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향목蔓香木
“나는 앞으로도 계속 식물애호가의 삶을 살아나갈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 다루었듯이 설악산과 한라산 꼭대기 같은 고산지대의 식물이나, 희귀 식물이라서 내가 아직 자생 환경에서 감상하지 못한 식물들이 있다. 들쭉나무, 눈향나무, 솔송나무, 좀목형 등이다. 나는 적어도 이 나무들을 자생지에서 만나는 큰 기쁨을 다 누릴 때까지는 계속 숲을 걷고 있을 것이다.”*
2023년 8월 말에 출간된 졸저 『옛글의 카지노 쿠폰를 찾아서』의 머리말 말미에 적었던 내용이다. 당시 자생지 환경에서 감상하지 못했던 나무들 중, 좀목형은 김태영 선생의 안내로 2024년 8월 괴산의 어느 들판 자생지에서 꽃이 핀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들쭉나무와 눈향나무는 한라산이나 설악산 정상 근처에 자생한다고 하니 쉬이 만날 수 있는 나무가 아니었다. 2023년 가을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을 때도 눈측백은 눈에 많이 띄었으나 눈향나무나 들쭉나무는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사실이지 눈향나무는 보이기만 하면 쉽사리 식별할 수 있을 듯 한데도 말이다.
이 중 눈향나무는 우리 고전에서 만년송萬年松으로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은 정원수로 애용하는 나무이다. 안동시 도산면에 가면 퇴계 태실로 알려진 노송정老松亭이 있다. 이 정자 이름에 사용된 노송은 뚝향나무를 가리킨다. 노송정의 뚝향나무와 형제 나무인 경류정 뚝향나무를 만년송으로 표현한 사례도 있다. 아무튼 우리 고전에서 만년송은 향나무 중에서도 눈향나무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필자가 2023년 초에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에 실었던 “노송정과 경류정의 나무, 노송과 만년송은? - 老松, 萬年松, 향나무와 눈향나무”에서 옛 글의 만년송 부분을 일부 인용해본다.**
<양화소록에는 “만년송萬年松은 모름지기 층층의 가지와 푸른 잎이 끈이나 실이 아래로 드리운 것 같고, 줄기는 구불구불하여 붉은 뱀이 수풀을 오르는 듯하며, 향기가 맑고 매운 것이 좋다. 잎이 희고 가시가 있으면 하품이다. 2, 3월에 좋은 것을 골라서 가지를 잘라 다른 그릇에 꽂고 나서 그늘에 두고 서서히 물을 주면 살아난다. 다시 난 새잎은 반드시 가시가 있어 거칠지만 여러 해가 지나면 끈이나 실처럼 된다. … 금강산과 묘향산 두 산의 꼭대기에 잘 자란다. 중이 채취하여 부처님 전 향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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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유원李裕元(1814~1888)은 설악산에 올라 직접 만년송을 보고, “설악 최고봉에 만년송萬年松이 있다. 키는 몇 자에 불과하지만 가지와 줄기는 넓게 뻗어 있다. 바람과 이슬이 치는 곳에서 다만 땅을 덮으며 자랄 뿐이다. 그 잎을 따서 차를 만들면 매우 맑고 시원하다. 나는 이 산에 들어가서 차를 마시고 그 송松도 보았다.”****라는 기록을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남겼다.
지난 4월 초순 좋은 봄 날에 나는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4월 4일날 탄핵이 인용되면서는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는데, 4월 5일 토요일에는 송선배님, 정대표님과 셋이 영실코스로 한라산을 올랐다. 강풍과 비가 조금 예보되어 있었지만, 방풍복으로 무장하고 스틱을 짚으며 천천히 올라갔다. 한라산 정상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1700미터 고지까지 오르는 산행이라, 나는 주목이며 꽝꽝나무, 쥐똥나무, 산철쭉, 마가목, 좀갈매나무, 매발톱나무 등 거센 바람에 낮게 자란 고산지대 나무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뒤쳐져서 천천히 걸었다. 능선부에 올라섰을 때 자생환경의 겨울철 시로미를 처음 만났다. 솔이끼 같기도 하고, 수초류 같기도 한 이 개체를 보자마자 ‘시로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무도감에서만 보던 나무라 많이 반가웠다. 조금 더 가서는 땅에 포복하며 자라고 있는 눈향나무를 만났다. 영실코스를 오르면서 눈향나무를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뜻밖에 그토록 고대하던 눈향나무를 코앞에서 만나다니! 한번 눈에 띈 눈향나무는 등산로 양쪽으로 곳곳에 자라고 있었고, 나는 보이는 족족 사진으로 담았다.
눈향나무는 1653년에 간행된 이원진李元鎭(1594~1665)의 <탐라지에도 “만향목蔓香木. 한라산 위에 자란다. 모양은 자단紫檀 같다.”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만향목의 뜻은 ‘덩굴로 자라는 향나무’이니, 눈향나무를 가리킴에 틀림없다.
강희안이 <양화소록에서 금강산과 묘향산 꼭대기에서 자란다고 한 만년송 눈향나무를, 이유원은 <임하필기에서 설악산 최고봉에서 직접 봤다고 했다. 금강산과 묘향산은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이라서 나는 언젠가 설악산을 다시 올라 꼭 눈향나무를 보리라 다짐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4월의 제주도 여행에서 뜻밖에 자생지 환경의 눈향나무를 감상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다. 눈향나무는 시로미와 함께 윗세오름대피소까지 등산로변 곳곳에 포복하고 있어서, 식물애호가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여 우리는 윗세오름대피소에서 잠시 쉰 후 하산길에 올랐다. 돌풍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서 급히 내려왔다. 눈향나무들은 얼마나 오래, 거센 바람과 눈보라를 견디며 푸르름을 지켜왔을까? 이렇게 만년동안 고절을 지켜 만년송萬年松이라는 이름을 얻었나 보다!
<끝
*권경인, 옛글의 카지노 쿠폰를 찾아서, 이유출판, 2023, p.15
**권경인, “노송정과 경류정의 나무, 노송과 만년송은? 老松, 萬年松, 향나무와 눈향나무”, 향토문화의사랑방안동 2023 1/2. (/@783b51b7172c4fe/82)
*** 萬年松 須層枝翠葉 如絛絲下垂 身幹回曲 如赤蛇騰林 香氣淸烈者乃佳 葉白有刺者乃下品 二三月擇佳者 折枝揷別器 置陰處 徐徐澆水則活 更敷新葉 必鬆鬆有刺 年久還如絛絲 … 好生金剛妙香兩山絶頂 衲子採之 作佛前香 – 양화소록
**** 雪嶽最高峯 有萬年松 長不過數尺 枝幹蔓延 風露所墜 只覆地而長而已 摘其葉作茶 最淸冽 余入是山 吸茶而又見其松也 – 林下筆記, 薜茘新志
***** 蔓香木 生漢拏山上形如紫檀 - 탐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