 지어진다.


"웃겨?"

"네가 때려봤자 얼마나 세게 때린다고. 오늘 너무 울었네. 화장 다 번지겠다. 그만 울어 이제. 내가 미안해."


우는 게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너를 품에 끌어안았다. 얇은 니트가 눈물에 젖는 게 느껴진다. 화장이 다 묻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다 이제 좀 진정한 것 같은 너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 눈물도 많아 정말."

"너 때문이잖아."

"그래도 네가 어디 가서 그런 취급받고 다니면 화가 나는걸. 나한테는 이렇게 소중한 사람인데 화가 안 날 수가."

"하여튼... 말은 잘해 진짜."

"우리 이제 화해한 거지?"

"넌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듣냐."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그럼 분식집 가자. 추우니까 어묵 국물이랑 떡볶이 먹고 싶어"

"더 비싼 거 먹어도 되는데?"

"뭐래. 비싼 거 말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며. 다른 비싼 거보다도 지금 나한텐 그게 제일 맛있어."


이렇게 당찬 사람인데. 매번 말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나도 얘를 제대로 믿지 못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애로 생각했던 걸까.


"그래 알겠어. 추우니까 빨리 가자."

"볼 많이 아파?"

"좀 아프긴 해. 팔 힘 많이 세졌더라."

"미안..."

"아냐 나도 말 심하게 했었잖아."

"너무하긴 했."

"뭐야 너가 사과하는 타이밍 아니었어?"


나는 아직 오른 볼이 부어있고, 너는 번져버린 화장을 그제야 부끄럽다며 고치고 있지만 그조차도 웃겨 같이 웃었다. 카지노 게임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럼에도 꼭 맞잡은 부드럽고 포근한 손은 추위도 느끼지 못할 만큼 너무도 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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