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ne 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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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blue Mar 07. 2025

<카지노 게임17 의 카지노 게임18

[One Cut] 돌아보는 사람

[One Cut] 한 컷으로 이야기하는 짧은 리뷰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사유하는 사람이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이해하려 한다.


봉준호 감독의 <카지노 게임17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로버트 패틴슨의 카지노 게임18이 그의 과거이자 기원인 카지노 게임17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18과 카지노 게임17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수많은 SF 작품들이 '기억의 전승으로 인간의 영혼을 완벽히 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탐색들을 이어왔지만 우리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우주 쓰레기를 원료로 끊임없이 프린트되는 카지노 게임가 그 이전 삶의(그것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경험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생성된다는 기술의 기본 매커니즘만 이해할 뿐이다.


죽어도 다시 회생하는 카지노 게임의 특성은 죽음의 무게를 매우 가볍게 만든다. 그리고 가벼워진 죽음은 존재의 무게에도 무게추를 빼내기 시작한다. 인간이란 대체로 존재를 자체를 존중하기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존중하니까. 단단한 돌에 불과한 다이몬드가 단지 희소하기 때문에 값진 것처럼 특정 필요에 부합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닌 인적자원도 희소할 경우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새로운 우주 식민지에 인류 재생산이 중차대한 과제일 때 희소한 자원으로서 완벽한 DNA를 보유한 여성 카이가 귀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반면 희소하지도 않고 심지어 언제든 부담 없이 대체가능한 카지노 게임의 가치는 비행선 안의 그 어떤 존재보다 낮다. 맹독성 검사 같은, 해로운 환경 속에서 진행해야 하는 고강도 고위험 작업들에 투여되는 카지노 게임의 목숨값은 심지어 죽을 때마다 더 하찮아진다. 반복적인 산업재해. 그때마다 살해되는 카지노 게임의 모습에 익숙해진 연구원들은 이제 그가 죽어가는 과정을 생중계로 목격하면서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카지노 게임의 몸을 통해 기록 채취하는 정보값들은 귀중하지만 다시 살아날 카지노 게임의 죽음은 헐값이다. 카지노 게임 스스로조차 자신의 목숨값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만큼. 익스펜더블. 카지노 게임의 복제성은 그를 빠르게 인간이 아닌 소모품으로 추락시킨다.


더군다나 소심하고 유순한 카지노 게임17은 그의 순응적인 성격 때문에 특히 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웠을 것이다. 나샤가 곁에 있어도 플러팅을 하는 카이나 계속해서 복제되는 그에게 '죽는 기분은 어때?'라고 묻는 비행선 안의 동료들로부터 적절한 존중을 받지 못한 채 소모되는 카지노 게임17의 생은 다음 카지노 게임의 탄생을 위해 주기적으로 기억을 업데이트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카지노 게임18은 카지노 게임17이 죽었다고 가정되었을 당시 전 버전의 자신이 겪은 생의 경험들을 모두 이식받았을 거란 이야기다. 카지노 게임18은 카지노 게임17이 살아온 시간들을 알고 있다. 비행선 안의 사회가 그를 어떻게 취급해 왔고 또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생존을 위한 진화, 카지노 게임18


사람은 과거의 기억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쓰라린 배신이나 모욕, 상실이나 고통을 겪은 적 있는 사람은 그 경험을 기점으로 이전과는 상반된 성격으로 변하기도 한다. 유순했던 사람은 사나워지고 사나웠던 사람은 유순해지기도 하면서. 마찬가지로 카지노 게임18 역시 17 버전으로는 결과적으로 생존에 실패했기에 과거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개체로 복제된다. 마치 반작용처럼. 섬세하고 유순한 카지노 게임가 살아남는 데 실패했으니 이번 카지노 게임는 무의식적으로 이를 보완하고자 한다. 카지노 게임17과 달리 카지노 게임18는 다소 반사회적이고 반항적이며 기질적으로 난폭하게 태어난다. 생존을 위한 일종의 진화다.


기술적으로는 거의 모든 전생의 기억들을 이식하기에 동일인물로 인식되던 카지노 게임들은 17과 18 사이에 갭이 발생하면서 총체성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카지노 게임18에게는 카지노 게임17이 얼음동굴로 떨어진 이후부터의 기억들이 모두 유실되어 있다. 두 존재의 기억 사이 미싱링크, 바로 크리퍼들이 카지노 게임를 구조했던 기억의 조각이. 이 시점을 분기점으로 두 카지노 게임의 생이 갈라진다. 이후 각각의 카지노 게임는 독자적인 시간선을 만들어가면 개별적 존재로 살아간다.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후부터 두 카지노 게임는 상이한 성격만큼이나 지속적으로 반목하며 각각 생존을 위한 다른 선택들을 취한다. 자신을 배신한 소꿉친구를 처단하려는 카지노 게임18과 그를 곁에 두려는 17,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끊임없이 착취해 가는 마샬 체제에 총알구멍을 내려드는 카지노 게임18과 그런 그를 막으려드는 17은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최후의 결단, 그러니까 마지막 선택을 앞에 두고 다시 한번 더 갈등한다.


거창하게는 네플하임에 이주한 인류와, 작게는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카지노 게임는 오직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수없이 복제되기에 한없이 가벼워, 목숨값으로도 빚조차 청산할 수 없었던,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는 위험한 업무에 하찮게 소모됐던 부속품 노동자가 아니라 인류 모두의 생존을 결정해야 하는 구원자이자 메시아로서 카지노 게임18과 카지노 게임17은 존엄을 회복한다.


카지노 게임18은 카지노 게임17의 선택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점차 그를 연민하게 된다. 과거 그의 실패와 회한으로부터 탄생한 자기 내면의 폭력성을 응시하며 카지노 게임18은 카지노 게임17이자 그 자신이었기도 한 어떤 존재가 수많은 죽음 속에서도 기를 쓰고 지켜내고 싶었던 것들을 되돌아본다. 카지노 게임18과는 달리 무해하고 무엇보다 타자들에게(크리퍼를 포함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이 성실한 작은 노동자의 선의와 욕망을 카지노 게임18은 이해한다. 카지노 게임17이 발견한 가장 좋은 존재인 나샤와 어떤 인간도 구하려 들지 않던 익스펜더블인 자신을 애써 구해낸 크리퍼들을 절멸로부터 지켜내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카지노 게임18은 이해한다. 함께 보낸 시간은 지극히 짧지만 같은 근원으로부터 태어난 존재들이기에 카지노 게임18이 카지노 게임17에게 느끼는 공감의 밀도는 비정상적으로 그리고 비약적으로 높다.


더욱이 시간적으로 선행하기에 카지노 게임17은 카지노 게임18의 과거다. 존재론적으로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를 상상할 뿐 이해할 수 없지만 미래의 나는 과거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오직 사유하는 사람만이 과거를 돌아본다. 카지노 게임18은 마지막 선택을 하기에 앞서 다시 카지노 게임17을 돌아본다. 자신의 과거이자 자기 자신인 그를 들여다보며 카지노 게임 18은 자신에게 내재된 폭력성의 목적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살해해야 하는 것이 임무라면 그것은 카지노 게임17이 아닌 자신의 몫이라고. 그것은 타인을 해치기 위한 맹목의 성질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존재들을 지켜내기 위한 힘이라는 사실을. 분노하는 자, 맹렬히 싸우는 자, 파괴하는 자를 거쳐 카지노 게임18은 뒤를 돌아보는 저 순간 완전한 각성을 통해 고유의 정체성을 완성시킨다. 저항하는 자로서.


윤회하는 생을 통해 마침내 도달한 고유의 순간


수많은 카지노 게임의 생애는 마치 불교의 윤회와도 같다. 인간은 생을 통해 억겁의 선택을 하고 억겁의 실패를 하며 그보다 적은 성공과 성취를 얻는다. 그 무수히 많은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다른 존재들과 연을 맺고 그들과 함께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수많은 비애와 절망과 분노와 좌절, 환희와 행복과 기쁨과 애정을 통해 우리는 지속적으로 살아가고 반복적으로 성장한다. 마침내 더 이상 환생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이론상 17명의 사랑하는 사람을 처참한 죽음으로 빼앗겼던 나샤가 마치 인류의 죄로 박애받는 예수를 품에 안은 성모마리아처럼 그려지는데 비해 카지노 게임의 생은 불교적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듯한 대비가 흥미롭다. 나샤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매끄러운 수용(그녀는 반복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당하는데도 매번 지치지 않고 그의 최후를 지키려 든다), 완벽한 포용을 의미한다면 카지노 게임는 멈추지 않고 흐르는 변화를 상징한다. 그는 매번 다시 태어나고 다시 자라나며 다시 성장한다.


반복되는 17번의 환생을 통해 카지노 게임18은 비로소 어떤 이해의 영역에 도달한다. 다소 나이브한 카지노 게임17의 실패로부터 태어나 확실한 생존을 원했던 카지노 게임18은 개체적으로 완벽히 분리된 타자인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자신이 겪었던 모든 생의 경험들을 되돌아보고 이를 통해 스스로가 도달가능한, 그리고 가장 확실한 미래를 위한 희생을 결심한다. 그렇게 카지노 게임18은 짧은 생을 불꽃과 함께 순식간에 소진하며 자신의, 카지노 게임17의 미래를 열어낸다. 수많은 착취와 폭력, 그리고 좌절과 체념을 지나 분노와 애도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혁명의 순간. 억압자를 폭사시키며 카지노 게임18은 폭력의 시대를 끊어낸다.


계급과 착취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설국열차와 <기생충이, 짧은 수명의 복제인간이라는 소재에서는 <블레이드 러너가, 크리처 면에서는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나 <옥자와 같은 영화들이 떠오르는, 마치 봉준호 감독 전작들과 수많은 명작 오마주들의 매끈한 혼합물처럼 느껴지는 <카지노 게임17은 사실 어떤 측면에서는 그의 세계가 과거 어딘가에 머물러있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오히려 퇴보한 것은 아닌지를 되묻게 한다. 더욱이 카지노 게임18의 희생은 레미제라블 같은 민중의 혁명이 아닌, 그러니까 모두의 공평한 피로 쟁취한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오직 익스펜더블 한 사람만이 인류의 생존이라는 폭압적으로 무거운 과제 앞에 제물처럼 바쳐진 헌신이라는 점에서 종교적이며 동시에 퇴행적이다. 네플하임에서 벌어지던 착취는 구성원 모두의 공동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던 것이기에 더더욱. 카지노 게임18은 그의 희생을 통해 카지노 게임반즈로의 존엄을 되찾은 정도가 아니라 네플하임의 메시아가 되어버렸다. 그는 단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길 바랐을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지노 게임18이 최후의 결단을 내리기에 앞서 잠시동안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저 장면만큼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있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너무 짧은 시간의 생, 그의 서사를 제대로 전달하기에도 벅찬 찰나의 순간을 살았던 카지노 게임18. 극한으로 내몰린 아수라장 속에서 정적으로 보일만큼 고요하게 카지노 게임17을 돌아보던 그의 응시에는 깊은 회한과 결단이 흔들리며 공존하고 있다. 타인을 연민하는 자애와 소멸에 대한 비탄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이 침묵의 순간은 관객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 모습이기에 더 비극적이다. 이 순간만큼은 오직 한 사람만의 , 오직 카지노 게임18만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고유의 시간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17번의 생을 통해 드디어 행복을 손에 넣은 카지노 게임반즈의 미래만큼이나 18번의 생에 거쳐 겨우 도달한 그곳에도 카지노 게임18가 바랐던 평화가 도래했을지 궁금할 수밖에. 부디 그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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