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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r 15. 2025

봄이 코앞인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읽기도 쓰기도 지지부진하다. 여름이라면 마당에 나가서 풀이라도 뽑으련만. 일도 못하고 놀지도 못한다. 감기 끝이라 몸이 허해진 탓일까. 허공을 걷는 듯 휘청거리고 유리창 너머 어른거리는 햇살을 쫒느라 허둥거린다. 공연히 책상서랍을 열어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는 채 뒤적거리다가 내친김에 서랍정리를 해볼까 하고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책상 위가 난장판이 된다. 온갖 색과 크기의 메모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명함, 비닐포장을 뜯지도 않은 지우개, 한 번도 쓰지 않은 연필들이 있다. 마스킹 테이프와 엽서, 봉투, 스티커에 클립, 책갈피, 작은 종이상자들과 단추, 실과 바늘, 코바늘과 고무줄, 유효기간이 한참이나 지난 연고가 몇 개, 소화제, 밴드, 가위, 가본 적이 없는 나라의 동전, 심지어 부적도 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바로 며칠 전 책 정리를 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랑 똑같네.


오래되어 반들반들 손때가 묻은 책장 하나만 들여놓고 좋아하는 책 몇 권을 읽고 또 읽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바로 그것이 책 정리, 주기적으로 선반에 꽂힌 책등의 제목을 읽어나가는, 마음 졸이는 일을 하는 이유다(무언가를 내 삶에서 없애버리는 일이니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마음 졸이는 일이다). 문제는 기준이다. 내 경우 좋아하는 책이란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여겨지는 책들이다. 책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게 애매한 기준이라니, 하고 반발할 수도 있을 터다. 변덕스러운 책 주인이 책장을 뒤집을 때마다 매번 살아남기가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책장 한 칸에서 처분할 책이 한 권도 나오지 않으면 좋아하는 책만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으쓱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이 많은 책들을 정말로 다시 읽을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면 자신이 없어진다. 정리하는 데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확신이 아닐까. 자기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확실한 믿음 말이다. 옆에서 욕심을 버리라고 끼어들지만 버릴 욕심이 어디 있나. 가진 욕심도 제대로 꺼내놓지 못했는데.


책상서랍을 닫고 일어섰다. 냉장고 문을 열어 저녁거리를 찾았다. 반 모 남은 두부가 물에 잠겨있는 밀폐용기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옆에 자투리 야채들이 담긴 밀폐용기도 있다. 조각난 양파, 동그란 호박 반 토막, 먹다 남은 것들인 만큼 시들기도 했을 것이다. 냄비에 모아 넣고 된장찌개를 끓인다. 요즘에는 그런 것들이 좋다. 조금 남아 있는 것들을 털어 비우는 것. 그것들이 들어있던 봉지나 용기를 텅 비게 하는 게 좋다. 지퍼백에 들어있던 고추 두 개를 썰어 끓고 있는 찌개냄비에 넣는다. 바닥이 보이는 간장병, 몽땅 쏟아 붓기에는 조금 많다 싶은 참기름, 맛술을 모두 부어 조림을 만든다. 그 빈 병들을 온라인 카지노 게임고 싶어서다. 간장도 참기름도 그래서 제 양보다 넉넉하다. 오늘은 더 맛있겠네. 이게 마지막이야 하면 더 맛있어진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하면 오늘이 더 행복해질까.


빈 밀폐용기를 닦다가 플라스틱 뚜껑의 날개 하나가 떨어진 걸 발견했다. 더 이상 밀폐가 되지 않으니 밀폐용기로서는 끝이지만 선뜻 온라인 카지노 게임지 못한다. 유리로 만들어진 본체는 여전히 멀쩡하여 뚜껑이 없어도 쓸모가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뚜껑만 온라인 카지노 게임고 밀폐용기로서의 쓰임을 다한 사각형 유리그릇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언젠가’를 위해 남겨두려 싱크대 문을 열었다. 아! 그렇다. 처음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이미 뚜껑이 없는 과거의 밀폐용기들이 포개져서 쌓여있다. 다시 쓰일 날을 기다리면서. 하지만 좀처럼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많은 밀폐용기의 잔해들이 잊힌 채로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본래의 쓰임을 다했으나 올지 안 올지 모르는 필요를 위해 어둑한 곳에 남겨졌던 용기들은 그날 실제로 버려졌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버릴 걸 버려야 할 때 제대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지 못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걸 좋아한다. 물론 특별한 것들은 아니다. 설거지를 하다가 밀폐용기의 플라스틱 뚜껑이 변색된 것을 발견하면 "온라인 카지노 게임자!" 마음속에서 작은 외침이 들려온다. 접시 뒷면의 실금이라든가 나무주걱의 가장자리가 닳아서 뭉툭해진 모양 같은 걸 발견하게 되면 마지막 퍼즐 조각을 제자리에 끼워 넣는 순간처럼 작은 환희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른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게 이렇게도 좋을 일인가.

실제 버려야 할 것들은 정작 손도 대지 못하고 애꿎은 책상서랍과 책장 선반만 거듭 훑어대는 건 아닌지. 버릴 것을 찾아 헤매는 시선의 방향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내려가 본 적 없는 우물바닥 같은 심연, 스스로의 내면을 향하도록 말이다. 침묵과 응시를 도구 삼아 어둠을 몰아내고 빛 속에 설 수 온라인 카지노 게임면 어떨까? 유리병 속에 담긴 채 말간 속살을 드러내는 구근처럼 당당하고 싶다. 텅 빈 나를 통과한 빛이 봄에 닿으면 하마 꽃이 필까?




몇몇 글들을 퇴고해서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지난 글들은 삭제합니다. 남겨주신 말씀들과 공감은 마음 속에 간직할게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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