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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Mar 29. 2025

<성숙, 온라인 카지노 게임 시간, 박동섭

요란스러운 인사이동 시기를 지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총알처럼 나를 관통한다. 나는 단 한 명도 놓치지 않고 그에 반응한다. 기존의 사람들도 새로운 사람들에 감응하여 날 선 친절을 내뿜는다. 새로이 자신을 설명하며 정체성의 날실과 씨실을 드리우고, 의무의 뼈대 아래 적당한 관심과 침묵을 버무리며, 삶의 극소량을 침투하되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요상한 관계의 거리를 재다가, 미처 참지 못한 말과 하지 못한 말 사이에서 종일 배회한다.

법석대는 시간을 견디고 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당신을 존중한다. 조직의 기름진 나사못 같은 것이 되고자 그런 것도 아니고, 당신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영전을 바라는 것도 아니니 자꾸 되묻지 마시라. 나의 친절이 그리 의심된다 하시니, 차라리, 낯선 사무실에서 하루가 일 년 같았던, 도무지 긴 세월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그 시절의 나를 어루만지는 살풀이 정도라고 해두자.

나는 당신을 환대한다. 새살스럽게 말을 걸고 배곯지 않게 수선 떨고 요란스레 웃고 있는 모든 순간, 잠시 나를 잃어 가면서 까지 당온라인 카지노 게임 존재를 기뻐한다. 그리고 돌아서서 신을 찾는다. 신이시여, 그리하여 선(善)은 어디 있나이까.



<성숙, 온라인 카지노 게임 시간, #박동섭

p64 레비나스의 윤리에는 '선이 승리할 수 없는 세계에서 자력으로 선을 만들어 낸다'는 확실한 방향성이 있다.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 이 세계를 '선한 곳', '살기 편한 곳'으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 이 세계에 수리적 질서를 세워 주지 않는다. 이 세계가 인간의 세계인한 그것은바로 '나'의 일이다. 이것이 레비나스의 기본 입장이다.

p65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자신이 여기에 존재하는 데 미리 준비된 근거는 없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고 '내 존재근거는 앞으로 자력으로 구축할 수밖에 없다'는 실천적 선언을 하는 이만이 자신의 존재근거를 찾을 수 있다.

p68-69(온라인 카지노 게임 인용) 얼굴, 그것은 결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출현하면서 '외부성'을 남기는 무엇이다. 그것은 동시에 '호소'다. 혹은 당신의 '유책성'에 부여된 '명령'이다...(중략)... 당신은 신의 목소리를 들는다. 혹여 당신이 얼굴을 사진의 대상과 같은 것으로 관념하는 한 당신은 다른 대상과 똑같은 한 개의 대상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얼굴과 만난다고 하면 타자의 이 '외부성' 안에 당온라인 카지노 게임 '유책성'이 발생할 것이다.



p122 '선'이란 그 자체로 자신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알고 나서 행하는 선이 아니다. '선'은 욕구에 대한 과잉이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선'은 존재의 저편이다. 우리는 앞에서 폭로와 계시의 차이를 논했다. 계시란 진리가 우리가 그것을 탐구하기 이전에 현현해 우리를 비추는 경험을 의미한다. '선' 개념은 이때 이미 제시되었다... 결핍을 메움으로써 만족되는 욕구와 달리 고통과 결필에 앞서는 갈망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플라톤은 자각했다. 나는 거기서 '욕망'의 운명을 느낀다. '욕망'은 결핍하지 않는 것에 대한 욕구,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유하고 있으면서 그 충일감의 저편으로 향하는 것, '무한'의 관념을 떠안은 자가 품는 갈망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의 저편인 '선'의 위치는 신학이 아니라 철학의 가장 깊은 가르침, 결정적인 가르침이다.

p123 '선함'이란 존재자를 초월하는 것, 존재자를 지금의 존재로 있게 한 것,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의미한다.



p154 신은 세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불완전한 피조물들이 각각의 유한한 자원을 굵어모아 신의 모습을 모방하고 신의 섭리를 헤아리고 신의 질서를 이 지상에 실현하려고 시도할 때 비로소 신은 사후적으로 혹은 '결여'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자신을 드러낸다.



p4 한 언어 공동체에 나름대로 안주하고 있는 사람을 새로운 언어 공동체로 넘어오게 하려면 글쓴이는 나름의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언어 공동체에서 즐겨 사용하는 화법을 일단 관호 안에 묶고 때론 재구축하거나 해체하고 나아가 자신의 언어 공동체를 넘어선 표현을 사용하는 과감한 결단도 필요하다.



p5 오디세이적 주체에게 외부적인 것(l'autre)'이란 '자기가 아닌 것' 일반을 의미한다. '자기가 아닌 것'은 경험의 대상으로 정복되고 소유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p6 반면 아브라함적 주체는 '외부적인 것'을 동화, 흡수하고 누리는 일이 없다. 그것은 아브라함적 주체가 외부적인 것' 안에 자신의 인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것, 즉 '예견 불가능성(imprevisibilité)'을 인정하고 내가 인식할 수도 지각할 수도 없다는 무력함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야말로 '타자(Autru)'가 출현한다.
p7-8 (온라인 카지노 게임 인용) 마치 아브라함이 신의 목소리를 따라 외동아들 이삭을 모리야의 언덕에 제물로 바치려 한 것처럼 '타자'의 말은 나의 이해를 넘어 어떤 감정이입도 할 수 없는 불가해하고 이질적이고 기괴한 명령으로서 '우리 집'에 침입한다.
타자는 우리 집에 혼란과 불화와 분쟁과 확집을 불러일으킨다. 타자와의 만남은 '우리 집'에서만 통용되는 안정적 화법이 해체되고 내가 절대적 단독자로서 고립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바깥에서 온 이의 말은 나의 이해와 공감을 넘어서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이해할 수없는 말을 하나의'주체'로서 받아들이고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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