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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e Jan 11. 2019

밤 열한 시, 나를 기다려주는 카지노 게임

매일 밤 엄마는 딸을 카지노 게임린다

맥주 한잔 걸치고 돌아가는 밤 열한 시,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리워지는 시간. 안주로 뭘 먹었는지 맥주는 얼마나 마셨는지, 몸은 조금 피곤한데 오랜만에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한잔 했더니 기분이 좋다고, 조용한 목소리로 털어놓고 싶은 시간. 이어폰 속 낯익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그런 밤.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탔어요. 조심히 들어갈게요!”


엄마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전부인 밤.



매일 밤, 엄마는 딸을 카지노 게임린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다시 버스에서 내려 고요한 밤길을 걸었다. 이십 년 넘게 걸어온 달동네의 밤은 익숙했지만 스치는 낯선 카지노 게임들이 무서웠다. 그렇게 앞만 보고 몇 분을 걸었다. 잠시 뒤,외투 주머니에서 익숙한 진동이 울렸다. 엄마였다.


“어디야? 데리러 갈까?”


“종점에서 걸어가고 있어. 금방 도착하니까 걱정 말고. 보름달 보면서 가고 있어.”


“동네 골목에 고양이 많잖아. 갑자기 튀어나와서 너 놀라면 어떡해.”


“그럼 반갑게 인사하면 되지~다 와갈 때 연락할게. 걱정하지 말고 집에 있기!”


밤이 짙은 시각, 낯익은 목소리로 어디쯤 오고 있는지 물어봐주는 전화의 주인공은 역시 엄마다. 며칠 전 어두운 골목에서 튀어나온 고양이 때문에 깜짝 놀랐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얼마나 더 걸었을까. 저 멀리 가로등 아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분명한 한 사람이 서있다. 누워있다 나온 부스스한 머리에 우리 집 현관 슬리퍼를 신고 있는 사람. 엄마다. 긴장이 풀리고 허했던 마음이 채워진다.


달빛에 의지하며 걸어왔던 길을 이제 총총걸음이 아닌 온전한 내 걸음으로 걸어간다. 엄마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길, 안주로 뭘 먹었는지 맥주는 얼마나 마셨는지, 몸은 조금 피곤한데 오랜만에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한잔 했더니 기분이 좋다고 들뜬 목소리로 쫑알거린다.




밤 열한시 / 내 삶의 일부들을 지우개로 지우면 / 그대로 밤이 될 것도 같은 시간 / 술을 마시면 취할 것도 같은 시간 / 너를 부르면 올 것도 같은 시간 / 그러나 그런대로 참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시간 - 황경신, 『밤 열한 시』 중

2년 전 봄이었다. 친구들과 맥주 한잔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마음 한구석이 괜히 씁쓸해져 부드럽고 자상한 그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금방 풀릴 것만 같았다. “여보세용” 종종 들려주던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하지만 전화를 걸지 못했다.나를 기다린 목소리가 아닐까봐, 전화를 받지 않을까봐 겁이 났다. 그렇다고 다른 목소리가 듣고 싶진 않았다. 그 순간에는 그 카지노 게임의 목소리가 필요했으니까.


버스에서 내려 고요한 밤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외투 주머니에서 익숙한 진동이 울렸다. 엄마였다. 늦은 밤이면 내 소식을 궁금해하는 사람, 괜찮은지 먼저 전화 걸어주는 사람, 매일 밤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 모두 엄마였다.


‘나,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받고있구나.’


엄마와의 통화로 한순간에 모든 게 충만해졌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엄마의 행동들이 그 밤의 나를 사랑으로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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