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한 순간 비로소 꿈을 꾸었다' 본문 중에서)
나도 처음부터 열정넘치고,하고 싶은게 많은 건아니었다. 그저 꼬질꼬질한 시골 카지노 게임에 불과할뿐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 한 자락에 위치한 시골 마을이다. 하루에 버스도 몇 대 다니지 않는 깡촌. 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것도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을에 버스가 다니기 전까진 40분을 걸어 큰 도로로 나와 버스를 타야만 읍내에 갈 수 있었다. 물론 버스로도 20분은 더 가야 했고. 행여 마을버스를놓치기라도 하면큰 도로로 나와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기에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때엔 마을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새벽같이 일어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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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나 순탄한 3학년을 지내고 있을 여름 무렵, 안 좋았던 가세가 더 기울고 갑작스레 아빠가 돌아가셨다. 병을 앓고 계셨기에 갑작스럽다는 표현이 맞진 않지만 늘 곁에 계실 것 같던 아빠가 내 곁을 떠나신 건 어린 나이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농사를 업으로 삼으셨던 엄만 아빠의 부재로 더 이상 혼자 일을 하실 수 없게 되었고,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에공장 일을 택하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아빠의 병원비로 빚까지늘어수입이 거의 없는농사일에 더 이상 연연하실 수가 없었다.
엄만 아침 일찍 일을 나가 저녁 늦게야 돌아오시고 중고등학생이 된 언니들도 늦게 오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그 시절을 돌아보면 난 늘 외로웠다.엄만 최선을 다해 내 맘을, 우리 마음을 헤아려주려 노력하셨지만 난 오히려 그런 엄마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엄마가 걱정하지 않도록 외롭지 않은 척, 애써 밝은 척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힘들고 외로운 맘을 맘껏 표현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담임 선생님이셨다. 선생님께선 외롭고 어렸던 날 많이 감싸주시고 위로해 주셨다. 또, 아빠처럼 다정히 대해주셨다.
그런담임선생님을 보며 진심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 그게 내가 처음으로 원한장래 희망, 나의 첫 번째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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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가 처음 가진 카지노 게임 중학생까지 이어졌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학업에 열중하며 중학교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글쓰기 대회가 열렸다. 평소 끼적이는 걸 좋아하던 나는 엄마와 관련된 수필을 정성껏 적어 대회에 제출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우수상을 받았다. 최우수상은 아니었지만 내가 쓴 글로 상을 받았다는 게 무척 기쁘고 짜릿했다. 그저 좋아서 조금 끼적여봤을 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그 일은 내 꿈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다.
난 작가가 카지노 게임 싶어졌다. 내가 상상하는 이야기를 글로 적어내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그런 작가를 꿈꿨다. 내가 주인공을 직접 캐스팅하고 연출하며 서사를 그려낸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난, 이야기를 꾸며나갈 수 있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작가가 되기 위해 시시콜콜한 것도 끼적이며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사실 쓰는 것에 비해 책을 읽는 것은 취미가 아니었지만 책을 많이 읽으면 글 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카지노 게임의 말씀으로 인해 도서부에 들어가 책도 많이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때의 난 중학교 2학년이었다.
1년이 지나고3학년이 됐을 땐,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담임 선생님과진로상담을 해야 했다. 카지노 게임께선 결정해 둔 고등학교가 있냐며 무얼 하고 싶냐고 물으셨고, 난 당연히 문과에 진학해 국어국문학과나 문학과에 들어가 체계적으로 글 쓰는 걸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때만 해도 고등학교 진학은 내신 성적과 학력평가를 합산해서 합격해야만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었기에 성적이 되지 않으면 선생님들께선 원서를 써주지 않으셨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께선 인문계에 갈 수 있는 실력이라며 그렇게 진행해 보자고, 내 꿈을 응원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1학기를지나 2학기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난 급하게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작가들은 돈은 많이 못 벌지 않냐?”
은연중 현실을 이야기한 친구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고, 그 뒤로 현실이 다가와 내게 말했기 때문이다.
“꿈 깨!”라고.