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악취도 향기로 변합니다.
“어어?조,조심하세요!”
“엄마야!어떡해?”
다음 순간,와장창!소리와 함께 음식 담은 그릇들이 우르르 식당 바닥에 쏟아져 내렸습니다.
서울대병원 외래 식당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주문한 음식을 쟁반에 들고 자기 테이블로 돌아가던 한 청년이 마주 다가오던 아가씨와 정면충돌하는 대형참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졸지에 음식물을 흠뻑 뒤집어쓴 아가씨가 어떡해?어떡해?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밝은색 상의가 새빨간 고춧가루 양념 국물로 뒤범벅된 채 울긋불긋 흉측하게 변해버렸습니다.
“미,미안합니다.”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모르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청년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노라니 문득 아주 오래전의 추억 하나가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꼭 왕년의 누구 보는 것 같네?”
앞자리에 앉은 카지노 게임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풋!하고 웃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한창 예쁘게 연애하던 이십 대 청춘 시절의 일이니 벌써 거의 반세기에 가까워지는 까마득한 옛날 옛적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퇴계로 대한극장 옆에 소리다방이란 단골다방이 있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소리다방에서 카지노 게임를 만났습니다.그리고 데이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도 카지노 게임에게 들려줄 한 주간 동안의 이야기보따리를 목구멍 가득 장착한 채 카지노 게임가 나타나기만 목이 빠져라기다리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날은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영 카지노 게임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자타가 공인하는 반듯한 모범생이었습니다.무슨 약속이든 한번 약속했으면 좀처럼 어기는 일이 없었습니다.데이트 시간 약속도 거의 분초 단위로 정확히 지키곤 하였습니다.
그런 여자가 아무 연락도 없이 이렇게 오랜 시간 감감무소식이니 갑자기 온갖 방정맞은 생각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디밀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웬일일까?집에 무슨 일이 있나?어디 아픈가?혹시 교통사고라도 난 것 아닐까?
하도 카지노 게임가 오지 않자 다방 종업원들에게 눈치가 보였습니다.할 수 없이 먼저 커피 한 잔만 주문하고 쓴 커피잔을 홀짝거릴 때였습니다. DJ뮤직박스에서 이런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1970년대 크게 유행했던“펄시스터즈”의“커피 한 잔”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려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
팔 분이 지나고 구분이 오네.
일 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
내 정말 그대를 사랑해.
내 속을 태우는구려.
아.그대여.왜 안 오시나.
아.내 사랑아.오.기다려요,
불덩이 같은 이 마음.
엽차 한 잔을 시켜봐도
보고 싶은 그대 얼굴
내 속을 태우는구려.
“미안해.너무 많이 늦었지?”
마침내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는 카지노 게임 모습이 보였습니다.종종걸음치며 내 앞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는 카지노 게임를 바라보는 순간,처음 들었던 생각이…어?오늘 왜 이렇게 예뻐 보이지?
허리까지 구불구불 웨이브 치며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은 여전했지만,패션이 완전히 달려져 있었습니다.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눈에 확 띄는 화사한 분홍색 정장 투피스를 입고 나타난 카지노 게임 모습이 낯설 정도로 너무나 세련되고 아름답고 성숙해 보였습니다.
“왜 나 그렇게 봐?뭐가 이상해?”
“아,아니.이상한 게 아니고 옷이 너무 예뻐서…”
“옷만 예쁘고 사람은 안 예쁘고?”
“아니.옷이 예쁘니까 당연히 사람도 예쁘지.”
“그러니까 그 말은…”
“옷이 날개다.”
“깔깔깔”
한참 웃고 떠들다 다방을 나왔습니다.충무로 길을 팔짱 끼고 걸어가는데 흘낏흘낏 카지노 게임를 곁눈질하며 지나치는 뭇 사내들의 시선이 느껴졌습니다.기분이 과히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옷은 예쁜데 나 원래 튀는 색깔 안 좋아하잖아.그래서 이걸 그냥 입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언니랑 옥신각신하다 늦었어.”
카지노 게임 변신(?)은 의상실 하는 선배 언니의 작품이었습니다.맨날 여자기숙사 사감 선생님처럼 칙칙한 옷만 입고 다니지 말고 과감하게 패션을 좀 바꿔보라고 만날 때마다 구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언니가 성공했네?나 그 옷 너무 맘에 드는데?너무 예뻐.”
변신에 성공한 카지노 게임와 남산길도 걷고 경양식집에서 함박스테이크도 썰고 맥주도 마셨습니다.그리고 당시 갓 개봉한 무슨 영화를 보고 헤어지는 것이 그날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였습니다.
주말 저녁이 되자 거리는 인파로 넘쳐났습니다.어찌어찌하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영화 시간 늦겠다.뛰자!”
횡단보도의 파란 불이 깜박깜박 점멸하고 있었습니다.길 건너 극장을 향해 뛰었습니다.당연히 컴파스 롱 다리인 내가 카지노 게임 앞서 뛰고 있었습니다.그런데 다음 순간이었습니다.뒤에서 와장창!귀를 찢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이게 뭐야?”
뒤를 돌아보자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카지노 게임가 음식 그릇을 뒤집어쓴 채 망연자실해서 부들부들 떨며 서 있는 것입니다.한눈에 왜 이 처참한(?)상황이 발생했나 하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층층이 쌓아 올린 음식 쟁반을 어깨 위로 치켜들고 서커스 하듯 진기 묘기를 부리며 까불까불 내 곁을 막 스쳐 지나간 식당 배달원이 있었습니다.그 인간(?)이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습니다.바로 뒤에서 쫓아오던 카지노 게임와 정면충돌해버린 것입니다.
패션모델 뺨치게 우아하고 세련되었던 카지노 게임 연분홍 정장 투피스 위로 김치찌개 된장찌개 육개장 설렁탕 깍두기 국물 등이 인정사정없이 융단폭격하듯 내리퍼부어졌습니다.그 끔찍한(?)광경은 나의 짧은 이십 대 생애 가운데 가장 잊을 수 없는 대참사,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하필 그때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습니다.멈춰 서있던 자동차들이 일제히 부릉부릉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졸지에 찻길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 하고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어버린 우리 때문에 그 많은 차량이 빵빵대고 이리저리 뒤엉키면서 일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카지노 게임 손목을 잡아끌고 무지막지하게 물 밀듯 몰려오는 차량의 홍수를 아슬아슬하게 헤쳐나와 간신히 찻길 건너편에 도착했습니다.그때 이미 우리는 거리의 스타(?)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나.세상에.저걸 어쩌면 좋아?”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이게 웬일이래?쯧쯧쯧.”
“아이고.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어디 안 다쳤나?”
폭탄 맞은 모습으로 열화와 같이 성원하는 거리의 팬(?)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야 하는 카지노 게임 모습이 매우 고독해 보였습니다.그날의 상황이 어찌나 처절했던지 비속어 따위는 일절 쓰지 않고 고상한(?)언어만을 사수하던 아내의 입술 끝에서도 마침내 이런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못살아.정말.쪽팔려 죽겠네.”
어서 빨리 패션을 재정비(?)할 장소를 찾아야 했습니다.깨끗한 화장실을 찾아 이 빌딩 저 빌딩을 탐색하다가 건물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화장실을 발견했습니다.
아내를 들여보내고 밖에서 가만 상황을 살펴보니 워낙 재정비할 영역이 광활해서 어째 내 도움이 필요한 듯싶었습니다.여자 화장실이지만 마침 아무도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맙소사!그때 못 볼 꼴을 보고야 말았습니다.미친 여자처럼 산발한(?)여인이 세면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옷을 박박 문질러 닦고 있는데 좁은 화장실 바닥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있었습니다. “아니.이게 웬 피냐?”화들짝 놀라 자세히 보니 김치 깍두기 고춧가루 국물이었습니다.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어디 가까운 옷가게가 있으면 당장 갈아입을 옷이라도 한 벌 사와야 하는 게 아닐까?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습니다.
“어머나!왜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왔어요?”
돌아보니 무섭게 생긴 아줌마가 도끼 눈을 뜨고 쏘아보고 있었습니다.
“죄,죄송합니다.그,그게 저…”
혼비백산해서 쫓겨났습니다.뒤이어“아니.이게 뭐예요?남의 화장실에서…”어쩌고저쩌고하는 큰 소리가 들리더니 카지노 게임도 곧 쫓겨났습니다.
열심히 닦는다고 닦았지만,수세미처럼 구겨지고 얼룩지고 엉망진창 되어버린 카지노 게임 패션을 보니 난민(?)이 따로 없었습니다.웃기기는 하는데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건물 밖으로 나오자 날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이제는 영화고 나발이고 그까짓 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졸지에 난민이 되어버린 이 가련한 여인을 데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쪽팔리니까 일단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우리는 양지의 젊은이에서 음지의 젊은이들이 되었습니다.어두운 골목은 생각보다 훨씬 아늑했습니다.
“이제 어떡하지?”
어둠 속에서 카지노 게임가 속삭였습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카지노 게임 허리를 끌어안았습니다.
“골목길에 아무도 없으니까…”
“………”
“키스부터 해야지.”
“………”
그날 밤,참으로 희한한 키스를 했습니다.
카지노 게임 입술은 여전히 달콤했지만,카지노 게임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이게 뭔 냄새일꼬?키스하면서도 코를 킁킁거리며 그윽이 음미해보니,김치찌개 된장찌개 육개장 설렁탕 국물이 골고루 합성되고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피어오르는 냄새였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악취였습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게는 그 악취가 악취로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악취는커녕 향긋한 향기로 느껴졌습니다.이상하다.내 후각기관에 문제가 생겼나?
그때 나는 위대한 진리 하나를 깨달았습니다.아.그렇구나.사랑하면,악취도 향기로 변하는 것이로구나.맞습니다.사랑하면,악취까지 향기로 변합니다.
먼 훗날 목사가 되어 목회하며 이 진리를 성경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악취 나는 죄인들입니다.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그때부터 하나님은 악취 나는 우리 인생을 향기로운 인생으로 바꾸어주십니다.이 세상에 사랑의 힘만큼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하나님의 사랑은 악취 나는 추한 인생,실패한 인생을 향기로운 인생,새로운 인생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린도후서2장15절)
***
진료를 마친 후 서울대병원 후문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습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부쩍 병원 출입이 잦아졌습니다.이미 우리 부부는 한 차례씩 암을 겪었고 나는 작년에 또 암이 발병하여 두 번째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당신 세브란스 진료지?”
병이 하나씩 둘씩 자꾸 늘어나면서 함께 다니던 병원도 자연스레 나누어졌습니다.아내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림프종을 치료받았고 지금은 간 센터에서 진료받고 있습니다.나는 서울대병원에서 췌장과 흉선을 치료받고 있고 그 외의 여러 병원에서도 진료받고 있습니다.서울대병원에서 진료받을 땐 아내가 늘 보호자로 따라오고,세브란스 병원에서 진료받을 땐 내가 늘 보호자로 따라갑니다.어느덧 병원 데이트는 이렇게 우리 부부의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멈췄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카지노 게임가 내 팔짱을 꼭 꼈습니다.통증으로 시려 오던 옆구리가 카지노 게임 체온으로 따뜻해집니다.팔짱을 꼭 끼고 나란히 대학로 길을 걸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무수히 걷고 또 걸어 다니던 대학로 길입니다.이 길이 옛날에는 마로니에 길로 유명했던 곳입니다.지금은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집으로,스타벅스로,파랑새 극장으로,문예회관 등으로 변해있는 이 거리가 예전엔 서울대 문리대가 자리 잡고 있던 곳입니다.서울대 문리대와 의대 사이의 양쪽 길에 키 큰 마로니에 나무들이 우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참으로 낭만적인 시절이었습니다.그 시절의 연인들은 대부분 가난했지만,이 아름다운 마로니에 가로수길을 팔짱 꼭 끼고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한히 행복했었습니다.
카지노 게임와 팔짱 끼고 걷던 젊은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오십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까맣게 윤기 나던 내 머리는 연탄재를 뒤집어 쓴 듯 허옇게변해버렸고 반짝이던 카지노 게임 하얀 얼굴도 어느덧 굵은 주름으로 가득합니다.날씬하던 허리는 구부정해져버린지 오래고 꼿꼿하던 목도 활처럼 휘어져 있습니다. 젊은 시절 훤칠하던 키도 어느새 내 어깨 아래로 줄어들었습니다. 여러 가지질병이 카지노 게임 몸을 많이 망가뜨렸습니다.
눈이 계속 내려 쌓이면서 길이 점점 미끄러워지고 있습니다.
“꼭 잡아.미끄러우니까.”
카지노 게임가 내 팔을 더 꼭 붙들었습니다.카지노 게임는 희귀한 정형외과 질환까지 앓고 있어 절대로 미끄러져서는 안 됩니다.충격을 받으면 척수신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조심조심…이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카지노 게임를 지켜주어야 해.
하는 순간,아뿔싸!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더니만 꽈당!소리와 함께 눈앞에 별똥별이 번쩍거렸습니다.눈 깜박할 사이에 한쪽 발이 미끄러지면서 중심을 잃고 뒤로 발라당 나가 자빠져버린 것입니다.
“여보!여보!괜찮아?괜찮아?”
잠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다시금 카지노 게임 얼굴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그 뒤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목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아이고.저 어르신.큰일 날 뻔했네.”
“괜찮으세요?걸을 수 있으시겠어요?”
“어떡해?병원 가셔야 할 것 같은데…”
이런,카지노 게임를 지켜주기는커녕 내가 오히려 요 모양 요 꼴이 되다니…
그 순간 오십여 년 전의 어느 날이 퍼뜩 떠오르면서, 점잖은(?)목사의 입술 끝에서 먼 옛날 김치 깍두기 국물을 바가지로 뒤집어쓴 아내가 불쑥 내뱉던 비속어가 아주 교양 있게(?) 튕겨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못살아.정말.쪽팔려 죽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