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투두리스트 중독자의 사소한 깨달음
아침에핸드폰을켜면문자하나가 와 있다.
음쓰 봉투
개미 퇴치
방충망 전화
쿠팡 액자
어제의내가오늘의내게친히보내놓은투두리스트이다. 음식물봉투를사야하고, 어떤개미퇴치약이좋은지알아봐야한다. 그리고안방방충망윗부분이떨어져나가수리를맡겨야하고, 쿠팡에서산액자제작서비스에사진을이메일로보내놓아야한다(진짜 별게 다 있는 갓쿠팡).
하나하나떼놓고보면그리번거로운일들도아니다. 하지만이투두리스트앞에선이상하게가슴이뛴다. 기분좋게뛰는게아니라초조해서뛴다. 이투두리스트가존재한다는사실에, 그리고최대한빨리이투두리스트를비워야한다는생각에초조하다. 마지막아이템까지끝내야비로소안도의한숨을내쉴수있다. 하지만이개운함역시오래가지못한다. 오늘의할일들을해치우면또내일의할일들이슬금슬금머릿속에떠오르기시작하기때문이다. 내일은이불빨래를해야하고, 장을봐야하며, 다음달서울로가는KTX 티켓이풀리는날이다. 오늘처럼별것아닌일들이다. 그런데도그냥두면마음이초조하다. 초조하다고지금당장할수있는일들도아니다. 이미늦은저녁시간이고, 몸은오늘의초조함을견디느라피곤하다. 그러나지금당장롸잇나우초조함을달랠수있는방법이한가지있긴하다. 몇년에걸쳐어렵사리터득한고난도기술이다. 바로떠오르는할일들을새투두리스트로정리하는것이다. 내일의나를위해. 아이고 고마워라.
언제부터 내가 독실한 투두리스트교인이 됐는지 모르겠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생기면 생기는대로 불안해하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없어지면 다음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기다리며 또 불안해하는 이 패턴이 어딘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얼마 전의 일이다.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서 어느 날 이런 얘기를 했다. 삶의 대부분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해결의 시간이 아닌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안고 있는 시간, 즉 온라인 카지노 게임풀이의 시간이라고. 만약 온라인 카지노 게임풀이의 시간이 괴롭다면, 인생 대부분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고.
예컨대면접에합격하는순간, 주택매매계약서에사인하는순간, 오랜연인에게청혼하는순간은삶에서끽해야분단위의분량을차지할뿐이다. '취직'이라는온라인 카지노 게임가해결되면업무마감, 대인관계, 워라밸등의온라인 카지노 게임가뒤따르고, '내집마련'이라는온라인 카지노 게임가해결되면인테리어, 이사, 원금납부등의온라인 카지노 게임가뒤따르며, '결혼'이라는온라인 카지노 게임가해결되면성격차이, 돈벌이, 임출육등의온라인 카지노 게임가뒤따른다. 인생전체에비하면온라인 카지노 게임해결의순간은정말미미하다. 너무미미한나머지거의없다고봐도무방할정도다. 나머지99%는전부온라인 카지노 게임풀이의시간이다.
"인생은결과가아닌과정이다" 류의진부하기짝이없는말인데도그날은이상하리만치깊은여운을남겼다. 아마그어느때보다도내얘기같아서그랬으리라. 내가매일불안함과초조함에시달리는것은, 아마이온라인 카지노 게임풀이의시간이괴롭기때문일것이다. 근데아이러니한건, 내가온라인 카지노 게임풀이과정자체를싫어하느냐, 그건또아니다. 막상달려들면열심히하고, 일처리도야무지게하는편이(라고난생각한)다. 그럼도대체뭐가그리불안하고초조하냐?
생각해보면난'미해결온라인 카지노 게임0'이라는가상의종착지를염두에두고달려가는듯하다. 마치매일내게주어지는크고작은온라인 카지노 게임들을행과열을맞춰투두리스트로잘정리해서열심히쳐내다보면, 어느순간이리스트가텅비어더이상초조해할필요가없는절정의순간이도래하기를기다리는듯하다. 더단순하게표현하면이렇다. 난어느날내삶에서모든온라인 카지노 게임가짠하고사라지기를기대하고있다. 그리고초조함과불안함은그순간이오기전까지내가응당감내해야하는, 혹은투두리스트를비우지못했기에응당받아야하는벌쯤으로여기는지도모른다.
이렇게 글로 적고 보니 좀 어이가 없다. 아무런 온라인 카지노 게임도 없는 삶,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개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오고 갔는가. 20주 된 딸아이가 평소보다 2시간 일찍 깨는 바람에 수면부족으로 하루 종일 정신이 혼미했고, 꿈자리가 사나웠던 아내와 아침부터 한 판 했고, 오후에 미리 연락 주기로 했던 창문 수리 기사가 전화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바람에 빨래를 반밖에 못 널어서 나머지를 건조기에 돌려야 했고. 또 오늘뿐이랴. 앞으로 올 하루하루 역시 예상치 못한 문제의 연속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다. 장담하건대 지금 잘만 돌아가는 저 에어컨도 언젠간 고장이 날 것이고, 지금 내 주머니 안에 고이 들어있는 이 지갑 역시 언젠간 자취를 감출 것이다. 또 지금 마루에서 색색거리며 잘만 자는 내 딸아이는 언젠간 감기에 걸릴 것이며, 난 언젠간 중요한 출장길에서 비행기를 놓칠 것이다. 피하려야 피해 갈 수 없는 일들이다. 억울해할 것도 없는 게, 이게 인생이란 게임의 기본값이다. 순탄하게 갈 수도 있었던 인생이 운 나쁘게 꼬인 게 아니라, 이게 원래 인생인 것이다. 에어컨이 한 번도 고장 나지 않는 삶, 지갑을 한 번도 잃어버리지 않는 삶, 몸이 한 번도 아프지 않은 삶, 비행기를 한 번도 놓치지 않는 삶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이다.
그리고설령모든온라인 카지노 게임로부터자유로운삶이존재한들, 과연그런삶이행복할까? 아침에일어나보니해야할일, 해결해야할온라인 카지노 게임가단하나도없는나날들. 쉽게상상이가지않지만, 게임에비유해볼수있다. 마치갈수록난이도가높아져야하는게임에서, 어느순간모든퀘스트가저절로깨지고, 몬스터들이알아서나를비껴간다면, 그걸게임이라고부를수있을까? 과연난어떤이유로이게임을하며, 게임을통해뭘얻을수있을까? 물론꼭대단한자기계발을위해게임을하는건아니지만, 손하나까닥안해도저절로'미션컴플리트'가뜨는게임을과연무슨재미로할까? 마치스타크래프트에서치트키란치트키는다써서컴퓨터와7대1로붙어서이겨도재미는커녕자괴감만드는것과비슷하지않을까. 바로게임종료를누르고고객센터에전화해서뭐이딴게임을만들었냐고항의할것같다.
다시내투두리스트얘기로돌아가서, 그럼이개똥철학적깨달음을내삶에적용한다면?
먼저알아차려야한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자체는온라인 카지노 게임가아니라는사실을. 아니,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아닐뿐더러, 지극히정상이라는걸. 어제도그랬고, 오늘도그러는중이고, 내일도그럴것이라는사실을인정하고받아들여야한다. 그게인생이란게임의기본설정이고, 이기본설정은개인의의지나투두리스트따위로어찌해볼수있는무언가가아니라는사실을알아차려야한다.
생각해보면내가지금껏느껴온초조함과불안함은상당부분이알아차림의부재에서비롯된듯하다. 난온라인 카지노 게임를마치내집에허락없이들어온도둑놈취급했다. 옆방에도둑이있다고생각하니마음이편할리가없었고, 빨리내보내야한다는생각과, 다시는찾아오지않았으면하는간절함뿐이었다. 집요하게투두리스트를만들어한놈한놈내보내다보면언젠간다시조용한집을되찾을수있을거라고믿었다. 하지만웬걸. 불을켜고보니도둑놈들이아니라룸메이트들이었다. 전입신고도했고, 공과금도꼬박꼬박내면서착실하게살고계신분들이었다. 그중한명을붙잡고, 혹시여기나혼자살았던적도있지않았냐고물어보니, 뭔뚱딴지같은소리냐고, 여긴항상머릿수가똑같이유지되는쉐어하우스라고답했다. 그러고보니집도내집이아니라쉐어하우스였다. 내집도아닌쉐어하우스에불을꺼놓고살면서빨리나혼자사는집이되길바라고있었던셈이다.
그래서, 알아차리니까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더냐? 며칠 안 됐지만 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퇴사하고 양양으로 서핑귀촌가신 분들처럼 물 흐르듯 살게 된 건 아니지만, 한 가지는 두드러지게 달라졌다. 바로 투두리스트를 생각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생기는 즉시 부랴부랴 투두리스트를 업데이트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통제하려 했다면, 이젠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생겨도 바로 패닉상태에 빠지기보다, "아 오늘치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이놈인가 보다" 식으로 먼저 상황을 '비온라인 카지노 게임화'하려고 노력한다. 이게 생각보다 용하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닥쳤을 때 그걸 위기상황으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빨래나 설거지처럼 그날그날 마땅히 일어날 법한 일로 인식하느냐는 굉장히 다른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전자는 공복에 마시는 더블에스프레소처럼 코르티솔이 내 오장육부로 퍼져 나가는 게 피부로 느껴지고, 후자는 날 기다려주지 않고 출발해버린 버스 뒤꽁무니에 대고 "ㅆㅂ" 한번 외치고 돌아서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내가 얼마나 오래 '문제의 시간' 속에 머무느냐의 차이다. 투두리스트를 끊임없이 매만지고 다듬었던 건, 어찌 보면 계속 나 자신을 초조하고 불안한 시간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지금은 투두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나머지 시간엔 초조함과 불안함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이 철학적 깨달음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 글의 글자수만큼이라도 효력을 발휘해준다면 난 아마 전보다 꽤 행복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지, 행복은 밖에서 찾는 게 아니라 벌써 내 안에 있는 거라고 했지. 내 안 어디에 꼭꼭 숨어 있는 걸까? 한번 찾아봐야겠다. 지금은 바쁘니까 안 되고, 나중에 시간 날 때 해야지. 그래도 까먹을 수 있으니까... 어디보자... 투두리스트를 어디에 놨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