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아이러니
남편과 연애 시절, 그가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에스컬레이터 위에서였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면 난 성큼성큼 계단을 탄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의 속도를 받으면 평소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 막 떠나려는 지하철을 붙잡아 타느냐 마느냐, 그리하여 약속 시간에 늦지 않느냐를 결정짓는 수 초에 남은 하루의 평안이 좌우된다.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여유 부리다가 하루가 도미노처럼 무너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은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발판에 두 발을 꼭 붙이고 기계에 몸을 맡겼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서두른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아." 그리고 사방을 둘러봤다.
시간은 흘러, 간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베어 '봄바람 이불' 아래 넣어두듯, 남은 시간을 쟁여놓고 급할 때 꺼내 쓰면 좋으련만 어림없는 소리다. 할일 많은 바쁜 세상, 방법은 하나. 시간을 손에 꽉 쥐고 이리저리 나눠 쓰기.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하고, 급하고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해 순서를 정한다. 그리고 24시간 안에 적절히 분배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현명한 시간 관리라 한다. 시간을 통제할 줄 알아야 삶의 균형이 흔들리지 않는다. 일도 잘하고 가정도 잘 돌보고 사회적 인맥도 넓히고 개인적 여가도 누리고. 성공한 글로벌 리더들, 지혜롭게 잘 산다는 이들은 시간을 부린다. 평범한 나와 그들의 다른 점이라면 그들은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타인의 시간으로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막대한 자금력을 발휘할 수 없는 난 하루를30분 단위로 쪼개 계획을 세운다. 실제 일이 시작하고 끝나는 시각은 5분 단위까지 존중해 그대로 기록한다. 이동하는 시간도 내 하루에 들어가니 동선이 길수록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할 일로 채운다. 한창 공부할 땐 단어를 외우고, 책을 읽었다.요즘은 운전하는 시간이 많아강의를 듣고 전화를 한다. 일하다 잠시 짬이 나면 콘텐츠를 요약 정리해 놓은 영상도 본다. 그 위를 덮는 자막 속 정보를 저장한다. 친절한 알고리즘씨 덕에 검색할 필요도 없다. 내 취향에 맞는 영상이 지체 없이 이어진다. 몇 초의 틈도 허하지 않고 빠르게 반복되는 쇼츠 영상으로 틈새 시간을 알뜰히 쓴다. 다만 찰나의 즐거움에 취해 3분이 20분 되고 1시간 되는 게 큰 함정. 어느 순간 내 하루가 쇼츠처럼 지나간다.
아이러니한 건 시간을 쫀쫀히 쓰고 싶을수록 자주 시간에 허덕인다. 주말, 외출 전까지 주어진 시간을 계산해 아침 루틴을 하고 식사를 준비한 후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집을 정리하려다 보면 늘 10분, 딱 10분이 아쉽다. 정갈한 뒷마무리 대신 훌러덩 내던진 셔츠가 침대 위에 뒹군다. 반면 시간을 헐렁헐렁 보내는 듯한 남편은 늘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날 기다린다. 시간에 쫓기고 남편의 눈초리에 쫓기면서 생각한다. 10분만 빨리 나왔으면 이렇게 마음이 허덕이지 않을 텐데, 10분만 일찍 일어났으면 머리 모양이 이리 어수선하지 않았을 텐데, 10분만, 아,카지노 게임 사이트.
작가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 기록을 담은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말한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기 시작했다.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유시간이 10분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수용소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모조리 억눌린 상황이라면, 그의 말처럼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유시간이 카지노 게임 사이트밖에 없다면' 과연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
내가 소유한 시간이어서 내 마음대로 계획하지만 그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시간의 자유에 오히려 압도당한다. 생산적인 시간을 살고 싶은 욕심에 눌려 소비적인 활동으로 시간을 채운다. 지극히 한정된 시간을 어찌 효율적으로 쓸까 깊이 생각하다가 할 일에 치여 무엇이 가장 중요한 건지 인지하지 못한다. 오늘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면 내일로 넘긴다. 어제에서 이월된 '오늘의 할 일'은 다시 계획에 쌓인다. 용케 마무리 짓기도 하지만 또 다른 내일로 넘어가기도 한다. 내일도, 모레도 당연히 내게 흘러들어올 것이라는 믿음이 시간을 헐겁게 버려둔다.
일단 욕심을 내려놓는다. 몸놀림이 재지 못한 자신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10분 동안 하고 싶은 일을 덜어낸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금 하려는 일이 꼭 필요한지,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다 되려 시간을 어지럽게 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무언가끊임없이 하는 게 미덕인 세상에서 가끔은 '하지 않는 것'을 택하기로 한다.쉬는 게 필요하다며무의미하게 유튜브 영상에 코 박고 쳐다보는 일상적인 허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